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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ST, 역사적으로 底평가”…‘글꼴의 사회학’ 등 주제 다양
“KIST, 역사적으로 底평가”…‘글꼴의 사회학’ 등 주제 다양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1.06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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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한국과학사학회 추계학술대회(10.21~22)

한국에서 과학사 연구는, 특히 대한민국 건국 이후에 대한 연구는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딛고 있다. 최근 들어 과학의 정치성과 역사성이 강조되면서, 지난 시기 한국과학의 틀이 어떻게 조성되었는가에 대한 관심 또한 열렬히 높아지는 추세다. 이런 학계의 연구흐름을 이끄는 학회가 바로 한국과학사학회(회장 황상익 서울대 교수)다. 올 봄 경성제국대학이 과학에 기여한 바가 컸는지 여부와 통일벼 평가를 둘러싼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학술대회를 개최한 데 이어, 올 가을에도 풍성하면서도 새로운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천기대요 ©
이번 학술대회에서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제주도 지방의 풍습 중의 하나인 ‘新舊間’이 기후적인 요인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을 고찰한 윤용택 제주대 교수의 발표였다. ‘신구간’은 1월 26일에서 2월 2일까지의 기간으로 “新舊歲官이 교대하는 과도기”로 제주에서는 이사, 집수리, 변소개축 등을 이 때 몰아서 해왔다. 문제는 조선시대 도참서로 널리 읽힌 ‘천기대요’에 이 부분이 언급돼 있음에도 ‘신구간’이 지켜진 것은 전국에서 제주가 유일했다는 점. 학계에서는 그 이유를 육지와 떨어진 제주도 사람들이 훨씬 더 무속적인 기질이 강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왔는데, 윤 교수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며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신구간’이 大寒이라 이사하기에 부적절한 시기였는데 비해, 제주도는 기후가 온화해 이 시기에도 영상기온을 유지했기 때문에 풍습을 이어나가기에 용이했다”고 주장했다. 俗信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 묵은철을 정리하고 새철을 준비할 수 있었던 유일한 지역이 바로 제주였다고 말한다.

그 다음 관심을 끈 것은 한국 현대사의 과학적 주제들을 다룬 제3부였다. 여기서는 ‘1970년대 KIST 연구활동에 대한 평가’, ‘한국 초기 원자력 사업의 추동력’, ‘빨랫줄 글꼴의 변신-공병우타자기(1948)에서 한결체(2005)까지’ 등 흥미로운 논문이 발표되었다.

여기서 ‘KIST’와 ‘원자력연구소’에 대한 두 논문을 묶어서 감상할 수 있다. 문만용 서울대 강사는 그동안 KIST의 역할이 지나치게 과소평가되었다고 지적한다. 1982년 세계은행이 펴낸 보고서에는 “KIST의 사업수주비율이 전체 기업의 연구예산 5백58억 중 23억으로 4%에 불과해 산업연계가 약했다”고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며 “779억 중 48억인 6.7%”라고 바로잡는다. 이어 KIST가 산업연계가 약한 것은, 연구결과를 기업이 활용하도록 하는 데에 서툴렀으며, 그 이유는 대부분 학계 출신이 KIST에 포진해있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에 대해서도 문 씨는 반론을 편다. 그에 따르면 “미국의 제관회사에서 10년 경력을 쌓은 남준우, 미국의 화학회사에서 오랜 경험을 쌓은 안영옥 등도 KIST라는 계약연구기관에서 해결해야 할 다양한 기술적 요구에 부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즉, KIST 연구결과의 활용도가 높지 않았던 것은 당시 기업들이 자체적인 연구능력을 갖지 않은채 거의 전적으로 KIST에 의존했던 것에 그 원인이 있었다는 게 문 씨의 주장이다. 나아가 그는 KIST의 역사적 역할은 그런 가시적 성과보다, “짧은 기간에 기업들로 하여금 연구개발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하고, 연구자들에게는 실제 활용 가능한 연구를 하게 만들었다는 점” 등에서 찾아야 한다고 결론내렸다.

