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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토지개혁론 연구 과장·왜곡"…實學을 審問하라
"조선후기 토지개혁론 연구 과장·왜곡"…實學을 審問하라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1.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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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계간지에 실학연구 메타비평 실려

계간 '내일을 여는 역사' 가을호와 반년간 '오늘의 동양사상' 가을·겨울호에 '실학연구'를 반성하고 비판하는 글이 실려 눈길을 끈다. '내일을 여는 역사'에서는 신항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가 '비판적 시각에서 살펴본 실학 연구'라 해서 칼날을 세웠고, '오늘의 동양사상'에서는 해외 한국학자인 김영민 브린모어대 교수가 '근대성과 한국학: 한국 사상사를 중심으로'라는 글을 발표했다.

먼저 김영민 교수는 근자에 들어 한국 사상사 연구에 대한 메타비평에 주력하는 인상을 주는 학자로, 올 초에는 한국 학자들이 리와 기 같은 설명이 필요한 개념어들을 설명어로 채택하는 오류를 보여왔다고 지적해 큰 공감을 불러왔는데, 이번에는 실학이 성립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한 비판적 탐색에, 그것도 매우 이론적인 치밀성을 가지고 전개해나가고 있어 주목을 끈다.

김 교수는 근대성이라는 연구범주가 개념적으로 명료하지 못하다는 점에 문제의식을 둔다. 그래서 먼저 근대성의 개념과 그 사용에 있어서의 유형들을 크게 몇가지로 나눠서 정리한 후 본론에 들어간다. 그가 보는 근대성의 개념은 "일정한 사회적 조건과 관련된 어떤 사유체계와 감수성"이다.

그 사회적 조건이란 산업화와 도시화, 그에 따른 인구증가와 계층이동 같은 현상, 교육의 보급을 통한 대중의 문자해독력의 확대 등이 모두 포함된다. 바로 여기서 나온 사유체계와 감수성이 근대성이라는 것이다. 그 사유체계는 과학적 사고방식, 진보에 대한 믿음, 인간중심주의, 세속적 세계관 등의 인식태도와 결합해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알다시피 근대성이란 개념은 여러 사람들이 오랜기간 써오면서 내포하는 의미가 많아졌고, 그 의미들 사이에 관계가 생기면서 핸들링하기가 매우 복잡해진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근대성을 특정 지향으로 초점화하여 사용하는 경향이 생겨났는데, 근대성을 "역사 단계의 발현으로 보는 관점"에서 벗어나 찰스 테일러가 제시한 바 있듯, "문화론적으로 접근하는 관점"이다. 즉, 과거에서 미래로 일직선을 긋지 않고, 두 문화간의 길항과 침윤이라는 일종의 '적응과정'으로 이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이럴 때 근대는 획일적 서구모델을 지양할 수 있게 되고, 그 대신 근대는 복수적인 것이 된다(multiple modernities).

나아가 김 교수는 문화론적 관점보다 조금 더 융통성이 있는 대안적 근대성 이론으로 디들러스 등이 주장한 '조기근대론'도 소개한다. 이것은 서구의 16~18시기 같은 때가 다른 문명권에도 존재했다는 가설을 부정하고, 해당 문명을 연구할 때는 그 문명 나름의 자생적 문화논리가 있다는 전제 아래 근대성의 모든 규범적 잣대를 거부한다. 예컨대 모든 문명에서 공공영역 같은 것이 출현은 하되, 그것이 굳이 시민사회의 유형과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관점이다.

▲김영민 브린모어대 교수 © 오늘의 동양사상
그렇다면 김 교수는 왜 이런 근대성에 대한 복잡한 이론을 소개하는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근대라는 스펙트럼을 우리가 버릴 수 없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일종의 불가피성에서 나온 설명방법인 것인데, 근대성을 너무 단순하게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으로 몰아부치지 말고 복수 근대를 인정하자는 해외의 흐름을 반영한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학계를 지배해온 근대성 관점이 "중립적인 어떤 보편역적 발전의 표징"으로 근대성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말한다. 바로 내재적 발전론이다. 그리고 이 맥락에서 중시되어온 것이 실학이다. 그렇지만 "실학개념의 불명료성은 끊임없이 논란이 되어왔다"라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문맥을 끊으면서 실학연구에는 몇가지의 래디컬한 질문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 조선후기에 과연 새로운 사상이 존재했는가. △ 그 새로움은 단지 사상의 방면에서만 새로움이었는가. △ 새로운 흐름이 존재했다면 그 이름으로 실학이 적당한가. △ 그 흐름과 이전에 존재했던 유사한 사례는 어떻게 같고 다른가. △ 실학으로 통칭되는 사상들 사이의 공통점은 뭔가. △ 공분모가 있다면 의식적인가, 무의식적인가. △ 전술한 근대성 이론 가운데 무엇을 적용해서 볼 것인가 등이 그것이다.

