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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9] 안달루시아의 집시, 할렘의 흑인, 농촌의 여성을 위해 노래한 로르카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9] 안달루시아의 집시, 할렘의 흑인, 농촌의 여성을 위해 노래한 로르카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2.21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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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는 어떤 이론이나 정당을 추종하지 않았지만 당대 스페인 민중의 정서를 작품만이 아니라 스페인적인 삶과 죽음으로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사진=위키미디어

알함브라 궁전은 한국에서도 유명하다. 그곳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까지 제작될 정도다. 알함브라 궁전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곳으로 관광중에는 집시들의 플라맹고도 반드시 등장한다. 그러나 그 궁전 아래 집시들이 사는 알바이신의 빈곤을 아는 한국인은 거의 없다.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Federico Garcia Lorca, 1898~1936)가 ‘무어인의 처절한 절규’라고 묘사한 알바이신은 지금도 빈곤하지만 로르카가 그라나다에서 태어나 살해당했던 20세기 초반에는 더욱더 빈곤했다. 그의 38년 생애는 내전에 이르는 20세기 초 스페인을 상징한다. 그는 어떤 이론이나 정당을 추종하지 않았지만 당대 스페인 민중의 정서를 작품만이 아니라 스페인적인 삶과 죽음으로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 시인이자 극작가였다. 

부농 지주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로르카는 그라나다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행복하게 살았다. 그러나 호화로운 알함브라 궁전 아래 알바이신의 빈곤을 목격한 뒤 그의 삶은 통째로 바뀌었다. 그라나다 대학을 중퇴하고 마드리드 대학으로 떠난 그는 부모가 바란 법학을 포기하고 문학으로 바꾸어 시인으로 성공하지만 알바이신의 고통을 잊지 못했다.

 

‘뉴욕의 시인’ 속 로르카의 절규

호화로운 알함브라 궁전 아래 알바이신의 빈곤을 목격한 뒤 그의 삶은 통째로 바뀌었다. 사진=위키미디어

1918년에 나온 첫 시집 『인상과 풍경』은 제목과 달리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하고 그 앞의 소위 98세대 영향 속에 있었다. 그의 독창성은 1920년대 후반에 쓴 『집시 로만세 가요집』에서 나타났다. 자유를 억압하는 공격적이고 난폭한 현실에 고뇌하는 로르카의 진면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높은 난간을 향해/ 이미 두 친구가 오르고 있다./ 핏자국을 남기며/ 눈물자국을 남기며.”는 그 절창의 한 구절이다. 

로르카는 1929년 뉴욕으로 가서 1930년 봄까지 머무르며 그의 사후에 출판된 『뉴욕의 시인』에 포함된 시들을 썼는데 그 대부분은 현대 도시를 마주보는 시인의 고통스러운 절규로 흘러넘쳤다.
“뉴욕의 여명은/ 건물 모퉁이 사이에서/ 고뇌의 수선화를 찾으며/ 거대한 층계들로 신음한다./ 여명이 오지만 아무도 그 여명을 입으로 맞이하지 않는다./ 그곳에는 아침도, 꿈꿀 수 있는 희망도 없기에/ 때로 성난 벌떼 같은 동전들이/ 귀를 후벼 파고 버려진 아이들을 집어삼킨다.” 

1930년 뉴욕은 대공황의 여파로 자본에 의해 찌들대로 찌든 타락의 전당이었다. “이제 코브라들은 마지막 층에서 휘파람을 불리라./ 이제 쐐기풀은 마당과 테라스에서 몸을 떨리라./ 이제 주식거래소는 이끼가 된 피라미드가 되리라./ 이제 소총 뒤에 칡덩굴이 오리라./ 아주 빨리, 아주 빨리, 아주 빨리./ 아, 월 스트리트여!” 
로르카는 할렘가에서 신음하는 흑인들을 동정하면서 시의 주제로 다루기도 하였다.      

