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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강원고: 한국사의 특수한 면모들, 외부로부터의 관측
특강원고: 한국사의 특수한 면모들, 외부로부터의 관측
  • 에드워드슐츠 하와이대
  • 승인 2005.11.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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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가운데' 존재한 한국에 대하여

한림대 한림과학원 한국학연구소(소장 한영우)가 12월 7일 제 15회 한국학 콜로키움에 미국 하와이대학교의 E. J. Shultz 교수를 초청했다. 아래는 ‘외부에서 바라본 한국사의 특징’이란 강연원고의 전문이다.  E. J. Shultz 교수는 1966년 한국과 인연을 맺은 이래 한국과 한국의 역사에 많은 애정을 갖고 고려사 연구와 한국사 소개에 탁월한 업적을 냈다. 이번 강연에서는 동아시아의 ‘가운데’에 위치한 한국사의 여러 특징을 서술하고 있다. 내부에서 보기 어려운 한국사의 제 면모가 독특한 시각으로 드러날 것으로 기대된다.

오늘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과 만나게 된 것을 큰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발언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드리고 또 이러한 자리를 만드시느라 수고하신 것에 대해서도 감사의 뜻을 표하는 바입니다. 오늘 제 발언의 주제는 ‘외부인의 눈으로 바라본, 또는 해외의 시각에서 관측해 본 한국사의 특징적 면모들’이 되겠습니다. 생각해 보건대 무엇이 한국사로 하여금 그 나름의 고유한 특징을 갖게끔 하였는지 떠올려 보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1966년 평화사업 자원봉사자로서 한국을 방문한 이래 저는 언제나 한국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가져 왔고, 한국의 길고도 특징적인 역사가 바로 그런 애정의 시발이 되지 않았나 합니다.

제가 이 자리에서 한국사 속에만 존재하였던, 그래서 한국사를 더욱 특징적인 것으로 만들어온 요소들을 언급할 예정이긴 합니다만, 또 한가지 아울러 말씀드려야 할 것은, 한국사 속에는 다른 나라의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요소들과 유사한 요소들 또한 적지않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왕조의 개창과 멸망, 배신과 태만을 보이는 한편으로 관용과 고귀함을 내보이기도 했던 숱한 통치자들의 면모가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 속에는 위대한 순간도 있었고, 고통의 시기도 있었으며, 이러한 경험은 어떤 나라의 역사에든 존재하였기 마련입니다.

한국인들은 오랜 세월 역사라는 개념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해 왔습니다. 조선왕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의 기록을 남겼고, 양반들은 그들의 과거 역사를 한국통사 또는 특정시대사의 형태로 끊임없이 집필해 왔습니다. 또 얼마 안되긴 하지만 남아 있는 자료를 통해 조선시대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끊임없이 역사를 서술해 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김부식 등에 의해 집필된 삼국사기나, 그 한 세기 후 집필된 일연의 삼국유사 등 현재 남아 있는 역사서술 중 가장 오래된 것들이 12, 13세기의 것일 뿐, 그 이전의 역사서술이 남아 있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책을 살펴 보면, 현재는 망실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신라고기나 구삼국사 등 이전의 역사서술에서 인용된 부분이 많음을 알게 됩니다. 고려왕조 또한 조선왕조처럼 조정 내에 역사의 편찬을 담당할 특별관청을 운영하였습니다. 여러 왕들의 재위기간에 벌어진 사건들을 기록하고 왕조의 역사 편찬을 위해 대개의 경우 가장 젊고 총명한 관료들이 이 관청에 배치되곤 하였습니다. 그 결과 많은 역사서술들이 출간, 간행되었고, 이러한 적극적 역사서술경향은 현재로도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연구는 한국사의 거의 모든 분야를 다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최근 서울 중심가의 한 서점에 들려 고려 무신집권기에 대한 책을 찾았더니 무려 ○종의 책이 발견되었음에 놀란 일도 있습니다.

