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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상 혹은 조광증의 의학철학 논고
정신이상 혹은 조광증의 의학철학 논고
  • 최승우
  • 승인 2022.04.05 15: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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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립 피넬 지음 | 이충훈 옮김 | 아카넷 | 568쪽

‘광기의 해방과 인간화’를 실현에 옮긴 정신의학의 선구자
필립 피넬의 대작 주저 국내 최초 번역

필립 피넬보다 약 한 세대 후의 프랑스 정신의학자였던 에스키롤은 피넬을 “저 불행한 광인들을 굴욕에 처하게 했고, 신체를 훼손케 했고, 정신을 자극했던 사슬을 깨뜨린” 해방자로 소개했다. 정신의학사에서 광기와 광인의 치료법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온 피넬의 업적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미셸 푸코는 피넬이야말로 “광기를 해방하고 인간적이게 된 상태로 솟아오르게” 했던 공적을 인정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광기의 해방과 인간화’를 실현에 옮긴 정신의학의 선구자로서 필립 피넬이 수행했던 진지한 연구와 의사로서 묵묵히 자기 임무를 다했던 태도가 19세기는 물론 현대의 의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쳤음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특히 1800년 초에 발간한 이 책은 거의 같은 시기에 출간되고 재판을 거듭한 그의 또 다른 주저 「철학적 질병분류학, 혹은 의학에 적용된 분석의 방법」(1798)과 더불어 비세트르 구제원과 살페트리에 구제원에서 근무하면서 구체적이고 직접적으로 얻은 광기의 수많은 발현 양상의 경험들을 종합하고 분석해낸 대작이다. 헤겔은 1830년에 출간한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사전 강요」에서 피넬의 “합리적이면서 호의적인 치료법은 대단한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쓴 바 있으며, 동시대 관념학에 몰두했던 젊은 스탕달이 피넬의 「의학철학 논고」를 탐독했음은 잘 알려져 있다.

스탕달은 초기 미술 평론 작품 「이탈리아 회화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심혈을 기울인 학문에 접근했던 사람은 피넬과 카바니스 두 사람뿐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정신, 다시 말해 현상과 그 현상에서 추론된 결과를 바탕으로 쓴 그들의 저서는 진정한 과학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고 쓸 정도였다.

19세기 벽두에 출간된 피넬의 「의학철학 논고」는 당대 문학가, 철학자, 예술가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음은 물론 인간과 인간의 정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자극했던데 비해, 정작 프랑스는 물론 정신의학계에서도 피넬에 대한 세심하고 심도 깊은 연구는 그다지 많지 않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다. 「의학철학 논고」의 현대 고증 판본은 장 가라베와 도라 바이너가 공동으로 작업하여 2005년에 출판한 것이 유일하다.

이 판본은 피넬이 나중에 대폭 수정한 2판을 대상으로 삼은 것인데, 초판과의 비교 검토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피넬에 관한 묵직한 연구서 「이해하기와 치료하기」의 저자 도라 바이너는 동시대 의학의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묵묵히 환자들을 임상적으로 관찰하고 자료를 축적하면서 결국 “정신이상을 의학의 한 분과로 통합”하는 데 이른 피넬의 공적을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그렇지만 정신의학계에서는 그의 어휘와 치료법을 ‘낡은’ 것으로 취급하고, 역사학에서는 그의 업적을 ‘박애주의’로 규정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음은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의학철학 논고」는 단순히 정신의학의 고전으로 다루기에 앞서,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지성사의 고전으로 읽을 필요가 있다. 피넬이 이 책에 붙인 상당히 긴 분량의 서론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무엇보다 계몽주의 시대와 프랑스 혁명기의 의학자들과 철학자들, 그리고 19세기 초반의 관념학자들에게서 깊은 영향을 받았다. 존 로크와 콩디야크가 다루었던 경험주의와 감각주의, 엘베시우스와 디드로의 유물론적 인간관, 18세기 후반 몽펠리에 의학자들로부터 자비에 비샤에 이르는 생기론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피넬의 저작은 단지 광인들에 대한 박애주의적 태도로 축소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더욱이 피넬이 다루는 광기의 원인으로서의 ‘지성의 상해’ 이론은 앞서 언급한 계몽주의 시대 인식론을 직접적으로 정신의학 분야에 확장한 것으로서의 의미가 깊다.

광인을 수용했던 비세트르 구제원과 살페트리에 구제원의 담당의로 근무하면서 광인들의 광기 발작을 직접 관찰하고 치료했던 필립 피넬이 19세기 벽두에 출간한 「의학철학 논고」는 광인들과 광기에 대한 근대적 접근법의 혁신을 가져왔다. 특히 이 책은 고대 의학 전통을 맹목적으로 따랐던 근대 의학을 개혁했다는 성과는 물론, 경험과 분석을 절충하여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치료 방법을 찾고자 했다는 점에서, 근대 이후 모든 학문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저작으로 평가된다.

아울러 피넬은 무엇보다 계몽주의 시대의 철학적 진보와 실험과학에서 거둔 방대한 성과를 종합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지성사적으로도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하겠다. 존 로크와 콩디야크, 디드로와 루소, 몽펠리에 학파 의사들과 자비에 비샤로 이어지는 18세기 철학사, 과학사, 지성사 전체가 그의 저작 속에 녹아 있으며, 이러한 관계를 깊이 이해하지 않는다면 그가 앞당긴 연구 성과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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