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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1] 퇴학, 투옥, 망명 그리고 반란주도. 말레테스타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81] 퇴학, 투옥, 망명 그리고 반란주도. 말레테스타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3.07 0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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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재 신채호
에리코 말레테스타
미하일 바쿠닌
카를로 피사카네
영화 '마틴 에덴'의 포스터. 사진=나무위키
영화 '마틴 에덴'의 포스터. 사진=나무위키

한국에서 <아나키스트>라는 영화가 만들어졌지만, 외국에서는 아나키스트가 영화에 등장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일한 예외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인 말라테스타이다. 그의 전기 영화는 이탈리아가 아니라 1970년 독일의 피터 릴리엔탈(Peter Lilienthal, 1929~)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 

2019년 이탈리아 영화 <마틴 에덴>은 주인공 마틴 에덴이 개인으로서 국가와의 대결을 피력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어 필름이 타들어가는 옛 기록영화 같은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은 1920년 말라테스타가 사보나에서 연설하는 장면이다. 영화를 만든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은 자신이 말라테스타를 매우 좋아한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사회주의와 개인주의 및 아나키즘의 경계를 담고 있는 자신의 영화에 말라테스타의 복합적인 이미지는 반드시 필요하고, 주인공 마틴 에덴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노동조합 모두와 갈등하는 것은 원작자인 잭 런던의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반영한다고 했다. 그러나 말라테스타와 잭 런던을 같이 보기는 어려운 것 같다. 잭 런던에 대해서는 뒤에 미국 아나키스트를 설명할 때 검토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말라테스타를 낳은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역사부터 살펴보도록 하자.

 

주세페 파닐레, 카피에로, 코스타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면면들

로마 제국이 멸망한 뒤 이탈리아는 수많은 왕국과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었다가 1861년에 이르러서야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 ‘부흥’이라는 뜻)라고 불리는 격변기를 겪으며 통일을 이루었다. 그 주역은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 1805~1872)와 주세페 마리아 가리발디(Giuseppe Maria Garibaldi, 1807~1882), 그리고 카밀로 벤소 카보우르(Camillo Benso Conte di Cavour, 1810~1861)로 일찍이 1907년 단재 신채호의 소설 <이태리 건국 삼걸전>으로 소개되어 일제의 침탈 직전 민족영웅을 대망하게 한 바 있다. 1907년은 단재가 아나키즘에 기울기 전 민족주의자였던 시기라고 하지만, 프랑스의 프루동이 이탈리아 공화주의 사상을 자극하고 이탈리아의 공화주의와 민족주의 운동이 아나키스트들을 낳게 되는 것을 고려하면 그 뒤 단재가 아나키즘에 기운 것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이는 종래 단재의 아나키즘을 민족주의에서의 이탈 혹은 외도라는 식으로 보는 통설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

주세페 마치니. 사진=위키미디어
주세페 마치니. 사진=위키미디어

1861년 이탈리아 왕국의 성립에 가리발디의 군대는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 뒤 이어진 통일의 주역은 마치니였다. 그러나 통일 이후 이탈리아 내부에서는 정치에 가려진 사회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 생겨났다. 특히 민족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 사이의 과도기적인 인물이었던 카를로 피사카네(Carlo Pisacane, 1818~1857)는 마치니 군대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한 뒤, 프루동과 푸리에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는 농민 해방을 중심으로 한 사회혁명을 통한 자주국가 건설을 주장하면서 유일하게 정당하고 안전한 정부 형태는 프루동이 이야기한 자치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산업 공장은 집단 재산이 되어야 하고 토지는 코뮌이 집단화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프루동을 뛰어넘어 바쿠닌적 집산주의로 향했다. 그리고 ‘행위에 의한 선전’(propaganda dei fatti)을 옹호한 점에서 이탈리아 아나키즘의 특색을 형성했다. 또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음모와 폭동, 느슨한 조직과 지방 중심이라는 운동 방식은 아나키스트들의 투쟁 전략에도 영향을 주었다. 

1857년에 피사카네가 죽고 난 뒤 그의 동지들은 1864년 바쿠닌이 이탈리아에 와서 설립한 형제단과 국제형제단에 참여함으로써 이탈리아에서의 아나키즘 운동은 실질적으로 시작되었다. 바쿠닌이 그의 슬라브주의를 포기하고 국제주의로 돌아선 곳은 피렌체였다. 따라서 이탈리아에서 아나키즘의 탄생은 국제 아나키스트 운동의 탄생과 동시에 이루어졌다. 국제 형제단의 이탈리아 지부 회원 중에는 아나키스트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스페인에 선구적인 선교를 나간 이탈리아 의회 의원 주세페 파넬리(Giuseppe Fanelli, 1827~1877)도 있었다. 

1869년 국제 형제단의 지부가 해산되고 국제노동자협회(IWMA)의 지부가 되면서부터 이탈리아 아나키즘 운동은 성장했다. 1870년대 초에 카피에로와 코스타 그리고 말라테스타라는 세 명의 20대 젊은이들이 두각을 나타냈다. 그들 모두는 확신에 찬 실증주의자로 콩트와 스펜서의 사회학에서 영감을 받아 사회를 사유재산과 국가 제도에 의해 자연적인 성장이 방해받는 살아있는 유기체로 보았다.

