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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 유교 대안주의의 신성성? -『유교사회학』(이영찬 지음, 예문서원 刊), 『주역사회학』(김재범 지
[테마] 유교 대안주의의 신성성? -『유교사회학』(이영찬 지음, 예문서원 刊), 『주역사회학』(김재범 지
  • 교수신문
  • 승인 200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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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8 10:31:00
김상준 / 정신문화연구원 초빙연구원

‘유교’라는 유령이 사회학계를 떠돌아 왔다. 그 유령은 기존의 한국사회학의 방법과 내용을 비판하면서 유교적 대안의 신성성을 강조해 왔다. 이 두 권의 책은 그 동안 사회학계를 떠돌던 유교라는 유령의 시민권 선언이다. 되돌아 온 유교적 신성함은 한국 사회학계를 - 공포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 아연 긴장시킬만한 이유가 있다. 그 이유는 첫째, 대다수의 사회학자들이 지금껏 한국사회의 유교적 현상에 대해 암묵적이긴 하지만 거의 원칙적 일관성(methodical coherence)을 가지고 외면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에서의 유교적 현상이란 너무나 명백하고 만연된 것이기에, 오랜 학문적 不感은 恨으로 되돌아 올만한 충분한 연유가 있었다. 둘째의 긴장은 돌아온 ‘유교 사회학’의 모습이 신성한 완결성을 가지고 있다는 데서 비롯된다. 원래 사회학은 신성의 사회지배에 대한 역사적 비판에서 싹텄다. 그렇기에 사회학은 방법론 자체가 신성한 것, 절대적인 것에 대한 비판의식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 새로이 들어선 ‘유교적 사회학’의 신성성 앞에 사회학이 긴장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유교적 사회학’이 던진 긴장
한국 사회학의 큰 문제의 하나는 전통사회론과 현대사회론이 거의 완전하게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방법론도 그렇고 내용도 그렇다. 이 현상은 한국 사회학이 처한 곤경의 핵심을 노출한다. 출발할 뿌리가 없는 것이다. 전통 - 현대 사회가 별개의 것으로 간주될수록, 현대사회의 분석을 위해서는 끊임없이 이론수입에 의지해야 하고, 전통사회 분석을 위한 새로운 사회이론의 습득과 응용은 불필요해진다. 그러나 사회학은 그 뿌리에서부터 역사적인 비판과학이다. 뒤르켐의 ‘분업론’, 베버의 ‘경제와 사회’, 마르크스 ‘요강’(要綱: Grundrisse)의 위대성은 모두 비판적 역사 분석의 충실성에 기반 한다. 지금은 유행이 한풀 꺾였지만,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의미 있는 일부 작업들 역시 매우 치밀한 역사적 재해석에 기반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유교적 현상은 한국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단서의 하나다. 한국 사람치고 조상 제사에 한 번이라도 끼어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인구의 대다수가 어쨌든 ‘4대 奉祀’의 시늉이라도 내고 있는 상황은 문자 그대로 ‘단군이래 초유의 현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유교시대’엔 양반 사족의 독점적 전유물이었던 ‘사대 봉사’의 제례가 현대 한국사회에서 全國民化된 셈이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두 책의 저자들과 같이 한국인들의 “마음의 유교적 습성”이 한국 “현실의 심층 구조”를 이루고 있다고 주장한다 해서 큰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 내용을 부정하고 싶든, 긍정하고 싶든, 그렇다는 사실 자체는 부인될 수 없다.
더 나아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교육문제, 여성문제, 가족문제, 정치문화, 경제문화에서 그러한 “마음의 유교적 습성”이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을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는 일은 매우 가치 있는 작업임에 분명하다. 사회학계에서 이러한 접근방식의 선례로는 ‘유교자본주의론’을 들 수가 있다. 한국사회의 경제적 관계는 유교적 네트워크(network)로 짜여져 있다는 주장이다. 논평자는 그 현상에 대한 가치 판단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그 주장이 ‘사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은 인정돼야 한다. 이런 방향의 연구는 다양한 각도에서 더욱 추구돼야 한다.
이렇듯 한국 사회학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일구어 나가야 할 의미 있는 공백지대에 착목한 만큼, 두 저서는 주제에 대한 남다른 열성과 사명감을 보여주고 있다. ‘유교사회학’은 유교적 합리성, 인성론, 계층론, 변동론, 사회 통제론, 국가론 등을 망라하는 영역에서 유교적 발상법을 정리하고 있다. 방대한 영역에서의 차분한 정리는 이영찬 교수의 이 주제에 대한 그 동안의 준비와 열정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주역사회학’은 문명대안적인 입장을 보다 강하게 취해 서구철학의 방법론을 객관주의/상대주의의 양대 위험으로 규정하면서 주역의 세계관을 그에 대비시킨다.