모든 나라는 그 지정학적 위치에 많은 영향을 받기 마련이고, 한국의 역사 및 그 특징들 또한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기인한 바 큽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지리적 특징이 한국의 역사에 미친 영향은 적지 않았습니다. 이른 시기부터 중국의 영향은 한국 내의 변화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였습니다. 중국사에 나타난 시대상들이 이후 한국사에도 나타나고, 중국에서는 이미 해결된 문제들이 이후 한국에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중국인들의 해법을 종종 참조하였지만 그러한 해법에 구속되기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려태조 왕건은 그의 신하들에게 경고한 바 있었는데, 훈요십조의 제4항이 참조가 됩니다. 문화적 참조 및 대여행위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러한 현상에서 한국의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아래 상세히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한국인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지형을 활용하여 이른 시기부터 외적의 침입을 막아오곤 하였습니다. 또 한국인들을 굴복시켰던 이런 지속적 위협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인케 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습니다. 5, 6세기 이래 여러 정치체들이 한반도에 등장하면서, 한국의 저항의 역사도 같이 시작된 셈입니다. 수왕조의 고구려침공 및 그에 대한 고구려의 항전은 전설적인 사건으로, 수왕조의 몰락에 기여하기도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합니다. 7세기 중엽 통일전쟁 당시 신라는 당과 우호관계를 맺는 동시에 자신의 보호를 위해서는 당을 적으로 대하기도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하였습니다. 거란, 여진, 몽골인들은 고려의 주권과 안위를 끊임없이 위협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은 고려말기 비로소 등장하였지만, 이후 16세기말에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기도 했으며, 20세기에 다시 돌아와 한국을 35년간 식민지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침공에 한국인들은 놀라울만한 끈기로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면모가 바로 한국사를 특징지우는 동시에 한국의 문화를 생동감 있게 하였던 것이죠. 을지문덕 등 고구려 저항의 영웅들이나, 신라 문무왕의 당에의 저항은 나라를 보호하는 노력의 대표적인 전형들이었습니다. 고려왕조의 경우 서희의 거란 위협에 대한 저항, 몽골침공의 와중에 한국문화의 고귀함을 주장한 이규보의 저술 등은 한국인들이 스스로의 정체성을 구축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일곱차례 이상의 몽골침공에 대항하여 그 어떤 민족이나 나라보다도 오랜 기간 몽골에 저항하였다는 사실 또한 놀라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최근 시청자들은 이순신의 활약을 드라마로 감상할 수 있었는데, 이순신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역사 속 인물들 중 한 명입니다. 모든 나라들이 영웅들을 배출해 왔지만, 한국의 경우 그러한 영웅의 수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그들의 업적 또한 비교의 대상이 되지 못합니다. 또한, 그러한 영웅들의 뒤에는 그러한 영웅을 지지하고 지원하면서 역사 속으로 스러져 간 수많은 무명의 영웅들이 있었음 또한 기억되어야 합니다. 한국사 속에 끊임없이 등장해 왔던 한국인들의 이러한 면모는 바로 한국의 역사를 생기 넘치는 것으로 유지한 힘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국의 외부와의 관계를 사대주의의 측면에서 언급해 왔으며, 한국인들이 강한 상대, 예를 들어 중국 등의 상대에게 복종하는 자세를 보여 왔다고 여겨 왔습니다. 위에서 살펴 본 저항의 역사는 이러한 입장을 무색케 하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한국이 강대국들 근처에 위치하여 중국 등의 강성한 세력을 상대함에 있어 현실적인 고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음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한국은 스스로의 국익을 지켜 생존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 중국과 보조를 맞추어야 할 때가 많았습니다. 이는 비굴함이 아니었고, 현실이었습니다.

두 개의 상반된 요소가 한국사 속에는 용해돼 있습니다. 국제주의에 대한 강한 지향이 있었는가 하면, 고립에 대한 강한 욕구 및 민족주의가 있기도 하였습니다. 현재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국제화된 나라 중의 하나임에도, 한국인들이 쌀 수입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하고 있음에서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이는 새로운 현상이 아닙니다. 12세기에 묘청은 한반도를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 속에 가두어 두려는 정책에 저항하는 정변을 일으킨 바 있습니다. 묘청의 정변은 실패했고, 고려조정은 중국의 금왕조와 제휴함으로써 한반도를 중국과 유교중심적 사고에 가두게 되었다고 일부 사가들은 평가하기도 하였습니다.

한반도의 여러 왕조들은 ‘가운데 처한 왕조들’이라고 할 만합니다. 중국이 그렇게 불리고 있기도 하지만, 컬럼비아 대학의 Gari Ledyard 교수가 말한 바 있듯이 한국이야말로 ‘가운데 처한 존재’라고 할 만합니다. 중국과 일본의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3국간의 문화전파와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한국은 중국으로부터 지적 사고방식, 새로운 기술, 청자제작 등의 예술적 기능 등을 수입하여 소화하고, 이후 일본에게 그것을 전해주었습니다. 9세기중엽 삼국간 무역을 주도한 장보고는 하나의 예에 불과합니다. 장보고 이전, 이후의 불교승려들도 좋은 예가 됩니다. 이 ‘가운데에 처한 한반도의 역할’에 대해서는 이후 다시 논하도록 하겠습니다.