결론 부분에서 토마스 메쯔거의 중국연구를 인용하며 김 교수는 의미심장한 말을 던진다. "일부 새로운 사상흐름에도 불구하고, 지식대중의 절대다수가 성리학의 사유 아래에 있었다면 근대성에 대한 논의는 실학보다는 성리학에 집중되어야 할런지도 모른다"라고 말이다. 김 교수는 현재 수준에서 학계에서 합의할 수 있는 것은 조선후기에 일정한 탈성리학적 흐름이 존재했다는 것인데, 그럴 경우 실학을 근대성이란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성리학을 근대성 담론에서 어떻게 위치지우냐는 질문으로 귀결된다는 입장도 보여준다.

이런 김 교수의 메타이론적 진단은 '내일을 여는 역사'에 실린 신항수 교수의 논지와 회통한다. 김 교수의 글이 이론적이라면, 신 교수의 경우는 "아무리 실학이 좋아도 역사실증적이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신 교수는 글의 초입에서 "교과서를 보면 조선후기 사상을 설명하면서 성리학은 1쪽 내외에 그치는 반면, 실학 관련 서술은 6~9쪽에 이른다"라는 현실을 지적한다. 최근 들어 실학을 성리학과 대비시켜서 연구한 논문이 눈에 띄게 줄고, 그 대신 근기학풍, 남인학풍, 북학, 國家再造論 등 실학을 명시적으로 거명하지 않는 학계의 흐름과는 달리 교과서는 여전히 내발론이 지배이데올로기이던 시절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1975년 아세아문화연구소에서 발간한 실학사상의 탐구의 부록으로 나온 '실학관계연구논저목록'. 이 때 이미 목록이 만들어질 정도로 활발히 연구된 실학에 관한 연구는 최근 드물게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지난 2005년 5월 경기문화재단에서 상하권으로 발간한 '실학연구 논저목록'에는 관계논문 목록이 무려 1천페이지에 이르고 있다. ©
학자들이 실학을 기피하는 이유는 깊이 들어가 연구해보니 뭔가 맞지 않은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오선 그 개념이 모호하거나 부정확하다. 성리학이건 실학이건 당시 선비들은 자신이 실한 학문을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둘째, 성리학이 공리공담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실학의 시대적 성격 역시 모호하다. '근대-봉건', '탈근대-근대' 등의 잣대를 댈 때 실학이라 부르는 학자들이 결코 그 한쪽에만 헤쳐모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신 교수는 구체적인 사례를 지적하기도 한다. 먼저 정전이나 한전 등의 논의가 실학자들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것. 이런 정도의 토지개혁론은 멀게는 '맹자'와 '주례'로까지, 가깝게는 유학사에 이름을 올린 많은 학자들이 경전에 근거해 주장했다. 따라서 당시 토지개혁론은 "경전과 역사를 공부한 지식인이라면 누구나 이해하는 일반교양이었다"라고 신 교수는 강조한다.

다음은 조선후기에 광작이 이뤄지면서 경작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이 많았고, 이를 구제하기 위해 정전제적 토지개혁론이 제기되었다는 실학연구자들의 관점이다. 신 교수는 이것이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고 지적한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조선후기의 농업경영은 오히려 광작이나 지주제보다는 소농경영이었고, 당시 토지의 사적소유권은 근대적 소유권을 방불할 정도로 발달해있었다는 것. 민란의 시대로 일컫는 19세기의 어떤 농민의 항쟁에서도 '토지소유권'보다는 '부세제도' 개선 요구가 주류를 이뤘다. 따라서 정전제적 토지개혁론은 기층농민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 아니고, 따라서 지식인의 실천적 행위 내지는 실학자들이 농민의 입장을 대변했다는 식으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신 교수는 지적한다.

이 정도만 봐도 실학이라는 범주가 얼마나 군살이 많은 지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살을 빼서 실학이 준수한 외모를 되찾을 수 있을 지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적 개념인 '실학'의 죽음이 염려되더라도, 신 교수가 강조하는 '정확한 실증'이 중요하다면, 김 교수가 주문한 일곱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학계가 공동으로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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