이 의욕적인 저작들의 문제점은 한마디, 즉 ‘근본주의적(fundamentalist) 편향’으로 모아진다. 기왕의 한국 사회학계는 한국사회의 유교적 현상의 존재를 못 보았다기 보다는 그것을 근대적 시각에서 부정적으로 보아 왔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회피해 왔다. 이러한 현상의 이면에 자기 역사에 대한 패배주의와 자기 분석의 회피 의지가 일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책은 반대로 유교를 신성화하는 역 편향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어느 정도 강조점의 차이는 있다. ‘유교사회학’은 기왕의 사회학 이론들을 아울러 검토하면서 “대안보다는 보완”을 내세우고 있는 반면, ‘주역사회학’은 현상학, 해석학의 (서양의 주류 철학에 대한) 서양 철학의 자기 비판적 이론들을 검토하면서 “주역의 세계인식원리가 가지는 방법론적 함의”를 진정한 대안으로 내세운다. 그렇지만 비판의 대상(서구적 근대의 세계관)을 “추상적 이성주의,” “극단적 개인주의” 등의 논쟁적 개념으로 세워놓고 여기에 대해 “생명력이 충만한 유교적 이성”이나 “도덕적 개인주의” 등 우월한 수사로 구성된 개념을 대안으로 맞세워 놓는다는 기본 구도에는 두 저작 사이에 커다란 차이가 없다. 그리하여 ‘유교적 사회학’은 “천리본성을 자각해 삶을 우주질서에 일치시키는 길을 제시하는 학문” 또는 “깨달음의 지평을 넓히는 학문”으로서 “도구적 지식”에 머무르고 있는 “서구의 근대적 인간관 세계관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이론 반발이 한국사회분석 압도
필자는 이 책의 저자들이 그토록 강조하는 ‘한국(적) 사회학의 정립’의 취지에는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그 경로에 대해서는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서구 철학이든 사회학이든 그들 연구가 갖는 진정한 강점은 끊임없는 자기 비판과 자기 혁신에 있다. 서구 철학의 일부에서 동양적 사유방법을 도입하려는 시도는 그러한 자기 성찰 작업의 결과이다. 서구 자유주의의 자기 비판이 그들의 자유주의 전통을 풍요롭게 하고 있음을 보아야 한다. 그들의 개인주의 비판은 완전히 정착된 개인주의에 대한 보완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서양의 근대 자체가 무서우리만큼 냉철한 자기 비판의 결과임을 여기서 길게 부언할 필요는 없겠다. 이 책의 필자들이 한국 사회의 속살을 구성하고 있는 유교라는 부분에 주목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기 비판의 정신을 배제하고, 잃어버린 자존과 순수의 회복에 경도될 때, 근본주의적 편향의 모든 위험이 머리를 들게 된다.
두 저작의 문제의식은, 역설적이게도, 내부 유발적이라기 보다는 외부 유발적이다. 즉, 서구 이론의 지배에 대한 반발과 그 한계에 대한 문제의식이 한국사회 내부의 문제점들에 대한 분석의지를 압도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유교적 사회운영 원리가 내적으로 봉착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문제 지점들에 대한 지적이 취약하다. 예를 들어, 유교적 사회운영 원리의 요체를 집약하고 있는 ‘대학’의 유명한 8조목 - 修身, 齊家, 治國의 순환적 융합 - 이 내포하고 있는 문제점이 그러하다. 이 두 저작은 이 ‘대학 8조목’의 정신을 정확히 이해하고 보완해 현대에 되살리자는 데 크게 보아 동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수신과 제가의 사이, 제가와 치국의 사이에는 끊임없는 긴장이 생성돼 왔으며 일정한 계기들을 통해 그러한 융합의 고리들이 파열되기도 하였다. 명의 이단아 리찌(李贄)에게서는 수신/제가 사이의, 조선의 윤휴에게서는 제가/치국 사이의 긴장과 파열이 발견된다. 이러한 긴장들은 근대와의 연관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교적 사회운영의 실상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검토돼야 한다. 한국 사회이론은 그런 구체적인 지점들에서 싹틀 것이다.
두 저작이 공유하고 있는, 유교 전통이 定礎한 ‘윤리적 주체’에 대한 관심은 정당하다. 그렇지만 역사적 비판에 의해 걸러지고 재구성되지 않으면 그 윤리적 주체는 변화된 지형 위에 제 거처를 찾을 수 없다. 이 점에서 찰스 테일러나 알랭 투렌느의 (서구 문명에서의) 윤리적 주체의 재구성 작업은 타산지석이 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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