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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통일공학을 넘어 실천으로
[특별기고] 통일공학을 넘어 실천으로
  • 교수신문
  • 승인 2001.06.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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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두율 독일 뮌스터대·철학
‘분단시대’의 극복에 관한 반성은 있는가


‘6·15남북공동선언’이 발표된지도 한해가 지났다. 이 날을 기념하는 여러가지 행사가 남과 북에서 각각 열렸고, 금강산에서는 남과 북이 직접 만나 그 날의 감격을 살리고 새로운 결의를 다졌다는 소식도 들린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볼 때 분위기가 너무나도 ‘차분해서’ 일년전의 감동과 열광이 다 어디로 살아졌는가하는 물음을 지울 수 없다. 왜 이렇게 사태가 변했는지에 대한 질문에 남북사회가 여전히 안고 있는 문제와 부시행정부 출범에 따른 국제환경의 변화 때문이라고들 대답한다. 이러한 질문과 관련해서 나는 우선 ‘분단’과 이의 극복에 대해서 본질적인 반성이 있어야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해본다.

감동과 열광의 증발

어떤 사회적 현상을 설명하는 철학적 또는 사회과학적 사유가 근거하는 인식론적인 바탕은 사실 다양하다. 또 이들 사이에 상호배제적인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있다. 사회현상으로서 ‘분단’문제도 마찬가지이다. ‘분단’을 하나의 ‘체제’ 또는 ‘구조’로서 볼 수밖에 없지 않느냐에 대해서 ‘분단’은 하나의 역사적인 사건이고 따라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행위주체의 목적지향성을 스스로 안고 있다는 인식론적인 접근사이에는 사실 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자연현상과는 달리 관찰자의 입장을 사회현상으로부터 애초부터 분리시킬 수 없는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하기 위해서 막스 베버는 ‘가치로부터의 자유’를 강조했고, 칼 만하임은 ‘존재구속’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지닐 수 있는 지식계급의 역할에 특별한 주목을 돌린 ‘지식사회학’의 길을 개척했다. ‘사회체제’의 밖에 관찰자가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안에서 사회를 설명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背理(Paradoxie)’일 수밖에 없다고 독일의 사회학자 루만(N. Luhmann)은 이야기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는 전통적인 철학이나 사회과학이 전제하고있는 ‘주체’나 ‘주관’과 같은 개념들의 유용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개념들이 결국에는 낭만적인 또는 盲動的인 정치우선주의적인 사고와 행동을 낳았다고 보고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회체제’는 ‘환경’이 지니는 복잡성에 끊임없이 조응하면서 지속적으로 자기생산을 하고있는 여러 요소들의 구조로서 파악하고 있다.

이러한 ‘체제이론적’인 사고방식이 오늘 날 구미의 철학과 사회과학을 지배하고 있는 배경에는 분명히 큰 시대적 흐름이 있다. ‘현실사회주의’의 붕괴, ‘역사의 종언’, ‘탈현대’, ‘탈정치’ 등의 개념들이 이러한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은 사실 남한사회에도 강하게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개인의 풍족한 물질적 삶이 최우선적인 관심사이지, ‘통일’은 너무나도 먼 이야기로 밖에 들리지 않기 때문에 “우리도 어려운데 북에 퍼주기만 하느냐”식의 비난이 설득력을 얻고 있는 현실도 이를 단적으로 말하여 주고 있다.

“체제이론은 보수주의 그 자체”

물론 ‘분단’의 극복이나 ‘통일’이라는 말이 그동안 너무나도 정치적으로 악용돼왔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없다고 하지만, 당위성과 규범적인 성격을 완전히 거세시켜버린 ‘분단’의 극복이나 ‘통일’은 일종의 ‘공학(Technologie)’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통일공학’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어떤 국내학자의 논문을 나는 기억한다.

위에서 말한 루만의 ‘체제이론’이 ‘사회이론’이 아니라 ‘사회공학’이라고까지 비판한 하버마스는 ‘실천(Praxis)’을 근본적으로 ‘공학’과 같은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루만은 하버마스의 이러한 비판을 과거의 이상에 과도하게 경도하고있는 ‘해방에 묶인 보수(emanzipationskonservativ)’ 또는 ‘이념에 집착하는 보수(ideenkonservativ)’라고 응수하고 있다. 그러나 ‘실천’을 ‘계몽’이나 ‘해방’이라는 일종의 ‘혁명적인 악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이론 자체를 또 이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있는 ‘실천’을 오로지 기능적 수단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체제이론’의 인식관심은 ‘이미 성립된 것’을 그대로 지키려는 ‘보수주의’ 그 자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분단’의 극복과 통일문제와 관련해서 ‘체제이론적’ 접근이 사실 더 설득력을 얻고 있는 현실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나도 일방적으로, 때로는 무의식적으로까지 반복되고 강조되고 있는 이와 같은 현실을 우리는 한번 곱씹어 보아야한다. ‘6.15 남북공동선언’의 첫 항목으로 등장하고 있는 ‘자주적’ 통일원칙에 나는 특별한 주목을 돌린다. 물론 점점 좁아지는 ‘지구촌’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민족통일이기에 우리는 국제환경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래도 남북사회의 성원들이 주체적인 실천이 담을 수 있는 무게를 더 의식했다면 정말 귀중한 꿈을 현실 안에서도 지금쯤은 볼 수 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나는 토로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의식 때문에 ‘분단구조’나 ‘분단체제’ 대신에 앞으로는 ‘분단시대’라는 말을 사용하겠다고 얼마 전에 있었던 한 ‘화상강연’속에서 나는 강조했다. ‘분단’을 보는 역사의식, 나아가 이에 관한 주체적인 인식관심을 더 분명히 들어내 보이려고 한 이러한 ‘분단시대’라는 용어는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단어를 다시 강조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민족통일을 우리 스스로가 이룰 수 없다는 체념이 너무나 무겁게 드리우고 있는 현실을 의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망가진 기계부속들을 배합하고 연결해서 이를 움직이게 만든 지향성 없는 조형예술을 개척한 탱겔리(J.Tinguely, 1925~91)의 ‘정신병의 찬사가 ‘분단체제’나 ‘분단구조’를 표현한다면, 군중이 무엇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이응노의 ‘群舞’는 ‘분단시대’를 그리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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