계보와 혈연은 한국사에 있어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한국인들은 이른 시기부터 사람들을 그들의 사회적 배경 및 출신성분을 근거로 구분하곤 하였습니다. 신라의 골품제가 사람의 위상을 규정하고 더 나아가 가옥의 규모 및 지참물품의 규모까지 규정하는 준거였음이 좋은 사례입니다. 고려의 경우 신라 만큼 엄격하지는 않았지만 계보와 혈연은 여전히 관료 임용의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조선에서도 계보와 혈연은 양반의 신분을 충족하는지를 가늠하는 중요한 변수였으며, 족보의 활용을 통해 계보와 혈연은 쉽게 확인될 수 있었습니다.

관료선발에 있어 功과 능력의 유무와 정도를 강조하는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계보의 절대적 중요성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게 한 바 있었습니다. 출생이나 혈연에 대한 강조를 약화하고 희석하기 위해 한국인들은 고려초기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능력에 의거해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을 관직희망자들에게 열어주었습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과거제는 더욱 철저히 활용되었습니다. 그러나 두 왕조 모두 관가 및 권력에의 통로로서의 과거를 중요시하였음에도, 특정의 계보와 혈연을 지닌 사람들이 이러한 과거시험들을 통과하고 관료가 되는 데 있어 훨씬 유리하였음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한국이 아시아에서 가장 열린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혈연의 중요성은 여전히 한국에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동아시아 삼국에서 능력을 중요시한 정도의 차이를 살펴 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일로, 특히 한국은 중국처럼 관료제적인 사회는 아니었으나, 일본처럼 귀족제적인 사회도 아니었다는 점에서 그 ‘중간적’ 성격이 다시한번 확인된다고 하겠습니다.

혈연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출신지역에 대한 강조 또한 존재하였습니다. 신라의 경우 중요한 계보의 소유자는 경주나 다른 소경지역에 거주하곤 하였습니다. 고려는 족보제작이나 개인의 소속을 표기하는 데 기본적인 자료가 된 본관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사람의 출신지역이나 거주지역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규정하는 근거가 되곤 하였던 것입니다. 경주김씨나 경원이씨 가문의 사람들은 특별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출생신분이 저열한 자들은 향, 소, 부곡 등 특별히 지정된 지역에 거주토록 강요받았습니다. 이러한 정황은 조선시대로도 이어져 신분별로 거주지역의 구분이 존재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사람의 위상을 가늠할 때 그 가문의 지역적 위치를 보는 경향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지역의 개념을 중요시하고 있었음은 풍수지리에 대한 관심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물론 풍수지리학은 중국에도 존재하였지만, 한국인들은 그것을 대단히 높은 경지로 발전시켰습니다.

