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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쇼비니즘의 장르정치학…독점된 소설을 해방시켜라
영어권 쇼비니즘의 장르정치학…독점된 소설을 해방시켜라
  • 김봉률 부산대
  • 승인 2005.11.2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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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비평: 영문학계의 무의식, 이안 와트(Ian Watt) 해부

▲소설의 발생. ©
소설은 자본주의만의 산물이고 근대영국에서 발생했다는 것은 영문학계의 무의식이고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1958)은 그 무의식의 진원지이다. 이 책에서 와트는 독서대중의 등장과 중산층의 등장, 소설의 발생이라는 삼 겹의 명제 아래, 18세기 중엽 영국의 남성작가인 다니엘 디포우, 사무엘 리차드슨, 헨리 필딩 들이 소설을 발생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소설을 로망스와 엄격히 구분하여 형식적 리얼리즘으로 규정짓고 영국만의 형식으로 전유한다. 

‘소설의 발생’을 논한다는 것은 소설이 원래부터 존재하던 것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적 시점에서 특수한 조건에 의해 발생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신의 형식으로서 소설 장르가 미리 앞서서 주어져 있던 것을 갱신시킨 것이 아니라 처음으로 창출 발생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와트의 ‘소설의 발생’이 지닌 함의에 영국소설의 발생을 추적하는 문제와 소설 자체의 발생 문제를 추적하는 문제가 섞여있어 ‘소설의 발생’에 대한 비판을 통하여 소설 발생의 기원 문제를 정확하게 잡아내기는 어렵다. 와트의 소설 발생론에 대한 비판이 마치 발생의 내재적 조건을 무시하고 영국소설이 외부의 영향관계에 의해서만 발생되었다는 것으로 비출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윌리엄 워너(William Warner)는 “이안 와트의 ‘소설의 발생’과 더불어 수식어 ‘영국’은 암시만 될 뿐 사라진다. 이제 ‘영국 소설’의 발생이란 ‘전체’(the) 소설, 즉 모든 소설의 발생을 나타내는 말이 된다. 부분이 전체가 된 꼴이다”라고 한다. 기원과 발생의 문제를 추적하는 것을 마르크 블로흐(Marc Bloch)는 “역사의 옳고 그름을 파악하려는 또 하나의 악령”으로 보고 있듯이 유럽 다른 나라에 비해 소설의 내재적 발생과 발전이 늦었다는 조건 속에서 오히려 영국소설의 발생을 보편 장르로서의 소설 발생의 문제로 대치시킨 것은 발생의 신화가 갖는 이데올로기적 혐의를 가지게 한다. 

‘소설의 발생’이 영미문학계의 정전으로 되어 소설이 근대 영국에서 발생된 것처럼 전도된 것은 영어권 쇼비니즘이라는 장르정치학이 개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자본주의에서 근대 소설의 기원이 비롯된다고 보면 자본주의의 발달 정도(주로 절대주의 시대)와 언문일치, 내면과 사적인 것의 등장이라는 문제가 근대 소설 발생 담론의 주요한 것이 된다. 하지만 영국 민족주의 문학사가들은 어느 지역이든 근대성과 근대 문학의 등장 배경이 되는 이런 요인을 제쳐두고 청교도와 상인의 등장(중산층의 등장과 프로테스탄티즘의 여부)을 주요 기준으로 삼는다. 따라서 17세기에 선진국으로 영국보다 자본주의가 발달했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에서의 소설발생은 제외되고[‘돈키호테’(1605)나 ‘클레브 공주’(Madame de Cleves)(1678)] 역시 17세기 말 영국의 아프라 벤(Aphra Behn), 일라이자 헤이우드(Illiza Heywood), 들라비에르 맨리(Delaviere Manley) 등 여성 3인조의 작품들도 소설에서 배제되고 로망스로 폄하된다.

