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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정생은 보릿고개 때 부르디외를 떠올린다
과정생은 보릿고개 때 부르디외를 떠올린다
  • 김지수
  • 승인 2022.04.14 08: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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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김지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전공
박사과정

한국에서 대학원생의 삶을 살다 보면, 진리 혹은 지성의 추구보다 일상적인 생존의 문제라는 무게를 더 크게 느끼게 된다. 돌이켜 보면 공부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늘 어딘가의 가장자리에 간신히 매달리면서 살아왔다는 느낌이다. 별도의 ‘밑천’을 갖추지 못한 과정생에게 재학 동안의 과제는 졸업과 수백만 원에 달하는 매 학기 학비와 생활비, 세 가지를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진학 전부터 취업을 통해 등록금을 벌어두어야 하는 ‘이행기’가 필연적으로 생기고, 이렇게 번 돈은 진학 후 한두 학기를 버티면 사라진다. 이제 남은 학기마다 등록금을 대출받고, 매년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일거리가 없는지 헤매어야 한다.

학교나 국가에서 장학 관련 프로그램을 충분히 제공하면 다행스런 일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많다. 매년 선정여부가 불확실한 연구재단의 지원사업은 인문사회계열 연구자를 위한 보험이지 안정적인 기반은 아니다. 어쩔 수 없이 학교 바깥에 있는 기관들을 거쳐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런 노동들은 본인의 연구관심사나 주제와 거리가 먼 경우가 많고, 자신의 실적이나 공부를 위한 연구활동은 점차 밀려난다. ‘프리랜서’로서 연명하는 우리에게, 매년 늦겨울부터 봄철 사이는 일거리가 떨어지는 ‘보릿고개’의 시간이다. 봄은 옷자락에 따라붙는 유령들이 이런 질문을 던지는 계절이다. ‘너는 형편도 안 좋은 애가 어쩌자고 공부를 하니?’ ‘졸업은 어떻게 하려고?’ ‘졸업 후에도 불안정한 삶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있니?’

중요한 것은 이 모든 문제가, 학교 공간으로 돌아오면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대학, 특히 대학원 사회로 갈수록 ‘계급’과 ‘연구자의 사회안전망’이라는 문제는 사라지는 것처럼 보인다. 정교원 임용을 제외하고는 ‘장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삶’에 대한 미래전망이 부재한 학교에서, 동료들 중 ‘존버’를 하기 힘든 사람들은 쉽게 이탈하고, 초기에 경제자본이나 문화자본을 얼마간 갖고 있어 이런 삶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남는다. 비판적 인문사회과학을 할 수 있으려면, 그 비판적인 감각을 갖고 연구자로서 나 자신을 유지할 수 있으려면,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이 있어야 한다는 역설이 있다.

이는 학술 공간이 시간이 지날수록 계급적으로 균질화되는 상황들과 무관하지 않다. 대학에서 비교적 ‘중산층’이라는 자기 위치성을 성찰하는 연구자들의 사례를 보기는 쉬운 반면, ‘노동 계층 출신’의 연구자는 주변적인 위치에 존재하거나 자신의 이중적 위치를 다소간 검열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식인이 더 이상 경제적 부유를 의미하지 않으며, 오히려 반지성주의의 사회라고도 하지만, 상징자본으로서의 지성의 위치 그리고 대학 중심의 제도적 학술 장에서 특정 방향으로 수렴되는 지식인의 계급적 위치성은 여전히 건재하다.

자신의 삶의 궤적과 이력으로부터 연구자의 입장이 형성되고 진리가 정향되는 것이라면, 최소한 우리가 질문을 던지면서 계속 갖고 가야 하는 문제는 학술·지식 장의 구조와 재생산이라는 문제일 것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부르디외는 이런 점에서 사회학의 연구대상을 그 자신이 속한 ‘프랑스 지식 장’으로 설정하고, 지식 장의 지배적 구조와 하비투스의 상호 발생적인 관계를 분석했다. 그는 지식 장을 변화시킬 수 있는 상징혁명은 행위자들이 장의 속성과 규칙을 파악하고, 장 안에서 실은 무수한 투쟁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간파하는 순간부터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는 연구자라면 자기 자신이 속한 지식 장과, 자신의 조건들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로부터 자기 위치를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좋은 연구자의 덕목으로 너무도 쉽게 ‘성실함’이나 ‘생산성’과 같은 것들을 상상한다. 그러나 그런 가치를 위해 연구자의 ‘어떤 위치성’이 무의식적으로 당연시되는지, 지금 이 순간에도 어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논리들이 연구하는 우리를 가로질러 재생산되고 있는지 부단히 질문할 필요가 있다. 곧 이런 질문은 모두가 마음 놓고 공부할 수 있고 공동의 지식을 생산할 방법에 대한 구조적 성찰로도 이어져야 한다. 한 쪽에서는 점차 공고해지는 학술 장의 진입장벽이 있고, 동시에 다른 쪽에는 그 안팎에서 어떻게든 생존과 각개격파로 분투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연구를 지속하는 힘과 ‘실천 감각’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이 지점에서 노동하고 고민하는 우리들의 위치와 관계들을 엮어내고 꾸준히 학술 장에 던지는 작업들이 필요하다.

김지수 연세대 커뮤니케이션대학원 미디어문화연구전공 박사과정
연세대에서 문화연구를 공부하고 있다. 학교 밖 문화연구자들의 네트워킹을 목표로 하는 학술단체 ‘신촌문화정치연구그룹’의 연구원으로 활동 중이다. 역사적 문화연구, 지성사, 도시공간, 학술공동체 등에 관심을 갖고, 최근에는 문화연구 학문의 국내 수용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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