유명한 고승 도선은 나말여초의 시기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풍수사상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설파하였습니다. 그러나 도선 이전에도 한국인들은 유명한 지역을 방문하여 그 지역의 지정학적 면모를 즐기는 모습을 보여 왔습니다. 신라의 화랑들은 훈련의 한 과정으로서 명승지들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풍수에 대한 관심은 건물위치의 선정에서도 잘 드러나며, 사찰들 또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위치에 지어지곤 하였습니다. 풍수는 자연에 대한 마음속으로부터의 외경과 함께 한국문화의 기본적인 요소이기도 합니다. 무당들의 굿에서도 위치의 문제가 중요하게 고려되었음에서 알 수 있듯이, 풍수는 초기 한국의 정신적 전통에도 잘 드러나 있다고 하겠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교양과 학문에 대한 중시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학문을 아는 사람들이 대체로 역사를 집필한 사람들이기도 했을 것이므로 이는 놀라운 일은 아니며, 이들의 학문과 교양에 대한 입장이 바로 한국사 속 교양과 학문 중시 경향을 낳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난 1천년의 한국사의 가장 큰 특색이라면 무관들에 비해 문관들을 더욱 중요시했다는 점입니다. 무관들이 왕조를 개창하는 데 가장 큰 공로를 세워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왕조체제의 정착을 위한 전쟁이 끝나면 한국사 속의 권력은 항상 민간인 지도자들에게 돌아가는 형상을 보였습니다. 말과 글을 통한, 즉 교양을 갖춘 해법을 무력적 해법 보다 선호하는 것은 일반적인 경향으로 존재해 왔으며, 문관들이 무관들 보다 행정적 통치에 적합하다고 흔히 인식되곤 하였습니다. 이런 사회구조에서 학자들은 사회의 정점에 위치지워지게 되며, 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게 됩니다. 한국의 교육에 대한 지대한 강조는 이렇게 사회적 성공을 보장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의 교육을 중시해 온 역사로부터 기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교육은 유학에 기반해 있었습니다. 유학은 교양을 강조하였으며, 한반도에는 4세기에 소개된 이래 고려와 조선에서 중요한 이념적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유학은 관료선발에 있어 능력을 중요시하였지만, 위계질서 또한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유학의 목적은 사회조화를 만들어내는 데 있었지만, 문자를 아는 자가 가장 잘 통치할 수 있다는 관념 또한 견지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은 지난 1천년간 두 번의 무신집권기를 겪은 바 있습니다. 첫 번째는 고려시대로서, 당시 무신들은 문신들의 도움 없이 통치를 하기 어렵다는 것을 얼마 못되어 깨달았습니다. 두 번째는 1960년부터 1990년대까지 30여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저는 이전에 고려의 최충헌과 일본 가마쿠라막부의 미나모토 요리토모를 비교한 연구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둘은 유사한 시대에 살았던 인물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나모토가 시작한 무신집정의 전통은 600여년간 지속된 반면, 한국의 무신집정은 겨우 100년간 존속하였습니다. 연구과정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한국에서는 장군과 병사들에 의한 지배가 효율적으로 지속되기 어렵다는 점이었습니다. 민간 행정전문가들이 정부운영 및 국가통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였습니다. 강한 관료사회가 존재해야 강한 중앙집권력을 가진 정부가 운영될 수 있었고, 강한 정부가 있어야 침입의 위기에 맞설 군사력 또한 갖출 수 있었다는 아이러니가 존재했던 것입니다.

이로 볼 때 한국사에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주기적으로 등장해 왔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특히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강한 중앙집권력을 갖춘 정부들이 등장하여 왕조를 짜임새있게 다스려 왔습니다. 한국은 지정학적으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압축적인 모습을 띄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중앙집권적 통치를 발동하기에 훨씬 좋은 여건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명령을 전달하거나 그것이 지방에서 시행되는 데 걸리는 시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짧았던 것이죠. 중앙에서 임명한 관리들을 지방에 내려보내는 것도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려와 조선은 또한 대단히 복잡하고 정교한 행정조직을 만들어 징세와 물자수송이 이상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하기도 하였습니다. 중앙정부가 강력하였으므로 그 운영에 많은 사람이 관심과 이해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한국인들이 정치적으로 대단히 활발한 모습을 보여온 원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행정의 측면에 있어, 관료주의가 한국의 정치문화를 규정해 온 가장 커다란 변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강력한 국왕과, 때로는 여왕들이 가끔 등장하기도 했으나, 이들은 한국의 왕정에 있어 예외적인 존재들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왕들은 대개의 경우 정계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관료군에 의해 통제를 받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조선왕조의 당파간 갈등 등에 비추어 한국사회는 정치적 투쟁과 내분으로 차 있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견해는 과장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사회, 모든 나라들은 정치적 분열과 갈등을 그 속에 내포하고 있습니다. 당쟁이라고 흔히 일컬어지는 조선왕조의 내부실정은 관료들의 정치에 대한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징후일 따름입니다.