소설 발생의 영국적 전유와 전도는 미국적 장르 정치학이 개입한 것이다.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주장을 제도화시킨 것은 1958년 미국의 제도권 아카데미즘에서이다. 기원을 추적하는 문제는 항상 그 추적하는 시점과 관련되어있다. 대학교육을 비롯한 미국 제도권 아카데미즘의 의도는 비미국적인 영문학의 정전 수립을 통해 미국비평이 영국문학을 전유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영문학을 영국 문학이 아니라 영어로 된 문학으로 범위를 확대한다면 그것은 미국 문학의 우산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미국의 소설 기원은 로망스인데 미국 비평계가 18세기 중엽 영국의 리얼리즘 소설을 소설의 발생작으로 보는 것은 미국적 콤플렉스의 정치학과 관련이 있다. “미국에서 소설의 운명을 관계 짓는 것이 로망스라는 것은 (영국에서) 그 파생관계가 완고하게 거부된 옛 가족이라는 점에서 훨씬 아이러니”라는 호머 브라운의 언급은 미국의 로망스라는 젊은 장르는 영국문학에서 낡고 허황된 것으로 거부되어 저차원의 장르로 인식되어 소설과는 완전히 다른 것으로 취급받았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이고, “소설의 나중 경험이 소설의 오래되고 보다 원초적이며 보다 귀족적인 선배를 산출해낸다는 기이한 현상을 문학사가 만들어낼 수밖에 없게 된다”(1996, 31)는 점에서 또 하나의 아이러니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두 겹의 아이러니를 통해 학제간의 정치학과 장르 정치학이 미국이 영국적 기원에 빚지고 있다는 콤플렉스를 어떻게 떨쳐버리고자 한 것인지 가늠하게 한다.

두 번째로 와트의 주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소설이 자본주의의 발생과 더불어 출현된 형식이라는 것이다(와트 1984, 12). 자본주의를 가장 성공적으로 발전시켜가던 영국의 비평계는 중세와의 단절과 차이를 강조함으로써 장르에서도 이런 자의식적 단절과 차이를 강조한다. 프랑스에서는 le roman, 이탈리아에서는 il romanzo, 독일에서는 der Roman인데 소설과 로망스를 구별하지 않고 모두 소설(romance)로 통일하지만 유독 영국은 소설과 로망스를 구분한다. 현재 소설은 중세 로망스를 제외하고는 리얼리즘 소설뿐만 아니라 근현대의 로망스까지도 모두 포함한 것으로 사용됨으로써 실제로는 그러한 개념 규정이 거의 모든 곳에서 수정되고 있다. 하지만 영국에서 유독 소설 발생을 문제삼을 때에만 형식적 리얼리즘으로 소설을 제한함으로써 기원의 신화가 조작된다.

19세기에는 로망스와 다른, 자본주의적 특성을 지닌 형식임을 자의식적으로 강조하기 위해서 소설이라고 하였다면 와트는 막스 베버적 방법론에 기대어 두 개의 새로운(new, novel) 사회적 힘, 즉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힘에 의해 18세기 중엽에 로망스와는 다른 새로운 문학형식이 발생하였다고 소설(novel)이 지닌 원래의 뜻을 재해석하였다. 그래서 이들에게 소설이란 순수하게 근대 영국 자본주의의 산물이란 뜻을 지닌다. 마가렛 앤 두디는 “근대의 형식으로 의기양양하게 승리한 소설을 만들어내는 데 많은 투자가 이루어졌던 것 같다. 영어권의 학생들은 1958년에 그 이름으로 발간된 와트가 제공한 ‘소설의 발생’에 대한 그림을 믿도록 교육받아왔다”고 한다. 영어권 비평가들은 소설이란 시간적, 공간적으로 철저하게 단절된 영국만의 공간, 18세기 중엽만의 시간에서 배태되었다고 주장함으로써 보편적 장르인 소설을 가장 영국적인 것으로 포장해버린다. 그래서 소설은 보편적 장르가 아니라, 18세기의 사실적 산문 담론양식에서 유래한, 영국 자본주의에 특수한 장르가 되었다. 이 논리에는 가장 영국적인 것을 가장 세계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던 제국주의와 팽창주의의 역사적 논리가 스며들어 있다.

