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03:50 (토)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이정의 ‘풍죽’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이정의 ‘풍죽’
  • 이예성 한중연
  • 승인 2005.10.3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시회 풍경 1_‘蘭竹大展’(간송미술관, 10. 16~30)을 보고

매년 딱 두 번 엄선된 고미술을 내놓는 간송미술관의 올가을 전시는 사군자 중에서 난과 대나무를 모아 놓은 ‘난죽대전’이다. 난은 깊은 산중에서도 은은한 향기를 멀리 퍼뜨리고 대나무는 추운 겨울을 꿋꿋하게 견디며 푸른 잎을 계속 유지한다. 이런 특성은 그것이 갖고 있는 자태의 아름다움과 함께 덕과 학식을 갖춘 군자의 인품에 비유돼 예로부터 많은 문인과 화가들에 의해 작품의 소재로 사랑받아왔다.
우리나라에서도 기록을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왕공사대부 사이에서 묵란, 묵매, 묵죽이 널리 그려졌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화원을 뽑는 시험 과목에 대나무 그림이 들어 있었으며 사대부들이 묵란, 묵죽을 그렸다는 기록은 많이 있으나 전해지는 작품이 극히 드물어 실질적으로 작품이 남아 있는 것은 조선중기부터라고 하겠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조선 고유의 묵죽화 양식을 만들어 낸 이정으로부터 유덕장, 강세황, 신위 그리고 김정희, 조희룡, 민영익에 이르기까지 당대 묵죽과 묵란으로 이름을 떨친 대가들의 작품을 한눈에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다.


조선 묵죽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이정의 묵죽은 원·명대 묵죽양식의 장단점을 취해  완성된 것으로 명료한 구도와 강인한 필치, 사생과 사의, 서예성과 회화성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특징이다. 살짝 스치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예리한 필치를 보이는 댓잎과 바람을 잔뜩 등지고 이를 견뎌내고 있는 대나무를 그린 ‘풍죽’은 이러한 그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는데 마치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군자의 꿋꿋하고 의연한 모습을 보는 듯하다. 대나무에 있어 氣勢를 강조했던 이정의 높은 기량과 품격을 엿볼 수 있는 걸작이라 하겠다.


이정의 계보를 이으면서 18세기 묵죽화가로 이름을 떨쳤던 유덕장은 대나무의 상징성과 더불어 운치를 표현하고자 했던 작가다. 그가 79세에 그렸던 ‘설죽’은 녹색으로 채색한 설죽이란 점에서 매우 이례적이다. “대나무는 설죽을 그리기가 어려운데 특히 착색은 더욱 그렇다. 이는 한번 색을 칠하면 천연의 자취가 줄어들기 때문이다”라고 했던 이용휴도 유덕장의 ‘설죽’에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겨울 추운 눈 속에서 푸른 잎을 유지하고 있는 녹색 대나무를 그려 선비들이 사랑했던 대나무의 속성과 군자의 강한 지조와 절개를 드러내는 상징성을 동시에 표현한 이 작품은 유덕장이 조선 3대 묵죽화가로 꼽히는 이유를 짐작케 한다.


조선시대 묵죽화는 18세기 이후 남종화풍의 영향으로 寫生보다 寫意가 좀 더 강조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심사정, 강세황, 이인상 등 일련의 문인화가들이 남긴 작품은 이러한 경향을 잘 보여준다. ‘표현연화첩’중의 하나인 강세황의 ‘청죽함로’는 부드럽고 단아한 필치로 바위를 배경으로 몇 그루의 대나무를 그린 것이다. 서예의 필선과 아취, 격조를 강조했던 그의 대나무는 단정한 풍모와 너그러운 인품을 가진 군자를 보는 듯하다.


사대부화가 뿐 아니라 직업화가 역시 종종 사군자를 그렸다. ‘난죽대전’에는 비문인화가의 작품도 다수 전시돼 사군자가 문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대담한 구도와 자유분방한 필치를 보이는 김홍도의 ‘신죽함로’는 그가 모든 화목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 당대 최고의 화원이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며, 좁고 긴 화폭에 맞추어 난엽을 길게 뽑아낸 독특한 형태의 임희지 ‘묵란’은 난에 있어서는 강세황을 지나쳤다는 평가가 결코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문자향과 서권기가 어느 때보다 강조된 19세기에는 사의가 더욱 강조됐는데, 신위는 이 시기 청경해 탈속한 경지와 화가의 인품, 필력을 강조하는 사의문인묵죽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화가다. 서예의 필선을 연상시키는 길고 가는 줄기와 아름다운 댓잎이 조화를 이룬 ‘청죽’과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뻗어 올라간 줄기, 유연하게 휘어진 가지 그리고 새롭고 건강하게 시작되는 생명을 상징하는 여린 잎들을 묘사한 ‘신죽’은 서법이 강조되고 형사를 배제한 사의묵죽화를 지향했던 신위의 의도가 잘 표현된 작품이다. 아마도 신위가  묵죽을 통해 표현하고자했던 것은 군자의 아름다운 덕이 아니었을까.


엄격한 감식안으로 19세기 화단을 이끌었던 김정희의 ‘난맹첩’은 추사체와 함께 추사가 구현하고자 했던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작품이다. 추사체의 서법을 사용한 운필과 파격적인 구도, 난과 글씨와 인장의 절묘한 조화, 그로 인한 공간의 안배 등 추사 묵란의 요체와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이렇게 쟁쟁한 문인화가들의 작품 속에 수줍은 듯 다소곳이 끼어 있는 소미의 ‘묵란’과 원향의 ‘묵란’은 오랜만에 만나는 여류화가의 작품이다. 기생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 이들의 작품은 필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간일하고 단아해 정숙한 미인을 보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민영익이 상해 망명시절에 그린 ‘묵란’은 화면 중간부터 아래로 사선을 이루며 몇 무더기의 난을 그린 것으로서 농묵으로 비수나 굴곡 없이 그리는 芸楣蘭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데 아래쪽 두 폭의 난은 뿌리를 다 드러낸 露根蘭이다. 사군자가 원래 상징성을 통해 문인들의 심회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그려졌던 것을 생각하면 뿌리 내릴 곳이 없어진 망명객의 한이 노근란에 그대로 투영된 것을 알 수 있어 더욱 애틋한 느낌이다.


이번 전시는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마음을 비우고 은은한 묵향에 흠뻑 취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 다만 작품을 시대나 소재 혹은 일정한 양식에 따라 전시하지 않아 조선시대 난죽화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감상하기엔 다소 어려움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이예성 / 한국학중앙연구원·미술사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현재 심사정 회화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후기 회화에 있어서 예찬양식의 수용’ 등의 논문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