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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비평_우리시대의 抒情詩를 찾아서
문학비평_우리시대의 抒情詩를 찾아서
  • 채은 시인, 동국대
  • 승인 2005.1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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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하기, 동경하기, 고통을 응시하기

어느 세대건 그들만의 새로운 문학사를 꿈꾼다면 그들만의 새로운 시적 상상력과 서정성의 목록들을 마련하고자 애쓰는 일은 당연할 뿐더러 반드시 그러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이에 대해 지극히 세속화된 세대론이나 인정 투쟁 논리 혹은 낡고 고루한 새것 콤플렉스 따위를 떠올린다면 그만큼 이 세계를 비루하게 만드는 일도 드물 것이다.

테리 이글턴에 따르면 문학은 잡초다. 물론 그가 사용한 잡초라는 비유는 대단히 긍정적인 측면에서 기능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긴 하지만, 도무지 무엇이라 명명하거나 인준하기 애매한 요령부득의 장소에 또는 그런 장소에만 문학의 영역이 허락되어 있다는 뜻으로 바꾸어 말해도 그리 크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이미 명백해진 것은 아무리 아름답다 할지라도 이미 문학적 소임을 다한 것이다. 좋고 익숙한 아름다움보다 나쁘고 생경한 새로움이 더 미적인 까닭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사실을 말하자면 지금은 서정성 자체가 의심과 불신의 대상에서마저도 밀려난 시대다. 그러니까 끊임없는 불안과 동요 속에서도 자신만의 고유한 내면의 목소리를 따라 세상만물과 부드럽게 통섭하고 조화롭게 화해할 수 있다는 신념은 이제 저자거리에서도 반품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돌이켜 보건대 철 이른 후일담들로 가득하던 구십년대 초반 맨발로 눈길 위를 걸어가 빈집 속에 홀로 유폐되길 자처했던 일군의 시인들은 눈물겹도록 아름다운, 서정의 마지막 파수꾼들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 파수꾼들 가운데 핵심적인 인물들로는 역시 이윤학, 장석남, 박형준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의 서정성은 각기 그 출처가 다를 뿐더러 이후 선보인 시적 궤적들도 꽤나 상이하지만 서정시라면 응당 지녀야 할 전통적 가치들에 대한 믿음은 굳건하게 공유하고 있다.(때로 이들은 서로 동일한 시적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주저 없이 밝히곤 했는데, 박형준의 세 번째 시집에 실린 ‘城에서 1999’(‘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는 이윤학이 그 당시 자신의 시 작업의 연원에 대해 토로할 때 자주 거론하곤 했던 이야기를 좀 더 생생하게 살리고 있는 시다.) 그리고 그 믿음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우선 박형준부터 말하자면 그는 흔히 첫 시집에서 ‘소멸의 미학’을 극대치로 보여준 시인이라 평가되곤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박형준을 그저 퇴행적이라거나 애초부터 늙은 시인이라고 넘겨짚는 일은 완전한 오독이다.

박형준은 표면적으론 소멸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낡아 사라져가는 대상들에 내재한 기억과, 기억의 힘에 대해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그의 등단작이기도 한 ‘家具의 힘’(‘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은 여러 번 이사하는 동안 곳곳에 흠집이 난 장롱과 다리가 부러진 가구 그리고 고물이 되어버린 라디오에 대해 그저 그런 낯익은 연민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듯하나, 본질적으로는 그러한 낡은 것들이 “상심한 가슴을 덥”히는 “추억의 힘”이라는 사실을 내밀하게 들려준다.

추억이란 실용적 가치는 전혀 없지만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과 내력을 구성하고 밝히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동력이자 장치라는 사실엔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박형준이 구십년대 초반에 추억 또는 기억의 힘에 대해 새삼스럽게 말했다는 점은, 그 시기상 상당히 정치적인 의미를 지닌다.

즉 자기 자신의 근거를 외부에서 찾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내부에서 발굴하고 재구성하겠다는 의지는 살아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욕스러웠던 지난 연대의 고통과는 전혀 다른 감각을 선사한 것이며 이는 완벽히 내적인 개인의 재기획과 직결되는 사안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에 두터운 신뢰를 보냈던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제안한 기억의 힘이 고정불변하는 어떤 실체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조용하지만 역동적인 생성의 가능성과 결부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점은 박형준의 시가 대부분 너무나도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성되어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지만 예컨대 “미세한 추억을 나르는 모래들은 이 밤에 사구를 하나 만들 것이다”(‘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 같은 시집)와 같은 구절은 추억이 얼마나 다이나믹한 가능성들을 내장하고 있는지에 대해 누설하고 있다.

따라서 박형준이 지금에 이르러 추억을 “내 환각이 만들어낸 도피처”(‘地坪’, ‘춤’)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여태까지의 자신의 시 작업에 대한 폐기나 모종의 변명이라기보다 역설적이지만 그의 시론을 극대화한 결과인 셈이다.

