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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_한국 역사스릴러의 신기원, 김탁환의 소설들
비평_한국 역사스릴러의 신기원, 김탁환의 소설들
  • 김영성 한양대
  • 승인 2005.11.2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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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 통한 역사의 귀환 … 인간은 만났는가

기억보다는 망각이 우선하는 법이다. 보르헤스의 소설에 등장하는 푸네스처럼 모든 걸 기억할 수도, 영화 ‘프리즈 프레임’의 주인공 숀 베일처럼 모든 걸 기록할 수도 없으니 기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잊어버려야 한다. 기억과 망각의 존재론으로 명명된 이 법칙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다.

역사 역시 예외가 아니다. 아무리 방대한 역사서라고 할지라도 기록하기 위해서는 기록하려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지워버려야 한다. 문학이 역사에 대해서 말할 때 주목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역사가 선택한 기억이 얼마나 정당했는가를 문제 삼기 위해, 문학은 언제나 잊혀진 것들을 현실로 귀환시키는 통로가 되어왔다.

 
김탁환에 의해 창작된 일련의 역사소설도 그와 다르지 않다. 김탁환은 자신의 소설에 통로를 마련해두고 그 길로 역사에 의해 삭제된 인물과 사건들이 뚜벅뚜벅 걸어 나오게 한다.

그런데 특이할 만한 것도 주목받을 만한 것도 없는 그 귀환 중에서 유독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게 있다. 추리로 포장된 길을 이용한 귀환들이 그것이다.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서 김만중의 귀환과 ‘방각본 살인 사건’, ‘열녀문의 비밀’에서 백탑파의 귀환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이 특이한 귀환에 주목하는 순간,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왜 하필 추리일까. 추리를 통해 독서 과정의 재미를 증대시킴으로써 지식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고 했다는 대답은 상식적이다. 뭔가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대략 추리소설, 역사소설, 역사추리소설, 메타픽션이라는 네 개의 시선이 필요하다.

추리소설로 읽었을 때, 문제가 되는 것은 지적 유희의 수준이다. 만델이 ‘즐거운 살인’에서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추리소설은 분석적이고 정정당당한 게임의 규칙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범죄에 숨겨진 트릭이나 범인이 지목되는 순간의 반전이 얼마나 교묘했는가에 따라 추리소설의 성패가 좌우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김만중의 말년과 ‘사씨남정기’의 창작 과정을 복원하기 위해 ‘추리적 기법’을 활용한 ‘서러워라’보다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추리소설 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백탑파 시리즈가 훨씬 성공적이다.

백탑파 첫 번째 이야기 ‘방각본’의 서두에서 소개되고 있는 김진과 이명방의 관계는 포우 이래 추리소설의 전통으로 자리 잡은 ‘탐정-관찰자(기록자)’의 관계를 연상시킨다. 꽃에 미친[花狂] 김진은 뛰어난 관찰력과 명민한 분석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안락의자형 탐정의 전형이다.

그리고 의금부 도사인 이명방은 홈즈 이야기를 기록하는 왓슨처럼 1인칭 시점으로 김진이 해결한 범죄를 기록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계는 범인 찾기가 계속되면서 변모하게 된다. 백탑파 시리즈에서 이명방의 역할은 탐정과 독자를 매개해주는 것 이상이다. 사건의 중심부에서 나름대로 해결을 모색하는 이명방의 면모는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의 대표적 탐정 필립 말로우와 일정 부분 닮아 있다.

‘방각본’과 ‘열녀문’은 김진이 제공하는 지적 만족감과 이명방이 제공하는 긴박감의 결합을 통해 추리소설로서의 흥미를 배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친절하게 이 이상을 알려주는 것은 추리소설로 김탁환의 소설을 읽으려 하는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니다. ‘방각본’에서 청운몽의 방각 소설과 관련된 연쇄살인의 범인이 누구이며 ‘열녀문’에서 김아영의 자살에 숨겨진 사연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재미는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김탁환이 추리소설을 타임머신에 태워 과거로 보낸 까닭을 더듬어 보는 것이다.

역사소설로 읽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이 근본적으로 추리의 산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역사소설이 창작되기 위해서는 알려진 것을 통해 알려지지 않은 것을 복원해내는 일련의 추리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역사소설이 필연적으로 기록된 역사를 바탕으로 한 추리일 수밖에 없을 때, 그것을 평가하는 기준은 史實과 현재 사이의 균형이 될 수밖에 없다.

