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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을 주목한다]『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김종수 지음, 민속원 刊)
[이책을 주목한다]『조선시대 궁중연향과 여악연구』(김종수 지음, 민속원 刊)
  • 김재환 기자
  • 승인 2001.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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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8 10:29:51

유교적 이념을 배경으로 성립한 조선왕조는 ‘감시와 처벌’로서가 아니라, ‘禮와 樂’으로서 백성을 다스렸다. 교화정치로서 성리학적 ‘大同사회’를 지향한 것이 바로 조선왕조였던 것이다. 이 책은 왕조실록과 각종 고문헌의 기록을 토대로 궁중잔치(宴饗)와 잔치에서 공연을 벌였던 女樂의 변천과정을 추적한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이다.


저자는 성리학 이념의 변화와 연향의 변화, 그에 따른 여악의 변모과정을 치밀하게 고증해내고 있다. 저자가 궁중잔치에 주목하는 까닭은 그것이 “궁정과 관료들의 향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배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국가적 장치이기 때문이다. 푸코가 ‘감시와 처벌’ 서두에 묘사하고 있는 다미엥의 재판이 권력에 대한 복종을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권력의 스펙터클’이라면, 조선조의 궁중연향은 권력에 대한 내면적 동의를 창출하는 일종의 ‘동의의 스펙터클’인 셈이다.


연향이 국가적 제도로서 정착된 것은 세종조부터. 예조, 의례상정소, 집현전을 중심으로 의례가 정비되고, 의례에 대한 규범으로 회례연의 등의 성문화된 의례서가 편찬되었다. 연향에는 임금과 신하가 화합하기 위해 매년 초에 열린 君臣通宴인 회례연, 노인을 우대하여 국왕이 베푸는 양로연, 사신에게 베푸는 사신연 등이 있었다. 단오나 추석 등 명절이나 왕가의 생신 등에도 설행되었고, 흉년이 들거나 星變,때에는 중지하기도 했다.


연향이 이처럼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유를 저자는 ‘유교적 災異觀’으로 풀이한다. “덕치를 하여 천명에 순응하면, 하늘이 상서로움을 내리고, 부덕한 정치를 하여 천명을 거스르면 재앙”내린다고 보는 이러한 태도는 자연현상과 人事를 하나로 파악한다. 조선후기에 와서 연향은 잔치가 끝난후에 전국의 노인과 과부들에게 쌀과 고기를 내리거나 田稅의 축소, 환곡을 탕감하는 조치 등으로 이어지면서 ‘與民同樂’의 대동축제로서 자리잡았다는 것이 저자의 해석.


잔치에는 음악과 춤이 빠질 수 없다. 이 책의 두 번째 테마는 궁중연향에서 공연을 했던 女樂에 관한 것. 여악은 궁중연향에 樂歌舞를 공연했던 여자 樂人을 가리킨다. 女妓, 娼妓, 官妓 등도 모두 이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일종의 국가연예인이다.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된 여악을 京妓, 지방의 관에 소속되어 변방군사를 위로하거나 사신을 접대했던 여기는 외방여기로 불린다.


여악은 폐단도 적지 않았다. 건국초인 정종 때의 여악인 초궁장이 정종과 그의 동생 태종의 아들들과 두루 정을 통해 징계를 받는 등 “강상을 무너뜨리고 풍화를 어지럽히는 것이 여악보다 더 심한 것이 없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강력한 성리학적 개혁을 추구했던 조광조는 “오늘날 기녀는 국가에서 음란한 무리를 위하여 둔 것이니, 이를 두고서야 어찌 인심을 바로잡을 수가 있습니까”라고 ‘여악혁파론’을 주장했지만, 기묘사화로 그의 뜻은 좌절되었다.

女妓와 관원의 간통은 원칙적으로 금지


조선조 내내 여악을 둘러싼 시비가 이어졌지만, 후기에 와서는 여자들이 주축이 된 內宴에는 여악이, 남자들이 주축이 된 外宴에는 남악이 공연하는 내연여악, 외연남악제도가 정착되었다. 저자는 이러한 제도의 변화 역시 남녀유별과 같은 성리학적 이념의 공고화 과정으로 해석한다. 드라마 ‘허준’으로 일반에 널리 알려진 ‘의녀’의 기능에 대한 저자의 해석도 흥미롭다. 의녀는 의술에 종사했지만, 조선후기에 와서 여악의 역할을 대신하기도 했다. 하지만, 의녀를 여악의 시발점으로 보거나 여악을 관원과 간통을 일삼는 房妓로 해석하는 시각에 대해서는 비판적이다. 의녀나 침선비가 연향에 참여하게 된 것은 여기를 줄여 국가재정을 줄이기 위함이고, 방기제도는 청나라의 침입시 10여년 동안만 존속했던 한시적 제도였으며, 원칙적으로 女妓와 관원의 간통은 금지되어 있었다.


이 책의 미덕은 자료에 대한 면밀한 천착을 통해 제도의 변화와 현실적 추이를 섬세하게 추적한 데 있다. 그러나, 왕조실록의 문면을 충실히 따라가는 저자의 ‘해석학’은 지배질서의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조선후기에 연향이 온 백성과 기쁨을 같이 나누는 대동축제의 기능”을 했다는 결론은 실상에 부합한다기보다 오히려 통치자의 바램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재환 기자 weiblich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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