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05:00 (금)
[디자인 파노라마] 미드 센추리 모던은 왜 대세가 됐는가
[디자인 파노라마] 미드 센추리 모던은 왜 대세가 됐는가
  • 오창섭
  • 승인 2022.02.25 09: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22 디자인 파노라마 ⑥_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인테리어 플랫폼 ‘오늘의 집’에는 이미 ‘미드 센추리 모던’을 키워드로 한 수많은 인테리어 소품을 볼 수 있다. 출처=오늘의집

마르셀 브로이어의 강관 의자, 임스 부부의 가구들, 바르셀로나 의자, 프리츠 한센의 제품들, 아르떼미데 조명…. 최근 이런 사물들, 혹은 유사한 스타일의 사물들이 ‘미드 센추리 모던(Mid-century modern)’이라는 이름으로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늘의 집’이나 ‘인스타그램’에는 미드 센추리 모던을 키워드로 하는 이미지들이 넘쳐나고 있다.

미드 센추리 모던은 20세기 중반,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1960년대 말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디자인 경향을 가리킨다. 세계대전은 결과적으로 유럽에서 싹튼 근대 디자인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건축 영역에서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르 코르뷔지에와 미스 반 데어 로에가 선보인 콘크리트와 철, 유리를 주재료로 하는 근대 건축은 이전과 다른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실내 공간을 만들어나갔다. 그 공간을 채웠던 게 바로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와 소품들이었다.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은 기능적인 바우하우스 스타일을 수용하면서도 색의 사용이나 형태에 있어 유연한 태도를 드러냈다. 재료에서도 철과 유리뿐만 아니라, 곡면 합판, 유리 섬유, 플라스틱 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201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도시재생 주목

한국에서 미드 센추리 모던은 2010년대 중반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최근의 코로나 상황은 그 움직임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유행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다양한 이야기가 가능하겠지만, 2010년대 초부터 본격화된 도시재생의 움직임이야말로 특히 주목할 만하다. 도시재생은 새로운 기능 부여와 같은 자극을 통해 낙후한 지역을 활력이 넘치는 곳으로 만들려는 기획이었다. 그런데 건축의 차원에서 도시재생의 내용을 보면, 오래된 건물들을 허물지 않고 재사용하는 건물재생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수명이 다한 발전소나 공공건물을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바꾸려는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동네나 마을 차원에서의 재생 움직임은 2010년에 이르러 본격화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본격화된 도시재생은 건물재생의 움직임을 공공공간뿐만 아니라 상업공간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이러한 흐름은 자연스럽게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유행으로 이어졌다. 재생을 위해 건물 골조 이외의 것을 걷어낸 공간은 사실 폐허에 가까웠다.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는 그러한 모습을 디자인의 요소로 활용했다. 거푸집 흔적이 있는 콘크리트 벽과 타일들, 천정의 낡은 구조물 등은 이전 시대였다면 그럴듯한 재료들로 가려졌을 것이다. 물론 디자인의 이름으로 말이다.

하지만 당시 힙스터들의 낭만적 시선은 오래된 건물이 보여주는 폐허 이미지를 매력적으로 인식했다. 이런 감각이 유행하는데 굳이 비용을 들여가며 그것들을 가릴 이유는 없었다. 이것이 디자인에 끼친 영향은 분명했다. 이제 소품이나 가구들이 분위기 연출의 중요한 수단으로 자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공간 디자인에서 소품이나 가구의 중요성이 커짐에 따라 디자이너들은 그것들의 선택에 더욱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가구나 소품의 선택 기준은 무엇이었을까? 우선 기능적이어야 했다. 거친 콘크리트 벽이나 기능을 위해 추가된 유리, 혹은 철과 같은 근대적 재료와도 어울리는 것이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을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을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을 만큼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이어야 했다. 이러한 조건들이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의 가구와 소품들로 시선을 향하게 했다. 미드 센추리 모던 스타일의 가구와 소품들은 기능적이면서도 현대적이고, 세련되면서도 이국적이었으며, 오래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것처럼 보였다. 그에 따라 중고품을 포함해 많은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와 소품들이 수입되어 배치됐다. 이렇게 사용되기 시작한 제품 중에는 디자인사를 장식했던 유명 디자이너의 손을 거친 것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역시 미드 센추리 모던에 대한 관심과 매력도를 높이는 역할을 했다.

