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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 식물병이 주는 교훈
학이사: 식물병이 주는 교훈
  • 차병진 충북대
  • 승인 2005.11.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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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진/충북대·수목병리학

  나도 내가 공대를 갈 줄 알았다. 어려서부터 시간만 나면 내 손에 들려있던 것은 톱이나 납땜인두 같은 것들이었다. 주변의 모든 어른들이 날보고 ‘넌 천상 공대 가야겠구나’하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내가 당연히 공대에 갈 줄 알았다. 그런데 청소년의 반항심리였을까?

고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며 지내다보니 어느덧 고2 겨울방학을 맞았고 그 때 난 이미 공학이란 우리 사회를 무미건조하고 각박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자연이 무척 그리웠고 자연을 공부할 기회를 얻기 위하여 고3을 열심히 보냈다.

대입원서를 쓸 무렵엔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이란 존재가 내 마음을 사로잡아 식물병리학을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식물병리학에 대하여 거의 무지한 상태였었는데 어째서 그런 생각을 했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이후 내 선택을 후회한 적이 거의 없다. 참으로 지독한 행운아다.

  사실 식물병리학을 공부하면서 식물병에 대한 내 관점이 많이 바뀌었다. 사람이란 나이와 경험에 따라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르다는 것을 실감하였다. 선배들 쫓아다니고 전공과는 관계없는 동아리활동, 취미활동에 빠져서 뭐가 뭔지 모르고 지내던 대학시절이 끝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식물병리학 공부를 시작할 초창기에는 병들어 고생하는 식물이 가슴 아팠고, 다른 생물에게 모든 것을 희생하는 나무를 병들게 하는 병원균들이 미웠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생태계에 대하여 좀 더 폭넓은 지식을 얻게 된 지금, 나는 식물병원균들을 더 이상 우리와 식물의 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 또한 우리와 더불어 이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는 우리의 친구일 뿐이다. 우리는 다만 필요에 의하여 그들을 물리치려고 애쓸 뿐이다.

  찬찬히 살펴보면 이 생태계처럼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도 없고, 권위적인 사회도 없으며, 평등한 사회도 없다. 생태계는 약자를 보호하지 않는다. 생태계는 튀는 놈을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몫을 넘어 과도한 욕심을 부리는 집단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다.

튀는 놈은 찍어 누르며, 약자와 욕심쟁이는 도태시킨다. 그리하여 생태계는 언제나 건강하고 언제나 평등한 사회로 유지된다. 동물생태계에서 먹이사슬이 질서를 유지하는 힘이지만, 식물생태계에선 바로 식물병원체들이 이러한 조절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요즘 식물병을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실제로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으며 건강함을 유지하는 식물집단에선 병이 그리 큰 문제가 아니다. 반면, 다른 식물들을 위협하며 자신들의 세를 불려가는 식물집단에선 반드시 무서운 병이 나타나 이들의 밀도를 조절한다.

역사상 큰 문제가 되었던 밤나무 줄기마름병, 잣나무 털녹병, 감자 역병들이 그러하였으며, 최근 문제가 되는 소나무재선충에 의한 소나무 시들음병도 마찬가지다. 세력이 커지면 없던 병도 생긴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병이.

  온 지구를 두려움으로 몰아넣고 있는 조류인플루엔자나 사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얻어야 한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길이다. 이 생태계는 모두가 공유하며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살아가야 하는 공간이다. 사람들이 너무 지나친 욕심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식물병리학은 오늘도 내게 그런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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