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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21C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 (1) 무크·계간지들의 몰락
[기획연재- 21C 한국 지식인들의 자화상] (1) 무크·계간지들의 몰락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1.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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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된 議題’ 세워야 … “지식인을 겨냥하라”

연재순서

(1)계간지, 무크지들의 몰락

(2)과학에 무지한 반쪽짜리 인문학

(3)무기력한 학술단체들

(4)국가가 관리하는 지식인들

(5)어정쩡한 비판으로 체면 유지하기

(6)이데올로기가 된 교양주의

지식인의 존재론적 특징은 무엇일까. 그것은 현실에 비판적으로
개입하면서, 동시에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을 통해 거듭난다는
것에 있지 않을까. 우리 시대 지식인들은 너무 빨리 급변하는 환경에
처해, 외부적 관찰에만 몰두한 나머지 자신을 돌아볼 여유를 잃어버린
측면이 있는 듯하다. 교수신문은 대학과 사회가 함께 거대한 구조조정을
행하고 있는  지금 이 시점이야말로 지식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볼
적합한 시기라는 판단 아래, 스스로에 대한 비판적 성찰이 필요한
몇몇 풍경을 중심으로 지식인들의 자화상을 그려보고자 한다.

추풍에 지는 낙엽처럼 학술계간지들이 그 終焉을 고하고 있어 씁쓸한 날들이 되고 있다. 일지사에서 발행하는 ‘한국학보’가 얼마 전 김성재 대표의 타계에 뒤이어 종지부를 찍었는가 하면, 과학계의 원로들이 이끌어오던 ‘과학사상’도 2005년 전반기호(50호)를 마지막으로 복간의 기약 없이 휴간됐다. 두 학술지의 종간은 그 분야에서 선구적 역할을 해온 일지사와 범양사출판부, 두 출판사를 함께 떠나보내는 한 時代와의 이별로도 여겨졌다.

아무리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잡지시장이라지만, 요즘 계간지들이 푹푹 쓰러지는 풍경은 을씨년스럽기 짝이 없다. 지난 2003년 휴간된 ‘사회비평’은 결국 유야무야됐으며, 올해 초 휴간을 표명한 ‘당대비평’, 인문학 분야의 격월간지 ‘비평’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 중이라지만 앞날이 잘 안보이고 있다. 개마고원에서 발행하던 ‘인물과 사상’, 진중권·김규항 등의 문화평론가들을 길러냈던 ‘아웃사이더’도 몇 달 전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일반에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학문후속세대들이 바통을 넘겨받으면서 아카데미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생산해내던 ‘모색’, 사회현상 분석과 비판을 모토로 세웠던 ‘스모그’, 우리말로 철학하기를 표방하며 ‘철학사전’도 펴내고 활발히 활동했던 ‘사이’ 등이 어느 사이엔가 주변에서 사라져 버렸다.

궁금한 것은 이런 현상을 문제시하고 설명하려는 지식인들의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휴간·종간을 선언한 당자들은 “출판사 경영상의 이유가 가장 크다”고 어려움을 토로한다. 인문사회 출판의 전반적 퇴조현상과 맞물려서 그 위에 가장 가냘프게 얹혀져 있던 계간지들이 먼저 철퇴를 맞는다는 것쯤은 이해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진단이 거기에만 그쳐서는 곤란할 것으로 보인다. 학술무크지·계간지들이 줄줄이 몰락하는 것에는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고, 담론계에 던지는 메시지와 향후 변화에 대한 불길한 예감도 스며있다.

먼저 한국 지식인들의 의제 설정 능력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사회와 철학’을 발행했던 이학사의 강동권 대표는 “처음엔 테마를 잡는 게 괜찮았는데, 호를 거듭할수록 박사를 막 받은 필진들이 글을 쓰고, 테마설정에도 밀도가 떨어지면서 학계에 이슈를 던지지 못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같은 출판사에서 펴내는 ‘이론과 사회’라는 학술지와 대비되는 점이 있다. 강 대표는 “학회에서 출판비를 일부 감당하고, 교정도 철저하게 보면서 글의 성격도 ‘이론’으로 특화돼 잘 운영된다”라고 말한다.

‘의제 설정’과 ‘주문생산’의 비효율성에 대한 지적이다. 이에 대해서는 ‘당대비평’ 편집주간을 맡았던 김진호 씨도 동감한다. 그는 “어떤 기획을 해도 그것이 짜임새 있게 갖춰지기에는 한국사회의 지식의 풀이 굉장히 얇다”라고 털어놓는다. 매체환경의 변화속도를 지식인들이 따라잡지 못한 측면도 크다고 김 씨는 지적한다. 가령 ‘당대비평’을 비롯 ‘인물과 사상’, ‘아웃사이더’ 등의 잡지들이 했던 우리 사회에 대한 도발적인 문제제기를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매체들이 다 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터넷매체가 하지 못하는 ‘성찰성’을 강화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점도 언급했다.