8년간의 군사독재정권이 독재자의 죽음으로 끝나고 1931년 선거에서 토지개혁을 주장한 공화파가 승리하여 제2공화정이 들어섰지만 봉건영주와 교회의 저항으로 공화정이 위기에 처하자 로르카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농민 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시를 무기로 대학생 극단을 조직하여 전국을 돌며 농민들의 마음을 얻는 것에 집중했다. 1934년 로르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언제나 아무것도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것도 없는 평안함조차도 없는 사람들의 편인 것이다. … 이 세상에는 이제 인간의 힘이 아니라 세상의 힘이 싸운다. 사람들은 나로 하여금 그 싸움의 결과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데, 여기에 당신의 고통과 당신의 희생이 있고, 여기에 예감되지만 알려지지 않은 미래를 향한 전환의 고통과 함께 모두를 위한 정의가 있다. 그리고 나는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싸운다.” 

 

로르카가 노래한 스페인 여성의 삶

로르카는 안달루시아의 집시들과 할렘의 흑인들을 신화적으로 미화하여 그의 문학 속에서 다루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소외되고, 제대로 사회적 위치를 찾지 못했던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수많은 희곡을 썼다. 사진은 스페인의 집시들이다. 사진=위키미디어

로르카는 문학을 통해 그가 살던 사회에서 소외받았던 인간들을 주인공으로 상정해 인간과 사회를 엮어나갔다. 안달루시아의 집시들과 할렘의 흑인들을 신화적으로 미화하여 그의 문학 속에서 다루었고, 무엇보다도 당시 소외되고, 제대로 사회적 위치를 찾지 못했던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수많은 희곡을 썼다. 세르반테스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로르카는 당시 유럽 사회에서 뒤처진 스페인을 비판하면서 도시보다는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그리고, 평범한 시골 여인들을 통하여, 인간의 고귀한 자유정신을 아름답게 추구하면서, 스페인 민중들에게 계몽주의 정신을 불어 넣었다. 

그의 초창기 희곡작품인 「마리아나 삐네다」, 「까치뽀라의 인형극」 등에서 로르카는 평범한 여인들을 통하여 자유를 추구하는 정신을 강하게 그려내었다. 로르카는 대표 걸작인 여인을 주제로 하는 3부작 「피의 혼례」, 「예르마」,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을 통해 스페인의 전통적인 농촌을 배경으로 하여, 시골 여인들이 겪는 비극적인 삶을 작품화하면서, 인간의 자유정신을 나타내려고 하였다. 「피의 혼례」에서는 결혼식 날 옛 연인과 도망친 신부로 인해 피로 물드는 결혼식을 격정적이고도 시적으로 그려, 인간의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의 힘에 의해 파국을 맞이하는 비극의 정수를 보여었다. 「예르마」에서는 아이를 갖지 못하고 전통적인 명예 관념 때문에 좌절하는 여인을 그렸고, 「베르나르다 알바의 집」에서는 인간 본성에 대한 억압이 빚은 비극을 그리며 자유에 대한 열망을 보여주었다.

1936년 인민전선의 인민정부가 출범하지만 파시스트 세력은 여전히 저항했다. 8월 19일, 무장 해제를 당한 로르카와 수천 명의 민중들은 알파카르 숲속으로 끌려가 잔인하게 학살당한다. 그는 학살 직전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개념은 운 좋게도 유치한 것이 아니라면 잔인한 것이다. 그 어떤 진실한 사람도 예술을 위한 예술, 순수예술이라고 하는 보잘 것 없는 것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극적인 시대에 예술가는 대중과 함께 울고 웃어야 한다. … 세상과 내 자신의 육체, 내 자신의 생각에서 솟아 나오는 지속적인 불의와 인간의 고통은 내 집이 별들로 이주하는 것을 방해한다.”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참여문학을 추구한 로르카는 죽었지만, 그의 시혼은 이어졌다. 그가 총살당한 뒤 안토니오 마차도는 「그라나드의 범죄」라는 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그가 총살대들 사이로 먼 길을 걸어/ 아직 별이 지지 않은 새벽의/ 차가운 들판으로/ 나가는 것이 보였다./ 새벽빛이 모습을 드러낼 때/ 그들은 페데리코를 죽였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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