작가의 현재적 욕망이 아무리 강렬할지라도 18세기의 역사는 장희빈을 몰아낸 김만중이나 개혁을 이뤄낸 박지원을 허락하지 않는다. 작가가 공인된 역사를 훼손하고 현재적 의미만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역사소설은 공상소설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김탁환의 세 편의 역사소설은 이러한 역사와 현실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견뎌낸다. ‘서러워라’에서 ‘사씨남정기’, ‘방각본’에서 백탑파, ‘열녀문’에서 열녀 정려와 야소교[천주교]를 둘러싼 갈등과 음모는 결코 공상이 아니다. 그것은 작가 김탁환이 기록된 역사에서 찾아낸 틈이며 삭제된 기억이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을 끄는 것은 각 책의 말미에 제시된 참고문헌이다. 그가 참고한 자료들이 얼마나 적확하게 소설 속에 녹아들었고, 그가 복원한 18세기가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를 판단하는 것은 또 다른 검토를 필요로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김탁환의 소설을 추리소설과 역사소설의 교차점에 있는 역사추리소설로 읽을 필요가 있다. 역사추리소설은 추리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자신이 사실(fact)과 허구(fiction)의 결합인 팩션(faction)임을 강조한다.

최근 ‘다빈치 코드’ 류의 팩션이 서점가의 화두라는 점, 그리고 이것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경계가 소멸하는 포스트모던적 상황의 반영이라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문제는 왜 수많은 팩션이 역사추리소설의 형태로 창작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포함해서 많은 역사추리소설이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은 인식론에 집착하는 추리소설에 정면으로 도전하면서 존재론적 차원의 질문을 던진다.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사고에 근거해서 범인을 ‘알아내는’ 것이 추리소설의 전부다. 추리소설이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일 뿐이라는 혹독한 비판에 직면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은 범인 찾기에 골몰하는 추리소설의 그러한 전통에서 벗어남으로써 그 한계를 넘어서고자 한다. 역사는 그러한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을 위한 중요한 공급원이다. 알 수 있는 것보다는 알 수 없는 것이 많은 역사에 대한 탐색을 통해 인식론의 한계를 직접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김탁환의 소설을 역사추리소설로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형이상학적 추리소설에 접근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탐정의 패배나 미해결의 사건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그러한 접근의 장애물임에 분명하다. 모독은 끝끝내 ‘사씨남정기’를 지켜냈으며, 김진과 이명방은 연쇄살인사건의 진범과 김아영과 관련된 진실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소설들이 이성이 승리하는 ‘행복한 결말의 장소’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성의 힘을 빌려 지켜야 할 것은 지키고 알아내야 할 것은 알아냈지만, 정작 중요한 것에 대해서는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설에 대한 것이 그렇다.

따라서 마지막으로 우리는 김탁환의 소설을 메타픽션으로 읽어야 한다. 그의 소설은 소설의 존재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세 소설 모두에서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소설이며, 그 소설에 미쳐있는 인간이다. 소설이란 무엇이며,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를 찾아내는 것, 그것이 김탁환 역사추리소설의 진정한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는 소설의 주인공들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서러워라’의 팜므 파탈 백능파, ‘방각본’의 좌절한 매설가 청운병, ‘열녀문’의 기생 계목향을 통해서도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사람들은 역사가 선택한 큰 이야기[大說]가 아니라 역사 너머로 사라질 수밖에 없는 작고 사소한 이야기[小說]에 집착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방각본’의 말미에서 김진이 보여주는 幻術을 통해 상징적으로 제시되어 있다. 태워도 거듭 살아나는 종이처럼 소설이 영원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 담긴 희노애락과 깨달음에 인간의 끝없는 갈망 때문이라고.

김탁환 소설에서 추리가 잊혀진 것들을 현실로 귀환시키는 통로가 되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는 추리가 잊혀진 역사에 대해 ‘알 수 있는’ 수단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추리라는 통로를 통해 소설과 그것을 읽는 인간에 대한 존재론적 해명까지도 나아갈 수 있음을 명증하게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김탁환의 바람처럼 우리가 “추리인 줄 알고 들어갔다가 인간을 만나”고 나왔는지에 대한 대답은 유보적이다. 여전히 역사와 인간에게는 기억되는 것보다는 잊혀지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김탁환의 인식은 우리 소설의 영역을 넓힐 수 있는 촉매제가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긍정적이다. 이는 김탁환 스스로 기괴소설이라고 명명한 ‘부여 현감 귀신 체포기’을 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괴력난신과 탐정의 추리 능력이 능수능란하게 결합된 이 작품은 확실히 우리가 이전에 읽었던 어떤 소설과도 닮아있지 않다. 그것은 새로운 장르의 추리소설이면서 동시에 현대에 부활한 기괴담 혹은 송사소설이다. 이 낯설고 황당무계한 귀신 체포기를 읽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전혀 다른 讀法이 요구된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이 자리의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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