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과학사 연구는,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최근 들어 과학의 정치성과 역사성이 강조되면서, 지난 시기 한국과학의 틀이 어떻게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관심 또한 열렬히 높아지는 추세다. 이런 학계의 연구흐름을 이끄는 학회가 바로 한국과학사학회(회장 황상익 서울대 교수)다. 올 봄 경성제국대학이 과학에 기여한 바가 컸는지 여부와 통일벼 평가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학술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올 가을에도 풍성하면서도 새로운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천기대요 © |
그 다음 관심을 끈 것은 한국 현대사의 과학적 주제들을 다룬 제3부였다. 여기서는 ‘1970년대 KIST 연구활동에 대한 평가’, ‘한국 초기 원자력 사업의 추동력’, ‘빨랫줄 글꼴의 변신-공병우타자기(1948)에서 한결체(2005)까지’ 등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었다.
여기서 ‘KIST’와 ‘원자력연구소’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서 감상할 수 있다. 문만용 서울대 강사는 그동안 KIST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었다고 지적한다. 1982년 세계은행이 펴낸 보고서에는 “KIST의 사업수주비율이 전체 기업의 연구예산 5백58억 중 23억으로 4%에 불과해 산업연계가 약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779억 중 48억인 6.7%”라고 바로잡는다. 이어 KIST가 산업연계가 약한 것은, 연구결과를 기업이 활용하도록 하는 데에 서툴렀으며, 그 이유는 대부분 학계 출신이 KIST에 포진해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대해서도 문 씨는 반론을 편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제관회사에서 10년 경력을 쌓은 남준우, 미국의 화학회사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안영옥 등도 KIST라는 계약연구기관에서 해결해야 할 다양한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즉, KIST 연구결과의 활용도가 높지 않았던 것은 당시 기업들이 자체적인 연구능력을 갖지 않은채 거의 전적으로 KIST에 의존했던 것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게 문 씨의 주장이다. 나아가 그는 KIST의 역사적 역할은 그런 가시적 성과보다, “짧은 기간에 기업들로 하여금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연구자들에게는 실제 활용 가능한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에서 찾아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윤세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 |
▲3벌식 타자기 © |
김태호 숭실대 강사의 ‘빨랫줄 글꼴의 변신’은 ‘기술의 역사’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으로, 탈네모 글꼴의 등장이 글꼴 디자이너들의 변신의 노력에 있다기보다는 공병우가 개발한 3벌식 타자기로 대표되는 ‘기술적 한계’가 낳은 의외의 결과라는 점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1948년 개발된 공병우타자기는 받침에 쓰는 자모와 초성에 쓰이는 자모를 구별하지 않고 통일시켜서, 타자속도를 경이롭게 끌어올린 발명품인데, 그러다보니 글씨꼴을 배려할 수 없어 받침이 없는 글자가 있는 글자에 비해 땅딸막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1969년 정부의 ‘표준행정’이 공병우타자기를 시장에서 퇴출시키자 공병우타자기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재야 한글운동을 형성하고, 이것이 ‘한글과컴퓨터’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맞물리면서 현재의 다양한 글꼴을 만들어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이번 학술대회엔 이외에도 과학행정의 근간을 세운 물리학자 박철재, 세포유전학에서 후학을 길러내고 그 제자들을 그 후의 동물분류학, 동물생리학, 미생물학, 분자생물학, 초파리유전학 등의 대가로 키워낸 강영선, 통일벼의 허문회,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네트워크 등 초창기 과학자들에 대한 전기적 연구도 다량 발표되었다. 석사과정생들의 포스터발표도 많이 제출돼 튼튼한 학문후속세대들의 연구가 확인되었는데, ‘과학기술정책의 선구자 최형섭’, ‘올덴버그의 초기 철학회보 발간 의도’, ‘권력과 경쟁: 후원의 상징성은 과학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등이 눈길을 끌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초성의 자음과 종성의 자음 각각에게 따라 키를 배정하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