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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눈물을 흘린다
진리는 눈물을 흘린다
  • 최재목
  • 승인 2022.03.07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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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정론_ 최재목 논설위원 / 영남대 철학과 교수

 

최재목 논설위원

다시 개학이다. 우크라이나 하늘 위로 포탄이 날아다니고, 오미크론 환자가 증가하는 불안한대지. 수류화개라니, 부조리하다. 오리무중인 지상의 사태엔 눈감고 어김없이 강물은 흐르고 송이송이 꽃은 핀다. 

그래도 자꾸 봄을 생각하고 기다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지난 겨울의 시간들이 불안하고 힘들었기 때문이리라. 과거 56억 7천만 년 뒤에 올 미륵불을 기다리는 사람들처럼, 희망은 늘 현재를 넘어선 초월의 어떤 장소에 존재한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럴까? 희망은 현재의 지속일 뿐, 실재하지 않는 아름다운 착각이나 몽상일 뿐이다. 기다리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언젠가는…’이란 내용 자체를 아무도 알 수는 없다. 그것을 우리가 ‘있는/있을’ 것처럼 애타게 기다리는 뜻은,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를 기다리는 심정처럼, 닿을 수 없는 곳에 닿아보려는 얄궂은 꿈이리라. 그래도, 다시 묻는다. “희망은 있는가?”  

마스크로 가려 발랄한 표정은 읽기 어려워도 발걸음 가벼운 스무 살 대학생들로 붐비는 캠퍼스는 여전히 아름답다. 대학을 흔히 진리를 가르치는 곳이라 한다. 그래서 진흙탕도 시장바닥도, 더구나 지옥이 아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라 믿는다. 그렇다고 대학이 무욕의 청정지역일까. 아니다.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는 유마힐거사의 말처럼, 바깥세상이 정치적, 경제적으로 힘들고 인구감소·고령화 등으로 비틀거릴 때, 대학 또한 신음한다. 

천재지변이나 전염병 등등으로, 삶은 갈수록 부조리하고 예측이 어렵게 됐다. 더구나 현재 우리나라 꼴은 파란만장, 화합 없이 분열중이다. 정권이 바뀌면 대학 또한 그 권력의 영향 아래 지형도가 달라진다. 진리 또한 정치권력에 따라 선택적으로 교육되어 왜곡된다.

그렇다면 진리를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알베르 까뮈가 부조리에 대처하는 방법으로 제시한 ‘형이상학적 반항’처럼, 부조리한 삶을 인정하고 스스로 지킬 것을 지키려 저항해야 하리라. 부조리로부터 등 돌리고 도피하는 것은 ‘진리의 죽음(자살)’으로 들어서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종교든 과학이든 이념이든 간에 안이하게 맹신하는 것은 진리에 눈감는 이른바 ‘철학적 자살’ 아닌가. 

그러나 이런 원론적인 고민들도 사실 대학에 학생들이 대폭 줄어들면 사라지고 말 것이다. 말하자면 문 닫는 대학이 늘어나는데 한가하게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질문 던질 겨를이 있기나 할까. 마치 릴케가 “신이여, 제가 없다면 당신은 뭘 하겠습니까?”라고 묻듯이, ‘대학이여, 학생이 없다면 당신은 뭘 하겠습니까?’라는 질문 앞에 경련을 일으키고 말 것이다.

생존이냐 진리냐? 일단 생존이 먼저다. 이제 대학(특히 지역대학)은 학령인구 감소에 대해 획기적인 경영방안을 모색해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무엇을, 왜,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떠나 있지 않다. 결국 가르쳐야할 진리가 무엇이며, 그 탐색이 현실사회와 연관돼 어떻게 창의적으로 특성화되는가 여부이다.

이에, 몇 가지 제시하고 싶은 의제가 떠오른다. 먼저, 학생은 누구인가이다. 고령화 시대에 과연 젊은이들만 학생일까? 생애교육을 전제하고 진지하게 검토해볼 문제이다. 이어서, 문과 이과의 구별, 교양과 전공의 칸막이에 대해서도 원점에서 재고해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학과·전공 없이 입학하여 스스로의 전문분야를 자율 설계하여 졸업할 수 있는 영역의 확대이다. 

‘대학이 추구하는 진리란 무엇인가?’ 이런 물음 앞에 진리는, 조용히, 불안하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최재목 논설위원
영남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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