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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현실이 연구에 개입한다.
때로는 현실이 연구에 개입한다.
  • 박준훈
  • 승인 2022.03.15 0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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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박준훈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고백하자면 나는 『82년생 김지영』이 화제가 되고 한참이 지나서야, 그마저도 수업의 과제물 제출을 위해 읽게 되었다. 소설이 출판되고도 꽤 시점이 지난 2020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동안 이 소설을 외면해왔던 것이다. 꽤나 화제가 된 소설이었기에, 문학과 관련된 이야기가 오가는 장에서는 쉽게 이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었지만 ‘굳이 이렇게 많이 이야기되는 걸 내가 직접 읽어야 하나?’라는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평등이라는 말에는 쉽게 동의를 표하면서도, 애써 세세한 내용에 대해서까지는 『알고 싶지 않은 마음』이었고, ‘고집스런 무지’를 이어가고 있었다.

소설을 직접 읽고, 텍스트 분석과 연구사 검토의 과정을 거치며 나의 개인적 고집이 사실은 지극히 정치적인 배경으로 인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소설 속 남성 의사의 모습이 사실은 나 자신의 모습이며, 대다수 남성들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남성 의사에 대해 제출된 민감한 반응들은 어쩌면 자신의 남성성과 그 특권을 드러내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일 수 있다는 의혹이 스쳐 지나갔다. 기존가치를 내세우는 것이 때로는 자신의 특권을 유지하고, 외면을 지속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도 있다.

이런 태도가 나 자신에게만 한정된 비겁함이나 옹졸함이라면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페미니스트 저자와 활동가들은 이런 문제가 오직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무수한 혐오 선동에서 유사하게 나타나는 태도라고 주장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등을 지향한다면서 혐오와 차별을 부추기는 세력은 그 어떤 논리나 통계 자료를 들이밀어도 왜곡된 해석을 내놓거나 애써 무시하기를 택하고 있다. 심지어 이 같은 외면이나 저평가는 학문의 장에서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연구성과나 탁월한 학문적 성취라 하더라도 외면해버리면 그 결과물을 수용할 가능성은 남지 않는다. 기존의 성취에서 미달된 것, 일부에게만 한정된 것, 악의를 가지고 창작·왜곡된 것이라는 식으로 낙인을 찍어버리면 고유의 가치는 손쉽게 가려질 수 있다. 작품이나 연구가 현실의 변화를 유발하기 어렵다면, 현실의 권력 관계에 의해 그 성취가 쉽게 왜곡 당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의 초점은 이미 형성된 평가의 틀과 외면하는 태도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혹은 아예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인지로 이동하여야 한다.

이 필요성을 느끼고서야 비로소 중학생 때부터 갖고 있던 의문이 조금은 풀리는 것 같았다. 왜 나와 친구들이 즐겨 읽는 글들은 교과서에 실리지 못하는 걸까. 나와 내 친구들이 쓰는 글들은 교과서에 실린 글들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 글일까. 본격적으로 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따라다니던 이 의문은, 문학연구자가 되려는 순간에서야 조그마한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 보였다. 물론 나는 여전히 좋은 글을 쓰고 남다른 의미를 읽어내는 능력을 갖추지는 못하였지만, 단지 좋은 읽기·쓰기와 나쁜 읽기·쓰기가 누군가에 의해 구분 지어졌다고 믿는다.
연구든 작품이든 무엇을 달성하느냐 하는 질문은 결국 이 구분과 태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에서, 때로는 현실이 평가에 개입한다.

박준훈 동아대 한국어문학과 박사과정

동아대 박사과정에 재학중이며 젠더·어펙트 연구소에서 ‘좋은 글’이라는 규범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석사학위 논문은 「반차별 읽기를 위한 대안으로서 페미니즘 리터러시 연구: 『82년생 김지영』을 중심으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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