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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깨부수기, 한문 고전의 경우
우상 깨부수기, 한문 고전의 경우
  • 김영환 부경대
  • 승인 2005.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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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론: 강명관 교수의 '비평정신'(교수신문 제380호)을 읽고

“나는 이른바 실학자들의 생각과 학문, 문학 속에 ‘민족’이란 요소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을 일괄하여 민족, 그리고 나아가 근대란 코드로 읽어내려는 것은 강박증이 아닌가 한다.”

교수신문 지난 호(11.28)에 실린 강 명관 님의 글 <박제가의 반민족주의>에 나타난 이런 생각은 온당해 보인다. 그런데 다른 여러 부분들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실학자 박 제가의 사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 우리나라는 땅이 중국과 가깝고 音聲도 대략 중국과 같다. 그러니 온 나라 사람이 본래 말(한국어)을 깡그리 버린다 해도 안 될 것이 없다. 그렇게 한 뒤라야 오랑캐라는 한 글자[夷]로 불리는 (수치를) 면할 수 있고, 수천 리 우리나라 땅이 절로 周·漢·唐·宋의 風氣를 갖게 될 것이니,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우리말을 버려야 오랑캐라는 부끄러움을 면할 수 있다는 박 제가의 주장은 전통적 중화 의식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말이 다름은 그리스와 마찬가지로 중국에서도 오랑캐라는 주요한 증거였다.

“음성도 대략 중국과 같다”는 말은 한자를 읽는 소리가 중국과 거의 비슷하다는 말일 뿐이고, 계통이나 말본이 너무나 다른 우리말과 중국어의 차이를 그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도도한 주장은 그가 우리가 쓰는 입말은 아예 생각도 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중국과 같아져야 오랑캐를 면할 수 있다는 전형적인 유교적 세계관은 삼국 시대나 고려 때부터 흔히 나타난다.

이 점에서 박 제가는 최 익현이나 유 인석이나 전혀 다른 바가 없다. 나라의 말이 중국과 다르다는 15세기 세종의 말글 의식에서 퇴행하고 있는 것이다. 최 만리보다 더한 사대모화의 표현이다. 모국어를 버리고 중국어를 배워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박 제가는 김 정희처럼 중국 문화에 대한 취향이 두드러졌던 사람이다.

 다음으로 겨레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들 세 사람의 차이를 “극과 극을 달리는”으로 볼 것인가라는 점이다.

  박 제가는 전형적인 화이론에 따라 모두 중국식으로 바꾸자는 것이고, 이런 생각을 비판한 이 덕무는 말과 옷, 고유 풍속은 그대로 두되 생각과 판단은 중국 고전에 기대자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국 사람이 만든 경전이 본질적으로 중국 중심주의를 담고 있다는 데 있다. 인과 덕과 같은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덕목에서부터 풍속에 이르기까지 중국 중심적인 생각이 유교 경전에 적지 않은 것이 문제다.

이 덕무의 생각은 논리적으로 일관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지성으로 사대한다면서 중국과 다른 글자를 만드는 세종과 비슷한 처지다. 사대에 어긋난다는 최 만리의 공세에 세종은 답변을 할 수 없었다. 발해를 우리 역사에 포함한 것으로 유 득공은 민족주의라고 해야 할까. 국문 문학옹호론을 편  김 만중이나, 조선 시 옹호론을 편 정 약용을 민족주의자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발해사를 우리 역사에 편입했다는 이유로 유 득공을 민족주의자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답답한 정도의 전형적인 주자학의 중화주의에서는 벗어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이들 사이의 차이는 민족주의와 반민족주의의 차이라 보기보다는 유학이 갖는 강력한 중화주의를 교조적으로 따를 것이냐 유연하게 볼 것인가의 차이다. 발해사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본 유 득공은 ‘에누리없는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다음으로 박 지원이 든 <<천자문>>에 대한 반감도 고전적 중화주의에서 벗어나는 좋은 보기다.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며”에도 짙은 중화주의가 베어난다. 검은 하늘이란 관념은 중국적 하늘의 형이상학적 뜻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개념이며 우리의 지각과 어긋나는 말이다. 땅이 누렇다는 것도 화북 지방의 황토 빛깔을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실감나는 말이 아니다. 논어와 천자문으로 구체화되는 유학은 우리를 끝없는 중화주의로 빠져들게 한다. 강명관 님은 이 말을 '天자는 푸르지 않습니다’로 옮겨 개념화의 폭력적 동일성에 대한 저항으로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다른 번역에서는 "하늘은 푸르기만 한데 ‘天’자는 푸르지 않다고 합니다"로 옮겼다.(김근 지음, <<욕망하는 천자문>>, 30쪽) 추상적 사고에  약한 중국적 전통을 생각하면 뒷것이 더 올바른 것이라 생각된다. 한국인이 쓴 한문으로 쓴 문학 작품이 국문학에 속한다고 하였으나 이는 논리적으로 따지면 유지되기 어려운 주장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우리 조상이 쓴 한문학이 우리 문화나 역사와 무관하다는 뜻은 아니다. 조상들이 쓴 한문학이 우리 문학이냐 아니냐를 두고 시비가 있는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말글의 특수성에서 비롯되었다.