카를로 카피에로. 사진=위키미디어
카를로 카피에로. 사진=위키미디어

카를로 카피에로(Carlo Cafiero, 1846~1892)는 가족의 재산과 외교관으로서의 경력을 포기한 귀족 출신이었다. 인터내셔널의 일원으로서 마르크스는 그를 이용하여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마르크스주의로 전환시키기를 바랐다. 그는 <자본론> 개요를 썼고 1871년 런던에서 마르크스를 만났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 바쿠닌과 말라테스타에 의해 아나키스트로 개종했다. 한편, 쁘띠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볼로냐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안드레아 코스타(Andrea Costa, 1851~1910)에 의해 새로운 무장조직도 생겨났다.

 

“혁명은 말보다 행동에 있다” 

에리코 말레테스타. 사진=위키미디어
에리코 말라테스타. 사진=위키미디어

이탈리아에서 가장 저명한 아나키스트인 에리코 말라테스타(Errico Malatesta, 1853~1932)는 지방의 진보적인 소규모 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의대생이었을 때 공화파 시위에 참가해 퇴학당한 뒤 바쿠닌의 저서를 읽고 1871년 인터내셔널의 이탈리아 지부에 합류했다. 상속 재산을 세입자에게 양도하면서 독립적으로 생활하기 위해 전기 및 기계를 다루는 기술을 배웠다.

그 뒤 스페인에서 오스만 제국까지 지중해 주변을 광범위하게 여행한 그는 1872년 스위스 주네브에서 바쿠닌을 만났다. 말라테스타는 권위와 국가를 비판한 바쿠닌을 ‘우리의 정신적 아버지’로 인정했지만 정치경제학과 역사에 대한 바쿠닌의 견해는 너무 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말라테스타와 코스타 등은 이탈리아 전역에서 사회혁명을 일으키기 위해 볼로냐에서 봉기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한 직접 행동의 메시지는 국제 아나키즘 운동에서는 인정됐다.

마하일 바쿠닌. 사진=위키미디어
마하일 바쿠닌. 사진=위키미디어

1876년 베른 인터내셔널 회의에서 말라테스타는 “혁명은 말보다 행동에 있다. … 사람들의 자발적인 움직임이 분출할 때마다 … 만들어지고 있는 운동과의 연대를 선언하는 것은 모든 혁명적 사회주의자의 의무이다.”라고 하고 “운동은 기존 제도를 무력으로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각자는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사회를 위해 모든 일을 해야 하며, 생산 상태와 사회적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하도록 사회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했다. 이어 피렌체 외곽 숲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 “각자는 자신의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사회를 위해 모든 일을 해야 하며, 생산 상태와 사회적 능력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자신의 모든 필요를 충족하도록 사회에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아나키스트들은 무장 반란을 시도했으나 역시 실패했다. 그 직후 새로운 국왕 움베르토가 나폴리 출신의 공화주의자 요리사의 칼에 찔렸고, 다음 날 군주제 퍼레이드에서 폭탄이 터져 더 큰 탄압이 뒤따랐다. 인터내셔널은 해체되고 말라테스타는 망명해 스위스에 있는 쥐라 인터내셔널 연맹 회원들과 함께 지내면서 르클뤼와 크로포트킨의 친구가 되었다. 1879년에는 루마니아로 갔다가 이어 1881년 런던에서 열린 국제 대회에 참석했고 다음 해에는 반란을 일으키기 위해 이집트로 갔다. 그는 1883년에 이탈리아로 돌아와 이탈리아 지역을 재편성하는 일을 도우려고 노력했고 <사회문제>(La Questione Sociale)지를 편집했다.

1880년대에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유럽의 아나키스트 활동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사회문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는 사람들을 위해 아나키 코뮤니즘에 대한 설명서인 <농민 사이에서>(Fracontadini, 1884)를 썼다. 아나키를 ‘정부가 없는 상태’라고 정의한 그에 의하면 정부는 부르주아를 방어하는 역할을 할 뿐이며, 노동자 이익문제가 발생할 때 가장 좋은 것은 그들 스스로가 문제를 관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인간의 연대를 바탕으로 하여 재산의 공동소유와 생산의 사회화를 수반하는 코뮤니즘을 주창한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라는 원칙에 입각한 “전 세계 사람들 사이의 완전한 결속을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혁명 이후에는 사회가 서로 다른 직업의 협회를 형성하는 공동체로 분할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오직 아나키스트 코뮤니즘만이 인류를 해방시키고 불가능한 정치 권력인 정부의 해체를 가져올 수 있다고 했다. 

1884년 3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나폴리에서 콜레라 전염병을 도운 후 보석금을 내고 1885년에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항해했다. 그 후 아르헨티나에서 4년을 보내면서 그곳의 노동운동을 아나키즘으로 전환시켰다. 유럽으로 돌아온 뒤에는 프랑스, ​​영국, 스위스, 스페인을 방문하고 1897년 이탈리아에 다시 정착했다. 1889년 런던에 두 번째 체류하는 동안 전기 작가 막스 네틀라우와 평생 우정을 맺고 사회주의연맹에서 윌리엄 모리스를 만났다.

1889-90년의 런던 부두 파업에 깊은 인상을 받았지만 그것이 일반 봉기로 이어질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은 그는 1890년 사회주의동맹 회의에서 재산의 압류를 옹호했다. 1890년 8월 6일 <커먼웰>(The Commonweal)에서 그는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고 부자의 저택에 살도록 촉구하자. 미래에 대한 논의로 우리의 노력을 마비시키지 말자”고 썼다. “바리케이드든 다른 방식이든 간에, 즉각적인 군사 행동으로 즉시 총파업을 활용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총파업이 좋다”라고 촉구했으나, 이는 그 뒤에 테러를 비난하고 생디칼리슴을 요구한 것과 달랐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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