이렇듯 혈연, 문인통치,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적 관료주의 등에 대한 강조를 고려할 때, 한국사 속에서의 일반인들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요. 유교통치의 기본원칙 중 하나는 바로 농민이 통치의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습니다. 사회위계상 4개의 위상 구분 중 농민들은 학자들의 바로 밑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와도 같이, 한국의 위정자들도 농민들의 요구와 이해관계가 국정에 반영되어야 함을 강하게 인지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인들이 겪은 경험들은 물론 지금의 복지환경과는 다른 여건에서 경험된 것이었지만, 당시에도 대중의 요구와 복지를 담당할 정부기구들이 여럿 설치되었습니다. 유럽의 절대군주정에 비한다면, 농민들이 중시되고 그들의 요구에 정부가 응답하는 정도는 한국이 훨씬 더 크고 적극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이 일반민들이 글을 쓰고 읽을 수 있게 하기 위해 한글을 창제한 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에는 또 강한 미학적 영감이 내재해 있기도 하였습니다. 한국인들에게는 고도로 발달된 예술적 창의성이 있었고, 그러한 창의성은 주기적으로 한국사 속에 등장하게 됩니다. 신라초기의 금공예에서, 또 한국사 전기간을 통해 드러나는 수많은 건축물들, 고려와 조선의 청자 예술품들, 그리고 음악적 창작물들을 통해 그러한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미술적 창조는 불교신앙에서 기인하기도 하였고, 한국인의 창조적 본능의 결과물이기도 하였습니다. 저 또한 한국에 대하여 외국인들이 알아야 할 10가지에 대해 짧은 글을 기술한 바 있으며, 그 안에 저는 한국인들의 자연에 대한 사랑, 한국인들의 유교적 전통, 그리고 그 장구한 역사를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나 한국문화의 창조적 특징 또한 대단히 중요하며, 그것은 뭐라 규정하기 어려운 한국인의 혼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닌가 합니다.

이른 시기 중국의 기록에서는 한국인들이 가무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기술들이 발견됩니다. 이 나라에서 길든 짧든 체류할 기회를 가져본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의 모습이 현재에도 이어져 있음을 금방 발견하게 됩니다. 1990년대 후반 주말마다 고속도로를 달리는 버스들의 내부통로에 사람들이 서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보곤 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정신은 이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러한 내적 역동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여러 종류의 조류들이 한국인의 문화에 용해되어 있음에 주목해야 합니다. 조선시대의 음악에 비유해 본다면, 한쪽에는 가야금과 단소의 음률을 즐기는 양반문화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는 징과 북으로 구성되는 농악을 즐기는 농민들의 문화가 있었습니다. 어떤 경우 이 두가지 다른 양상의 문화가 한데 어우러져 역동적인 결합으로 이어지기도 합니다. 왕실의 살풀이춤이 지방의 탈춤 등과 함께 공연되기도 하였습니다. 탈춤의 경우 그 풍자의 대상이 바로 양반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예술적, 음악적 표출에는 항상 절제와 충일함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화가 바로 한국사 속 한국인의 정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오늘날 세계는 한국의 문화를 ‘한류’라는 현상을 통해 새로이 발견하고 있습니다. 한류의 성공요인 중 하나는 아무래도 전술한 절제와 충일의 조화가 아닌가 합니다. 패션에도, 영화에도, 드라마와 음악에서도 이러한 조화는 흔히 발견됩니다. 그리고 한국의 역사 속에 꾸준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음 또한 엿볼 수 있습니다.
한국의 역사는 역동적인 것이었으며, 그러한 역동성은 21세기의 시작점에 서 있는 한국의 모습에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부모세대가 운영한 삶의 방식은 여러분들의 조부모세대가 운영했던 삶의 방식과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운영하고 있는 삶의 방식을 떠올려보고, 여러분들의 자녀세대가 운영하게 될 삶의 방식에 비교해 본다면, 그들은 여러분들이 살던 세상과는 현저히 다른 세상에서 살게 될 것이며, 다른 성격의 기대를 사회로부터 요구받게 될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사 속에서, 이렇듯 짧은 기간에 이렇게 폭발적인 변화를 겪었던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습니다. 최근 저는 서강대를 방문한 바 있었는데, 35년 전에 제가 대학원생으로 수학한 학교입니다. 1970년에 제가 받은 연구실에서는 도시의 남쪽을 바라볼 수 있었고 저의 시야에는 철로와 한강, 멀리 서 있는 산 등이 보일 따름이었습니다. 지금은 그러한 전망이 고층건물들과 아파트들로 인해 막혀 있습니다. 지난 35년 사이의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서울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이러한 변화의 속도는 전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또한 한국인들의 역동성을 나타내주는 대표적 현상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다른 분들이 여기시기에 한국사의 중요한 모습들로서 제가 여기 언급하지 못한 것들도 많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워싱턴대학의 James Palais 교수는 10년전 유사한 주제로 발표를 한 바 있었고 당시 그는 노비, 양반과 귀족, 당쟁의 구습, 절대군주들의 약한 면모, 장수, 왕조의 안정성 등을 들었습니다. 이러한 정황들도 검토할 가치가 물론 있겠습니다만, 저는 제가 지적한 부분들로 만족하고자 합니다. 경청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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