박형준에 비해 장석남은 보다 더 실제적인 추억의 장소와 대상들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다. 즉 그의 시에는 추억의 끝자락과 맞물려 있는 지명과 사건들이 처음부터 구체적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장석남에게는 “귀순”하고자 하는 욕망과 함께 “망명”에 대한 열망 또한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귀순하는 저녁’과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새떼들에게로의 망명’)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는 이후 동경 자체가 동경의 대상이 되어버렸다고 말해도 좋을 만큼 낭만적 동경에 매료된 자의 내적 풍경으로 가득하다. 예컨대 ‘水墨 정원 5―물의 길’을 보자.

“바다에 나가는 수많은 길들 중에 내가 택한 길은 작은 냇물을 따라가는 길이었네 / 내가 닿는 바다는 노인처럼 모로 누운 해안선의 한모퉁이였네 / 나를 내려놓고 길은 바닷속으로 잠겨들어가버리곤 했네 / 그러면 나는 두리번거리다가 그만 어둠이 되곤 했네 / 어둠을 이고 서 있는 소나무가 되어버리곤 했네”(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에 수록)

이 시는 동경의 기원과 과정을 고스란히 적시하고 있는 좋은 사례다. 이 시에서 화자는 작은 시냇물을 따라 그토록 갈망하던 바다에 이르러 마침내 발견한 풍경이 “해안선의 한모퉁이”에 지나지 않았다는 점을 발견한다. 이는 단순히 자신을 그동안 추동시켰던 동경의 대상이 사라져버렸다는 해묵은 비가와는 다소 결이 다르다. 오히려 장석남은 그가 궁극적으로 동경하는 대상이 없는 곳에서 스스로 동경의 화신이 됨으로써 동경 자체를 미적인 자양분으로 바꿔버린 것.

장석남이 유별나게 돌을 좋아하는 까닭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의 다른 시집의 표제를 빌려 말하자면 “간신히 아무도 그립지 않을 무렵” 터득한 “보고 싶어도 참는 것 / 손 내밀고 싶어도 / 그저 손으로 손가락들을 만지작이고 있는”(‘새로 생긴 저녁’, ‘미소는, 어디로 가시려는가’) 자신의 위태로운 사랑에 온 생을 걸고 있는 자다.

박형준이나 장석남과는 달리 이윤학의 시는 정말이지 지나칠 만큼 건조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곧잘 직구에 비유되곤 한다. 그런데 이윤학의 건조한 시는 장석남이 소망했던 “가슴으로 걸어본 사람(만이) 기억”하는 잘 마른 추억과 영혼이 단단하게 응집된 그림자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박형준이 기억의 힘에 기대고 있다면 이윤학은 “침묵의 힘”(‘겨울 나무 1’, ‘먼지의 집’)을 역설하고 있으며, 장석남이 눈보라 속에서 썰물 위를 걸어갔다면(‘나에게 온통 젖어버리는’, 같은 시집) 이윤학은 “마른기침” 소리마저 사그라든 “돌가루가 날리던 폐광촌의 새벽길”을 따라 먼지의 집에 자신의 거처를 마련한다.(‘판교리 1’)

그렇기에 이윤학의 시집에서 물기는 고사하고 일말의 습기라도 바란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이처럼 그의 시가 서정시라기엔 과도하게 메마른 표정으로 일관하는 까닭은 추측컨대 “상처를 감추려는 사람은 어느새 / 말이 많아진다는”(‘제비’, ‘붉은 열매를 가진 적이 있다’) 사실을 거의 생래적인 직감으로 알고 있는 시인이기 때문인 듯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윤학은 생의 극단적인 고통을 드러내는 데 서슴없다. 예컨대, 보라. “삽날에 목이 찍히자 / 뱀은 / 떨어진 머리통을 금방 버린다 // 피가 떨어지는 호스가 방향도 없이 내둘러진다 / 고통을 잠글 수도꼭지는 /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 뱀은 쏜살같이 / 어딘가로 떠난다 // 가야 한다 / 가야 한다 / 잊으러 가야 한다”(‘이미지’, ‘아픈 곳에 자꾸 손이 간다’)와 같은 시는 도대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도저한 고통의 장면을 묘사하는 데에만 통째로 바쳐져 있다.

그렇기에 이윤학의 시는 우리가 애써 외면해왔던 실재가 도래하는 바로 그 순간을 지향하고 있으며, 또한 그렇기에 말 그대로 끔찍하게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끔찍한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현기증이 노래지도록 / 신물이 넘쳐나도록/하루 종일 귤만 까먹”(‘하루 종일 귤만 까먹었다’, ‘그림자를 마신다’)는 종류의 일이다.

알고 보면 생은 견디기 힘들 만큼 참담한 것이다. 다만 이 참담한 아름다움과 매혹적인 동경과 찬란한 환각이 “설화”(박형준, ‘地坪’)가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그때 이들은 자신의 세대를 뛰어넘어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사의 심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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