▲윤세원. 현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으로 있다. ©
1959년 대통령 직속으로 우람하게 출범한 원자력연구소가 1966년 KIST에게 제1위의 지위를 내줄 때까지 있었던 갈등과 분란을 다룬 김성준 한국외대 강사는 원자력으로 집중된 초창기 한국 과학기반에 대해 분석적 시선을 던진다. 당시 연구소에는 미국유학 물리학 박사들이 포진했는데, 이들과 행정인력 사이에 마찰이 만만찮게 커서 과학자들이 집단사직서를 쓰기도 했는데, 기본적으로 국가·사회와 과학자들 사이에 원자력에 대한 인식이 달랐다는 점을 지적한다. 당시 북한이 전력송출을 끊는 등 에너지 비상을 겪은 한국은 당장 전기로 바뀌어지는 원자력의 가시적 개발성과를 요구했는데, 이들 과학자들은 원자력연구소를 서울대 근처에 지어 서로 연계를 가지며 기초과학의 초석을 다지는 ‘기지’로 만들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 씨는 당시 원자력 사업을 주도했던 윤세원과의 인터뷰 등 자료추적을 통해 이 과정을 면밀히 복원하고 있는데, 새로운 시각도 하나 덧붙인다. 즉, 당시 과학자들이 순수과학연구에만 몰두해 ‘과학을 위한 원자력’을 표방했던 배경에는 미국이 “한국에서 ‘경제적 부흥을 위한 원자력’이 미국의 통제를 넘어 너무 빨리 진행되는 것을 경계했으며, ‘안보를 위한 원자력’을 한국인들의 손에 넘길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3벌식 타자기 ©

김태호 숭실대 강사의 ‘빨랫줄 글꼴의 변신’은 ‘기술의 역사’라는 말에 정확히 부합하는 것으로, 탈네모 글꼴의 등장이 글꼴 디자이너들의 변신의 노력에 있다기보다는 공병우가 개발한 3벌식 타자기로 대표되는 ‘기술적 한계’가 낳은 의외의 결과라는 점을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다. 1948년 개발된 공병우타자기는 받침에 쓰는 자모와 초성에 쓰이는 자모를 구별하지 않고 통일시켜서, 타자속도를 경이롭게 끌어올린 발명품인데, 그러다보니 글씨꼴을 배려할 수 없어 받침이 없는 글자가 있는 글자에 비해 땅딸막하게 되어버렸다는 것. 그러나 1969년 정부의 ‘표준행정’이 공병우타자기를 시장에서 퇴출시키자 공병우타자기에 이미 익숙해진 사람들이 재야 한글운동을 형성하고, 이것이 ‘한글과컴퓨터’라는 소프트웨어의 개발과 맞물리면서 현재의 다양한 글꼴을 만들어냈다는 게 김 씨의 주장이다.

이번 학술대회엔 이외에도 과학행정의 근간을 세운 물리학자 박철재, 세포유전학에서 후학을 길러내고 그 제자들을 그 후의 동물분류학, 동물생리학, 미생물학, 분자생물학, 초파리유전학 등의 대가로 키워낸 강영선, 통일벼의 허문회, 이호왕의 유행성출혈열 연구네트워크 등 초창기 과학자들에 대한 전기적 연구도 다량 발표되었다. 석사과정생들의 포스터발표도 많이 제출돼 튼튼한 학문후속세대들의 연구가 확인되었는데, ‘과학기술정책의 선구자 최형섭’, ‘올덴버그의 초기 철학회보 발간 의도’, ‘권력과 경쟁: 후원의 상징성은 과학을 어떻게 바꿔놓았는가’ 등이 눈길을 끌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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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우스 2005-11-08 02:27:33
공병우 3벌 타자기는
초성의 자음과 종성의 자음 각각에게 따라 키를 배정하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