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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 비판적 서학 수용으로 유학 넘으려”
“연암 박지원, 비판적 서학 수용으로 유학 넘으려”
  • 노경희
  • 승인 2022.03.11 09: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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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열하일기 연구』 김명호 지음 | 돌베개 | 842쪽

서학과 적극 소통하려던 연암의 의욕은 점차 퇴색
시대의 제약으로 인해 조선 후기 실학 발전은 더뎌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242년 전, 1780년 설레는 마음을 안고 중국에 다녀온 한 조선 문인의 여행 기록에 대한 연구서이다. 다만, 그 문인이 조선의 대문호라 일컬어지는 연암 박지원이며 그 기행문은 조선시대 수백 종에 이르는 연행록 중 첫 번째 손가락에 꼽히는 『열하일기』라는 점이 특별할 뿐이다. 

 

또한 이 책은 저자 김명호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가 1990년 처음 출간한 저서 『열하일기 연구』의 ‘수정증보판’이다. 그러나 ‘수정증보판’이라 한정짓기엔, 이 책은 지난 32년에 걸친 우리나라와 중국, 일본 그리고 서구 학계의 연구를 모두 검토한 위에 연암 문학의 전체적인 맥락과 조선시대 연행록의 전통, 홍대용 등 북학파 인사들의 저술과의 관계, 실학과 서학을 넘나드는 조선후기 학술 동향 등 전방위적 측면에서 『열하일기』를 분석한 역작이다. 

 

58종 이본 자료들 하나하나 검토

저자는 무려 58종에 이르는 이본 자료들을 하나하나 검토하여 『열하일기』의 형성부터 전승 과정을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1990년의 초판본에서 ‘7종’의 주요 이본이 검토된 이후, 2000년대 들어서 국내와 해외에 소장된 우리 고문헌 자료들이 조사되며 미국의 버클리대본이나 일본의 동양문고본 등 중요한 이본들이 보고됐다. 2012년에는 단국대 도서관 연민문고에 소장된 『열하일기』 초기 필사본이 학계에 대거 공개됐다. 

뿐만 아니라 이 저서의 집필을 한참 마무리하던 2021년 6월에는 연암의 손자이자 박규수의 동생인 온재(溫齋) 박선수 소장 고문헌이 국립중앙도서관에 기증되면서 새로운 연암 후손가 자료들이 세상에 나타났다. 여기에는 판심에 ‘연암산방(燕巖山房)’이라 새겨진 연암의 개인 원고지에 필사된, 연암의 지우(知友) 유득공의 서문과 그의 주석이 다수 실린 매우 특별한 이본이 들어 있었다. 2022년 판 『열하일기 연구』는 이 특별한 필사본까지 포함하여 현전하는 모든 자료들이 총망라된 가장 엄밀한 『열하일기』 이본 연구서이기도 하다. 

이렇게 ‘대규모의 세심한’ 연구를 바탕으로 이 책에서는 연암의 사상과 서학과의 관련성, 즉 서학을 주체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유학을 혁신하고자 했던 모습에도 새롭게 주목하였다. 이번 수정증보판에 추가된 「일신수필」 서문에 대한 글에서 저자는 다양한 이본을 바탕으로 「일신수필」 서문의 개작 상황을 분석한 뒤 “서학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던 연암의 애초의 의욕이 점차 퇴색되어 간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조선 실학 전통 속 연암의 성취·한계

유학을 기반으로 하되 서학을 비판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사상적 혁신을 추구한 연암의 노력이 이처럼 더 이상 뻗어 나가지 못하고 만 것은 조선 후기 실학의 발전을 위해 안타까운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443쪽)”라고 마무리 짓는데, 여기에는 연구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견지하면서도 조선 실학 전통 속의 연암의 성취와 한계를 냉철히 분석하는 저자의 엄정한 시선이 동시에 감지된다. 이로써 저자는 연암의 한계는 곧 그의 시대의 제약에서 기인한 것으로 이는 곧 다음 시대가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였음을 주장하는 것이다.(388쪽)

연암은 귀국 직후 『열하일기』 저술에 착수하여 죽을 때까지 이를 끊임없이 수정하고 보완하였다. 그의 사후에는 아들 박종채와 손자 박규수 등의 손길이 이어졌으며, 1932년 박영철본 『연암집』으로 정비되기까지 다양한 형태의 전사본이 전승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정본(定本)’으로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기에 연암 문학의 특색을 살린 완벽한 교합본이 요구된다.(567쪽) 『열하일기 연구』 또한 1990년의 초판과 2022년의 수정증보판이 나왔으나 이는 현 단계에서의 집대성일 뿐이다. 앞으로도 새로운 시각과 자료를 바탕으로 『열하일기』 연구서는 언제든 다시 저술될 것이다. 

그러함에도 본인의 손을 통하든 다른 연구자의 손으로 이루어지든, 이 현전하는 가장 완정한 『열하일기 연구』가 그저 하나의 선행 연구로 지위가 바뀌는 모습을 가장 기다리고 기뻐할 이는 저자 김명호 교수라는 사실만은 분명할 것이다. 

 

 

노경희
울산대 국어국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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