그런데 다른 유럽의 비평가들 역시 이 혐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영국에서 주장된 근대소설발생론이 유럽과 미국으로 전파되어 다른 나라의 비평가들 역시 그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이것은 역사 이래 자본주의가 다른 시대와 뚜렷이 구별되고 단절되며, 또한 가장 발전적이고 진보적이라는 견해에서 도출된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발전된 단계이며, 그 자본주의를 추진해온 동력이 부르주아의 혁명성이라는 견해로부터 문학장르 역시 과거와는 뚜렷이 구별되지 않을 수 없게 되는데, 그것이 역사적 필연성으로서의 산문형식인 소설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역사는 자본주의 발달을 위한 전단계이거나 미개시대로 격하되어 독자적인 역사적 공간과 시간을 배정받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늦게 발달한 비서구 지역은 소설이라는 문학적, 지적 형식을 결여하게 되고, 서구 자본주의로부터의 영향에 의해서만 소설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게 된다.

▲이언 와트가 표지를 장식한 그의 문학관련 에세이 모음집. ©
세 번째의 장르 정치학은 중산층의 등장과 그로 인한 독서대중의 등장에 따라 소설이 발생되었다는 3중적 명제에서 드러난다. 19세기 서구 소설은 20세기 들어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으로 양분되는 경향을 보여왔지만 미국과 영국의 제도권 아카데미즘은 시를 현대의 병든 문명을 치유할 수 있는 구원의 장르로 여겨 시창작과 시 연구에 몰두했다. 이런 상황에서 와트의 ‘소설의 발생’은 서구 중심의 소설발생 주체와 미학을 수립하면서 새로이 소설의 시대를 열고자 하였다. 특히 소설발생의 주체 문제에서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프롤레타리아 주체와 대비되는 중산층 주체의 문제는 ‘소설의 발생’을 하나의 책이라는 물질성을 떠나 독단적 교리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였던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주체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때문에 빼앗긴 소설의 종주권을 영미 자본주의가 되찾는 것처럼 보여졌고, 다른 한편으로는 중산층의 자유주의적 지도력을 강화하여 냉전 후 미국 사회의 통합을 강화하려는 시도의 한 방편으로 보여졌기 때문이다.

와트의 ‘부상하는 중산층’(the rising middle-class)은 18세기에 이미 지배계급이 된 중상층(high-middle-class)으로서 그들이 소설발생의 주체가 될 수 없다. 18세기의 소설의 번성은 민중적 장르로서 중하층(low-middle-class) 부르주아와 여성들의 등장과 관련이 있으며, 발생이라기보다 17세기 이후 발달한 상공업을 배경으로 고대소설에 이어 리얼리즘적 양식이 다시 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와트가 18세기 중엽 남성 3인조의 소설을 소설의 발생적 사건으로 본 것은 여성과 중하층의 소설을 남성과 중상층이 담론 생산을 통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전유하려는 시도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네 번째의 장르 정치학은 남성중심적 가정으로 젠더의 문제이다. 와트는 근대 초기인 17세기의 소설가들을 배제하는데 그 이유는 그 당시의 소설들이 정치적이고 선정적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이 시대의 소설계를 주로 여성들이 지배하였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성작가들을 완전히 배제하고 소설 발생을 주도한 사람들을 남성작가들로 설정한 것 역시 여성주의 비평계에서 뿐 아니라 이제 대부분 남성 비평가들로부터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근대 소설의 발생 담론은 자본주의 체제와 언문일치, 내면과 사적인 것의 등장과 맥락을 같이 한다. 이런 근대 소설 발생설은 자본주의의 근대 소설 형성 문제에 대해 시기에서 편차는 존재하지만 동아시아든 유럽이든 지역적으로는 거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소설의 발생’은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두 축을 소설 발생의 핵심 요건으로 삼아 스페인이나 프랑스에 비해 늦게 나타난 영국 소설을 서구 근대 소설의 기원으로 두고 영국적으로 전유한다. 소설 발생에 개입하는 이런 장르 정치학은 늦게 나온 것이 지닌 완성도가 일찍 나온 것보다 좀 낫다는 단순한 차이에 기인한다. 시간적으로 영국 소설은 당시 자본주의 선진국이던 스페인이나 프랑스의 소설보다 늦게 나왔고, 미국 소설은 영국 소설보다 늦게 나왔고 근대 영국에서 남성작가들은 여성작가들보다 늦게 등장했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이런 전도성은 가장 잘 확인된다.

필자는 부산대에서 ‘이안 와트의 소설의 근대영국 발생론에 대한 비판’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장르비평으로 본 고대 그리스 서사시의 남성중심성’ 등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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