하지만 ‘매체의 변화’라는 외부의 적을 내세운 선형적 구조 속에서만 문제를 진단하는 것은 진부한 느낌마저 든다. 얼마 전 인문사회 출판인들의 모임인 ‘인사회’ 홈페이지에 역사책을 주로 내는 서해문집의 영업담당인 김일신 씨가 글을 올렸다. 이 글은 시장에 책임을 돌리기보다 인문사회 출판이 ‘담론의 부재’에 시달리고 있음을 고백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김 씨의 말인즉, 장하준 교수의 책을 펴낸 출판사의 임모 부장이 최근 출판의 어려움이 담론의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는 점을 설명했다는 것. “임모는 한국경제에 대해 눈치 안보고 자기 할 말을 한 장하준式 담론이 어필한 거 아니겠냐”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김 씨는 “담론이 부재하는 시대에 최소한의 정리된 형태의 문제의식들은 통한다”라고 결론내린다.

어쩌면 계간지 시장이야말로 ‘정리된 문제의식’을 모색해봐야 할 시기가 아닌가 한다. 갖가지 이론으로 세련되게 고양된 담론의 모더니즘 시대를 끝내고, 우리 시대 지식인들의 문제, 지식인과 대중의 문제, 삶과 이론의 관계 등을 투박하게 고민하는 리얼리즘 시대를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계간지와 단행본 출판의 관계에 대한 숙고도 필요한 시대가 왔다. 80년대에 무크지는 출판의 첨병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 단행본 시장의 성장을 일궈낸 이들 잡지의 역할을 단순히 역사적 소임으로만 돌릴 게 아니라, 한국출판의 속성과 연결시켜 생각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즉, 잡지들은 잔잔한 호수에 던져놓은 일종의 ‘밑밥’ 같은 것으로, 그 밑밥을 보고 몰려든 고기들을 낚는 게 단행본 출판이 아닐까 하는 느낌은 과연 공상일까. 

‘모색’의 향방을 모색 중인 오창은 중앙대 강사(문학평론가)는 계간지 침체를 성찰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지점을 제공한다. ‘모색’이라는 잡지는 ‘대학원생들의 참여’라는 데에 정체성이 있다. 최근 들어 이 시스템에 문제가 생겼다. 해외유학, 휴학 등으로 인재들의 품귀현상이 벌어지며, 어떻게 엮어서 인원수를 채우더라도 잡지 발간에 적합할 만큼 오리엔테이션을 시키는 데 너무 많은 공력이 든다는 것. 그래서 얼마 전 15명의 지식인들이 모여 토론을 했는데, “젊은 학자들의 안정적 연구공간을 먼저 마련하자”는 것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다고 한다. 이것은 현재 유행하는 대중지향적 단체들과는 좀 다르다는 게 오 씨의 설명인데, “뜻을 지닌 학자들이 서로 친숙한 학술적 정체성을 갖는 게 중요하다”는 게 그의 강조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작가와 비평’ 편집주간인 문학평론가 최강민 씨는 “올 12월쯤 ‘비평과전망’ 동인들과 함께 연합하여 격월로 콜로키움을 진행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당대 비평에서 문제가 될 만한 것을 본격적으로 토론하고 지면에 반영하는 것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판매부수도 좀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대책회의의 결과다.

이런 움직임을 보면 계간지들의 침체에는 ‘모래알 편집위원 체제’의 영향도 꽤 큰 것 같다. 상시적 공간의 不在를 뼈저리게 느낀다는 점이 그걸 말해준다. 계간지를 내는 일을 ‘副業’ 정도로 여겨서는 몰락의 징후를 보이는 학술담론을 부활시키기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이와 연관하여 지적할 것은 “독자들을 직접 챙기지 못하는 매체는 망할 수밖에 없다”는 진리가 계간지들의 위기를 진단하는 고급담론에는 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대비평’이 휴간되었을 때 가진 한 인터뷰에서 김진호 편집위원은 “문부식 前 주간이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 문제가 되어 많은 사람이 배신감을 느끼고 떨어져나갔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번의 전화통화에서 김 씨는 “떨어져나간 만큼 신규독자들도 확보됐는데, 그들이 1년후 정기구독을 갱신할 시점에서 관리할만한 여력을 출판사나 편집위원 측에서 공히 갖지 못했다”라고 털어놓는다.

과연 이것이 인력만의 문제일까. 혹시 오늘날 학문하는 데 있어서 가장 긴요한 ‘정성’이나 ‘헌신’의 문제는 아닐까. 김정란 상지대 교수(불문학)는 최근 칼럼에서 “대중은 이미 인터넷을 통하여 엄청난 양의 ‘수평적’ 정보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수평적 정보들은 그 자체로는 중요한 지속적 역할을 하지 못하고 지적 회로의 하수구로 휩쓸려 들어간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고만고만한 수평성의 표면을 갈라놓는 ‘성찰의 송곳’일 것이다. 그런 역할은 인터넷도 신문도 방송도 일반 단행본도 학술대회도 해줄 수 없다. 언론은 유명인사의 자극적인 한마디에 관심을 가질 뿐이며, 학문이나 이론의 전 단계에서 우리의 삶을 성찰적 품위로 다듬어줄 지식담론의 매체는 여전히 일정한 텀을 갖고 발행되는 독립계간지에 있다. 자본과 권력에 종속되지 않는 言路의 자율성이야말로 지식인들이 꿈꿔야 할 가장 우선적인 보금자리가 아닐까.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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