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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점: 번역은 어떻게 원전중심주의를 강화하나
초점: 번역은 어떻게 원전중심주의를 강화하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1.1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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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소장파가 제기한 ‘번역문제’

▲오늘날 번역하는 일이 과연 원전의 영혼을 훔쳐오는 일인지, 아니면 거울 앞에 선 피에로처럼 원전을 이미테이션 하는 것에 불과한지, 번역정신에 대한 되물음이 필요하다. ©
한국학술단체협의회가 11월 19일 개최하는 학술대회에서 인문사회계 대학원의 지적 풍토가 풍자적으로 그려졌다. 오창은 중앙대 강사(국문학)는 자기 주변의 석박사생 16명 +알파를 취재해서 현 대학원이 처한 학문적 위기를 검토하고 있다.

그가 볼 때 대학원은 여전히 “세계 학문소비의 하위체계에 흡수되는 연습”을 열심히 할 뿐, 한국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학문적으로 풀어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마존에서 원서를 구입한 걸 자랑으로 여기고, 유행 따라 인용하는 학자의 이름을 바꾸는” 풍경도 여전하다고 지적한다.

이 정도 지적은 이제 스산하게 다가올 뿐이다. 그러나 오 씨는 나아가서 ‘번역’의 중요성을 환기시킨다. 가야트리 스피박이 ‘그라마톨로지’를 번역·해제·주석하여 박사학위를 땄듯이, 번역을 학문적으로 대접해 원전중심주의를 탈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해 이진경-김재인 간의 들뢰즈 번역논쟁, 데리다의 ‘불량배들’, 메를로-퐁티의 ‘지각의 현상학’의 오역시비 등을 떠올려볼 때 오 씨의 지적은 뭔가 새로운 인식을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 그것은 그가 번역이라는 ‘행위’와 원전이라는 ‘사물’을 범주 구분하지 않고 등위의 가치로 논의를 전개하는 데서 발생하는 효과라 할 수 있다.

지금껏 번역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는 원전에 대한 강조와 함께 했다. 원전이 중요하기 때문에 번역을 하는 것이고, 원전에 충실한 번역이 좋은 번역이었다. 한국의 문화풍토에서 번역은 원전의 영혼을 옮겨오는 행위로, 성화를 꺼뜨리지 않고 봉송해야 한다는 ‘엄숙주의’를 낳았다.

따라서 항간에서 비판되어온 ‘원전중심주의’는 번역이라는 삽질을 통해서 땅에 묻혀지기보다, 또 다른 중심주의로 거듭났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 씨가 지적하듯 “자국어로 된 학문체계의 형성”이 계속 불발에 그치는 것도 바로 번역과 원전의 이 ‘오묘한’ 결합에 있는 것이 아닐까 여겨진다.

현재 학계에 널리 퍼진 기이한 현상 중의 하나는, 번역을 하면 할수록 원전으로부터 뻗어나온 그물에 더 깊이 얽매이게 된다는 것이다. 원전을 독점한 자가 줄어들어야 하는데, 번역자가 그 원전에 대한 권위자로 재탄생하게 되니 번역이 자생적 학문에 기여하는 바가 매우 적지 않냐는 의문도 꼬리를 문다.

대상 텍스트가 어려울수록 학계에서는 ‘근본주의’가 늘어간다. 그것은 매우 배타적 원리주의이기 일쑤이며 결국 번역 권위주의를 형성해왔다. 들뢰즈 전문가로 자처하는 김재인 씨의 경우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런 혐의를 두고 논의해볼 필요가 있다.

그간의 번역논쟁에서 번역 권위주의는 대개 ‘개념주의’와 ‘국지주의’로 표현돼 왔다. 이렇게 중요한 개념을 엉뚱하게 옮겼다는 지적이 바로 ‘개념주의’이며, 어느 한 곳의 ‘실수’를 전체의 過失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바로 ‘국지주의’인데 대개의 번역논쟁이 개념주의와 국지주의를 적절히 활용해 원전중심주의로 회귀하는 양상을 띠었던 것이다.

직역과 의역 논란도 그렇다. 사실 ‘잘 된 번역’에서 의역과 직역이 논란이 될 이유는 없다. 그것은 대개 직역을 충족한 의역이거나, 의역이라는 스카프를 걸친 직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번역 논쟁에서 ‘직역’과 ‘의역’의 대립은 의외로 치열하다. 직역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반대쪽에게 외국어 실력과 학문적 이해가 부족하다는 인식을 은연중 갖고 있고, 의역을 선호하는 이들은 반대쪽에게 한글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불구자라는 막말을 던지기도 한다.

오늘날 ‘번역의 중요성’은 ‘번역의 총체성’에 대한 찬미로 성급히 나아가기 보다, ‘원전의 숭고미’를 적절히 생활영역으로 끌어내리는 인식론적 합의 속에 놓여있지 않을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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