  학문과 교육이 우리말글을 무시하는 빌미가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언문은 나날의 입말이며 학문에 쓰이지 않는 말이었다. 학교 이름에 민족 사관을 내세우며 영어로 교육하고 배우는 고등학교가 있다고 하며 민족의 대학이라면서 영어로 한국 문학을 강의할 미국인을 뽑겠다고 자랑스럽게 발표하고 있다. 미국말로 강의하는 교수를 뽑는다는 게 일류 대학이라는 증거가 되고 있다. 60여 년을 넘기는 미군 점령의 결과로 나타난 뼈아픈 희극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말 버리자는 주장이 박 제가나 이 광수에 그친 것은 아니었다. ‘夷言, 鄕言, 方言’이라 여겨온 우리 ‘전통’에서는 문화어‧보편어는 언제나 우리말과 글이 아니었다. 천여 년을 넘게 고전 중국어였고  한때는 일본어였고 이제는 미국말이다.

박 제가야말로 말과 글에 대한 우리 지식인의 통폐가 어떤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산 표본이다. 우리 지성사에서 흔히 볼 수 있었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보게 될 우리의 슬픈 모습이다. 우리말을 오랑캐말로 여기던 태도는 자본 쪽에서 줄기차게 제기하는 미국말 공용화나 미국말 강의를 늘리는 것이 앞서가는 대학의 상징처럼 되고 있는 오늘날에도 엄연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이제는 관료마저도 제주도와 부산에서 미국말에 빠뜨리는 교육을 하겠다고 나서고 있다. 우리말과 글을 보는 이런 폭력적 태도는 낡은 것이다. 교육과 학문에서 제나라 말과 글을 그 매체로 삼는 것은 세계 여러 나라를 보더라도 결코 흔하지 않은  우리만의 엄청난 자산임을 깨우쳐야 한다.

 강 님의 주장처럼 민족주의는 제 나라 말 지키기에 열중하는 것이 사실이다. 민족주의가 마치 온갖 거짓의 대이름씨처럼 여기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으니 이전 주장도 제 나라 말 지키자는 주장도 허구적이고 의심스러운 민족주의로 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우리말과 글의 순수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운동’이라 보일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번져가는 미국말 숭배는 사대주의에 앞서 외국 것 받들기에서 권위를 찾으면서 민중에 군림해 온 우리 지식인의 낡은 버릇을 되풀이하는 것일 뿐이다. 우리말글에 대한 존중과 사랑은 ‘의심스러운’ 민족주의에서 오기보다 우리 지식인의 삶의 방식에 대한 반성에서 나온 것이라 보아야 한다. 

  지난날 우리는 중국 고전 읽기에 온 지식인이 목을 맨 채 수천 년을 소비하였다. 그렇다고 중국인이나 일본인이 존중할만한 새로운 사상이나 연구를 내놓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지식인이 몇이나 될까? 몇몇 사람 빼면 거의 모두가 중화주의에 깊이 물들어 들여다볼수록 아픈  곳이 덧날까 두렵다. 가끔 사대‧모화와 거리가 있는 지식인이 있더라도 한글로 기록을 남긴 사람은 정말 드물었다.

 우리 말글 사랑이란 우리 역사에 비추어 보면 매우 근본적인 주장이다. 오랑캐말을 학술어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국 고전을 읽을 때 비평 정신은 우리가 아무런 비판없이 자명하게 받아들여온 동쪽 오랑캐‧명나라의 동쪽 울타리라는 우상을 깨부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돌려야 마땅하다. 우리가 오랑캐라 불리는 부끄러움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오랑캐로 보는 중국 고전이 허구이며 의심스럽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오랑캐를 벗어나려고 발버둥쳐서 작은 중화가 되는 것은 오랑캐로 남아 독자성을 갖는 것보다 더 비참한 게 아닌가. 중화주의의 허구를 보지 못할 때, 이제 막 움트는 우리말 사랑 운동도 ‘국어의 순수성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운동’으로 보일 가능성이 크다.

  스스로가 만든 우상에서 우리가 자유로와야 한다는 강 님의 주장에는 공감이 간다. 그렇지만 한문 고전에서 우릴 짓누르는 가장 큰 우상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덮씌운 오랑캐라는 굴레가 아닌가. 오랑캐의 말과 글은 학문과 교육에 걸림돌이 된다는 낡은 생각은 무의식적이긴하나 아직도 도도한 흐름이다.

깨부수어야 할 우상은  한번도 제대로 피지 못한 민족주의가 아니다. 코즈모폴리탄적인 기독교 제국에서 근대에 민족이 갈라져 나온 것에 비기면 한족 주도의 중화 제국에서는 일찍부터, 비록 근대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민족이나 국가라는 의식이 있었다. 성급하게 외국 이론을 들여와 민족은 허구니 의심스럽다고 양심 고백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글쓴이; 김 영환(부경대 신방과, 철학 전공)

       서울대 박사(주 희 철학의 마음 개념에 대한 비교 철학적 연구.2000.2)

       ‘과학적’ 국어학 비판. <<한글>> 2001.6

        학문 언어로서의 배달말<<새한철학>>2001.7 등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편집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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