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6 04:25 (금)
최후의 인간
최후의 인간
  • 최승우
  • 승인 2022.03.23 10: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모리스 블랑쇼 지음 | 서지형 옮김 | 그린비 | 144쪽

푸코, 데리다 등 당대 사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 철학자이자, 침묵과 은둔의 작가 모리스 블랑쇼가 소설 형식으로 쓴 최후의 작품 『최후의 인간』. 이 책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죽음의 선고』와 같은 방식을 사용하며 서사와 독백으로 1부와 2부를 채우고 있다.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자, ‘그’를 만난 이야기를 통해 블랑쇼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가 낮고 낮은 곳으로 내려가 타자의 역겨운 것에 도달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행위란 타자의 이른바 ‘사회적 가면’을 벗기는 것이다. 그 가면 이면에는 한 인간의 분열된 모습, 두려움과 불안, 착란이 쏟아져 내리는 비천의 얼굴이 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블랑쇼는 타인의 비천함으로 내려가는 것만이 ‘우리’가 되는 길을 열 수 있다고 역설한다.

‘우리’를 비추는 비천의 거울

이 이야기는 온통 ‘그’에 대한 1인칭 화자의 사유로 가득 차 있다. 1부는 폐쇄적인 분위기의 요양원에서 지내는 ‘나’, 요양원 직원 ‘그녀’ 그리고 죽어 가는 환자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전개된다. 2부에서는 1부에서부터 서사의 전개를 빈번히 가로막았던 독백이 전면화되는데, 이 철학적 사유의 독백은 모두 낯선 타자의 존재, 그들과의 ‘공동의 관계’를 숙고하는 데 할애된다.

이 이야기에서 먼저 발견되는 것은 ‘나’가 ‘그’에 대해 느끼는 이질감·질투·역겨움·불쾌의 감정이다. ‘교수’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인 데다, ‘나’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그녀’의 신경이 온통 죽어 가는 그에게 집중됨에 따라 ‘나’의 심경은 더욱 복잡해진다.

급기야 ‘나’는 자신이 좋아하는 ‘그녀’ 때문에 ‘그’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의 ‘죽어 감’을 사유하기에 이른다. 이때 화자가 주목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어 감’, 즉 죽음이 한순간에 찾아오기 전까지 머무는 삶도 죽음도 아닌 과정이다. 어떻게 ‘그’는 소멸 과정 속에서 오히려 자신의 현시를 타인에게 강력히 실현하는 것일까?

‘그’는 병이 깊어지면서 화자에게 점점 더 견디기 어려운 역겨움을 발산한다. 그러나 ‘나’는 그를 직접적으로 대면했을 때보다 죽어 가는 육체가 남겨 놓은 흔적, 비천의 낯을 통해 그의 존재를 더욱 생생하게 느낀다. ‘그’가 힘겹게 음식을 삼키는 모습, 늑대처럼 기침하는 소리, 소리 없이 걷는 발자국 등 이 모든 것이 ‘그’의 존재를 실감케 한다.

어느새 ‘나’는 그 이유가 그의 죽어 감의 과정이 곧 자신의 과정이 될 수 있으며, 그 누구라도 대면해야 할 공동의 사건이기 때문임을 깨닫는다. ‘나’는 ‘그의 고통’ 속에 ‘함께’ 놓인다. 이렇게 ‘나’, ‘그녀’, ‘그’는 구분되지 않는 한 덩어리처럼 공동의 존재로 각인된다.

전부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자, ‘그’의 목소리

‘최후의 인간’이라 불리는 ‘그’는 블랑쇼가 중성의 글쓰기를 위해 설정한 ‘그’(il)의 개념을 형상화해 주는 인물이자, 작품 자체의 속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최후의 인간』에는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 사람에 대한 숙고가 담겨 있다. 여기에는 작품은 누군가의 이야기이면서도 그 누구의 이야기도 될 수 없는, 실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말뿐이라는 작가의 지론이 반영되어 있다.

블랑쇼는 작품 속에서 특정한 자의 모든 특권적인 발언의 무게를 해제하는 ‘중성’(neutre)의 글쓰기에 알맞은 인물을 모색했다. 그렇다면, 발화 주체의 특권을 내려놓음으로써 문학은 과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떤 사건, 인물의 특수성을 배제하면서 작가는 문학의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사건은 일어난 것일 뿐 아니라 다른 형태로 일어날 수도 있었던 것이 되고, 우리는 스스로에게 낯선 자가 될 수 있다. 블랑쇼는 우리 자신에게조차 주권을 실행할 수 없는 무력 상태가 오히려 폐쇄된 ‘나’에서 타자로의 열림을 실현하는 문학적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일례로 『최후의 인간』에 나타나는 공간과 소음은 독자로 하여금 ‘어느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에 내맡겨지게 하는 효과로 나타난다. 요양원의 방은 익명의 개별자들이 머무르는 공간으로, 단절을 표상한다. 개별자들은 공간과 일체가 된다. 죽어 간다는 것은 그 방에 가구처럼 놓이는 부동의 상태다. 이때 소음의 이미지가 각자의 공간과 경계를 넘어서게 한다. 익명의 사람들의 소음은 흐르는 것으로 액화되어 이리저리 부유하며 포착되지 않는다.

공동의 소음에 놓인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에 속하게 된다. ‘나’에게서 발화된 말은 ‘우리’를 갈라놓고 고정시키며 ‘나’라는 기호는 타자 앞에 헐벗은 것처럼 대상화되는 위협을 겪지만, 주권을 잃어버린 웅성거림 속에서는 그런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다. 고정된 장소 없이 흘러가는 소음 속에 스며든 자아는 타자에게로 개방되는 관계 장의 증폭을 경험한다. 소음, 비명, 한숨 소리 등의 이미지는 바깥으로 향하는 열린 공간의 반향이다.

이 반향들은 단일한 자아의 경계를 넘어, 고립 속에서도 타자의 일부를 나누어 가지고, 타자에 영향받으며, 관계성 속에 참여하도록 한다. 여기에는, 주체 중심의 절대 자아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저 공동의 울림 속에 함께 존재할 뿐이다. 『최후의 인간』이 모색하는 ‘우리’의 가능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