유행은 유행을 증폭시킨다. 인더스트리얼 인테리어의 유행으로 직간접적으로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나 소품을 경험한 이들은 그것들을 자신의 주거 공간으로 끌고 들어오며 유행을 이어갔다. 이러한 흐름은 신혼부부와 같은 상대적으로 젊은 층들이 이끌었다. 수납을 위한 가구는 물론이고 냉장고, 세탁기, TV 등과 같은 가전제품들이 벽과 일체화된 최근 아파트 실내에서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와 조명은 공간에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로 이해되었다. 그 결과 바우하우스 스타일 제품뿐 아니라 임스 체어나 프리츠 한센, 놀, 루이스 폴센 등의 제품들을 활용해 실내를 구성하는 흐름이 강하게 형성됐다.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은 비싸다. 하지만 비싸다는 사실이 그것의 확산을 저해하는 요인은 되지 못했다. 욕망이란 것은 금지와 방해 속에서 부풀어 오른다. 다른 말로 하면, 다가가기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 대상에 대한 욕망의 강도 역시 더 강해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욕망의 메커니즘 속에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들이 자리하면서 비싼 가격은 오히려 욕망을 자극하는 힘으로 작동했다. 어쩌면 그 비싼 가격으로 인해 그것을 소유한 이들은 자신이 ‘아무나’의 영역에 자리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환상을 가질 수 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아무나가 되지 않으려는 몸짓들이 모여 그것을 유행시켰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는 어떤 역설이 자리한다. 아무나가 되지 않으려는 몸짓으로 인해 아무나가 되어버리는 역설 말이다.

 

조명 하나, 의자 하나와 같은 ‘작은 사치’

미드 센추리 모던 가구나 조명은 디자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것들이 많다. 문화 영역에서의 고급과 저급이 구분되지 않는 시대에 이렇게 그럴듯한 서사를 가지고 있는 사물들은 취향의 고급스러움을 증명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디자인을 자신과 동일시함으로써 취향과 스토리를 소비하는 의식 있는 존재임을 상연한다고나 할까? 만일 그렇다면 그 몸짓은 누구를 향하는 것일까? 다시 말해 누구에게 자신의 우월함을 증명하려는 것일까? 당연히 타인들에게 향하는 것이지만, 반드시 그런 것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게, 자기 안에 있는 또 다른 자아를 향해 상연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맥락에서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은 1인 가구와도 일정 부분 관련된 것일 수 있다. 1인 가구의 대표적인 주거 형태는 원룸이다. 2010년 이전까지만 해도 청춘들에게 원룸은 인생에서 잠시 머무는 곳이었다. 그 지점에서 인생은 졸업과 취업, 결혼, 출산 등으로 이어지는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었고, 주거 공간 역시 원룸에서 다세대주택이나 아파트로, 작은 아파트에서 좀 더 큰 아파트로 변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취업은 물론이고 결혼, 출산 등이 어려워지면서, 게다가 부동산 가격이 급등하면서 1인 가구를 형성하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원룸은 잠시 머무는 곳이 아니라, 계속 살아야 하는 곳으로 그 성격이 바뀌고 있다.

이렇게 공간의 성격과 의미가 바뀜에 따라 집을 꾸미려는 의지가 강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새삼 공간에 애착이 생긴 것일까? 어쩌면 공간에 정을 붙이려는 의지가 작동한 것일 수도 있다. 그 결과 원룸은 임시적인 것이 아닌 항구적인 것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의 소비도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작은 사치’의 형태를 띠었다. 조명 하나, 의자 하나와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그런 움직임에도 애착과 의지가 자리한다. 그것은 단순히 공간에 대한 애착이나 의지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애착이고, 자신을 향한 격려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설령 그것이 비싼 가구나 조명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의 소유를 통해 자신이 잘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확인받을 수 있다면 얇은 지갑이라도 기꺼이 한 번쯤은 열 수 있는 것이다.

‘인스타그램’과 ‘오늘의 집’, 그리고 ‘당근마켓’은 그들이 활동하는 무대다. 타인과 자신을 향한 존재 확인의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 말이다. 그 공연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뿌리침이 아니라, 오히려 뿌리치지 못함이다. 무엇 하나 확실한 것이 없는 이 시대에 존재의 해상도를 높일 수 있다는 미드 센추리 모던 제품의 속삭임을 그들이 어떻게 뿌리칠 수 있겠는가?

 

오창섭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

디자인연구자로 한국디자인학회 최우수 논문상(2013)을 수상했으며, 문화역서울284에서 열린 전시 「안녕, 낯선 사람」(2017)와 DDP디자인뮤지엄의 「행복의 기호들」(2020) 전시를 기획했다. 저서로 『내 곁의 키치』, 『이것은 의자가 아니다: 메타디자인을 찾아서』, 『인공낙원을 거닐다』, 『9가지 키워드로 읽는 디자인』, 『근대의 역습』, 『우리는 너희가 아니며, 너희는 우리가 아니다』 등이 있다. 현재 건국대 예술디자인대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메타디자인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