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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 기초과학문화포럼 ‘국민을 생각하는 과학기술’
[토론] 기초과학문화포럼 ‘국민을 생각하는 과학기술’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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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8 10:34:39
광우병, 치매, 노화 등 현대과학이 당면한 주요 쟁점에 대해 전문가 토론을 벌여온 기초과학문화포럼(연구책임자 임경순 포항공대 교수)이 토론장을 넓혀 ‘국민을 생각하는 과학기술’을 주제로 지난 18일 서울교육문화회관에서 과학기술 국민대토론회를 열었다.

토론주제에서 밝힌 주최측의 의도는 과학기술이 국민복지에 미치는 각종 혜택을 설명하면서 과학에 대한 일반인의 이해를 돕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 더 기대했다면 기초과학이 직면한 위기의 징후를 전달하고 지원을 촉구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기조 발제는 두 가지. 김희준 서울대 교수(화학과)는 ‘기초과학은 국민을 위해 어떻게 기여할 것인가’를 주제로, 김용선 한림대 교수(미생물학교실)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과학기술’을 주제로 발표했다. 대토론회란 명패를 단 만큼 학계, 시민단체, 정부출연기관, 언론계, 정책당국에서 여러 대표들이 토론자로 단상을 메웠다. 서유헌·박상철 서울대 교수(의학과), 김재완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물리학과), 박병상 생명안전윤리연대모임 사무국장, 채연석 항공주우연구원 선임연구부장, 구본제 과학기술부 정책총괄과장, 신동호 동아사이언스 신문팀장, 김근배 전북대 교수(과학학과).

주제와 주최측의 의도만 놓고 본다면 토론회에선 뭔가 신선한 논의가 이뤄졌을 법하다. 기대치를 높여본다면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 유전자 조작, 인간복제 등 첨단과학기술의 쟁점에 대해 과학계 스스로가 자기준거를 설정하자는 목소리도 나올만 하다. 그러나 이 기대는 애초부터 무리였다.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대부분 과학계에 몸담고 있는 이들이어서, 토론의 논지는 줄곧 기초과학의 위기 징후를 전달하고, 정부에 더 많은 지원을 촉구하는데 쏠렸다.

김희준 교수는 기조발제에서 과학과 기술과의 역사적 관계성에 주목하면서 앞으로 과학이 어떻게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을지를 설명했다. 그는 “19세기말까지는 기술이 과학을 앞섰고, 20세기는 기초과학이 기술을 창출했고, 21세기는 과학과 기술이 융합될 것”이라며 “기술이란 집을 짓기 위해서는 과학이란 기초가 필수적이며, 그런 의미에서 기초과학에 대한 지원이 확대돼야 하고, 국민에게 과학기술의 혜택을 설득력있게 홍보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용선 교수의 발제는 기초의학이 처한 현실적 상황설명에 초점이 두어졌다. 그는 “기초의학의 학문적 수준을 선진국과 동일하게 요구하고 있음에도, 정부의 정책결정과 연구개발비 투자에서 소외되고 있다”며 “ 노인성 질환, 에이즈, 광우병 등 새로운 질병이 국민의 건강을 위협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 의료기술의 발전을 바란다면 기초의학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지원체제가 확립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발제 이후 2시간동안 진행된 토론도 과학의 중요성에 비해 지원이 소홀하다는 점을 들어 연신 지원을 촉구하는 목소리로 채워졌다. 기초과학이 홀대받고 있는 현실을 전달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토론에서 ‘국민’은 차츰 생략되어 갔다. 토론이 점점 답답해지자 반론은 방청석에서 터져 나왔다. 이화여대 철학과 박사과정의 연구자는 “과학기술이 ‘할 수 있는 것’과 ‘해야하는 것’의 경계를 무시하거나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세민환경연구소 홍욱희 박사는 “토론의 주제대로라면 과학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기 이전에 과학자가 국민에게 어떻게 봉사할 것인지에 관한 진지한 토론이 선행돼야 한다”고 반론을 제기했다.
과학기술 발전속도가 빨라지면서 과학과 대중과의 간극은 점점 멀어져만 가고 있다. 과학은 전문적 지식이 없는 대중의 무지몽매를 비판하고, 대중은 과학의 도구화의 오류와 돌발성을 염려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번 토론회는 적지않은 예산을 들여가며 적절한 시기에 마련됐지만, 또 한번 그들만의 잔치를 확인했을 뿐이다. 국민을 생각하기 보다는 과학계의 요구를 전달하는 장에 그쳐 버렸다. 이날 토론의 명패는 ‘국민을 생각하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과학자를 생각하는’ 과학기술이 오히려 적당할 듯 했다.
안길찬 기자 chan1218@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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