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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논쟁] 동양담론의 성격-김성환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지상논쟁] 동양담론의 성격-김성환 교수의 반론에 답한다
  • 김진석 인하대
  • 승인 2001.06.28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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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8 19:53:07
김진석 교수가 지난호에 실린 김성환 교수의 반론(본지 204호)에 대한 반박문을 기고해왔다. 동양담론에 대한 김교수의 문제제기로 시작된 이 논쟁은 동양담론의 지배논리적 성격, 동양담론의 현실적 유효성, 노자의 해체적 해석 등을 핵심화두로 하여 전개되고 있다. 유가와 도가의 현대적 독해가 활발해지고 있는 요즘, 이 논쟁은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전통, 그리고 전통의 현대적 재구성에 대한 의미있는 성찰의 기회를 제공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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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인하대·철학

지적 토론과 논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상대의 글을 제대로 읽어야 할 터인데, 김성환 교수는 유감스럽게도 필자 강연의 중요 주제는 건너뛰면서 감정적인 비난을 일삼고 있다. 우선 마치 내가 “서양문화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거의 모든 나라에서 꽃이 피었다”고 말하면서 서양적 잣대를 옹호한 것처럼 글을 악의적으로 왜곡한 김 교수는 사과해야 마땅하다. 나는 오히려 거꾸로, 이제까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서양문화를 구성했던 그리스 근원주의도 추상적 동양주의와 마찬가지로 의심되어야 한다고 했다. 이집트 및 ‘소아시아’에서 유입된 ‘비서양적’ 유산을 배제한 서양적 가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서양 전통을 비판하는 작업들을 지속적으로 수행한 것이 이제까지 본인 작업의 한 축이었다. 물론 그런 비판조차도 서양 역사를 일정하게 반복하는 한계를 가진다고 처음부터 지적했다. 그렇기에 본인은 서양적 해체 중심주의에서도 벗어나, 새로운 한국어 개념들(‘탈’ 형이상학, 초월에서 ‘匍越’로, 소외에서 ‘疎內’로)을 생산하며 현실을 분석하고 서술하려고 했다.

전공분야에서 누가 더 공부를 많이 했느냐고 따지는 유아적 콤플렉스라니! 자신의 분야에 대한 타자의 비판을 전혀 수용하지 않으려는 기득권 집단의 잘못된 권위 아닌가. 중요한 것은 충분히 명확하게 표현된 글과 텍스트에 근거하여 토론하고 논쟁하는 것이다. ‘서양’전공자이니 동양고전해석이 불충분할 것이라는 치졸한 편견을 남용할 필요 없다. 서양뿐 아니라 동양의 전통을 폐쇄적으로 구축하는 문화권력은, 전공을 넘어서, 지적돼야 한다. 김용옥에 대한 필자의 다른 글도 어느 해석이 옳으냐 혹은 누가 자격이 있느냐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문화 상징의 비-시대적 권력화를 문제삼은 것이다. 또 서양문명이 역사적으로 패권주의적 성향을 띤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서양식’으로는 아무 비판도 할 수 없다는 말도 비약이다. 동아시아 고전들도 현대 언어로 번역돼야 하지 않는가.

텍스트 근거한 타전공자 비판 수용해야

다만 필자의 글 중에 한가지 본의 아닌 실수가 있다. 유가적 전통 중에서 정명론을 비롯한 수양론 부분만 짧게 언급한 것은, 강연 원고가 주로 노자 쪽에 집중되었기 때문이었다. 본인도 유가에서 형이상학적인 측면(상대적으로 부정적인)과 구별되는 사회적 실천의 측면(상대적으로 중립적이거나 긍정적인)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 또 관습적 정명론만을 강조했다면서 유가에 노자를 대립시키고, 후자를 해체적-무위자연적인 사유라고 해석하는 데 반대한다(몇 년 전 해체론적 노자 해석에 대한 논평에서도 그 의견을 표명했었다). 다만 당시에 의미를 가졌던 유가의 실천적 가치를 지금 회복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말꼬리를 만드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김 교수가 전혀 건드리지 않은 논점을 다시 정리하겠다. 노자를 동양의 해체론으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것은 첫째, 맥락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해석조차 서구적 편향이라고 볼 수도 있다. 둘째, ‘노자’가 말하는 상징적이고 추상적인 개념들은 문명의 복잡한 문제를 해체적으로 비판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물 같은 부드러움’ ‘여성성’ ‘무위’는 흔히 말해지는 것처럼 ‘해체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데리다 류의 해체론을 절대적으로 옹호하자는 것도 아니다. 한편으로 데리다가 서양 중심적 사유를 니체적 전복 방식에 따라 해체적으로 연장한 성과는 인정하더라도, 다른 한편으로 해체론은 지나치게 텍스트 내부에서 움직인다. 그런 해체론은 자신의 텍스트를 풍부하게 보존한 서양에서만 작동 가능할 뿐이며, 유산이 상실된 한국 같은 주변부에서는 그대로 적용될 수 없을 것이다.

필자는 인문학에서 가능한 한 과거 연구와 현재/미래 연구를 구분할 것을 제안해왔지만, 그렇다고 동아시아의 인문적 유산인 유가와 노자의 가치를 부정하자는 게 아니다. 그 두 연구 방향을 혼돈하지 말자는 것이다. 생태 위기의 와중에서 근본주의적으로 자연을 총체적-추상적으로 신비화하는 경우가 있는데, 비슷한 오류를 노자에 대하여 저지르지 말자는 것이다. 또한 사회적 실천으로서 엄연히 필요한 유위의 맥락을 초월하여 무위를 숭배하는 일을 경계하자는 것이다. 양식 있는 동양학 연구자라면 동의하리라고 믿는다. 자연에 대한 지배는 역사적으로 사실이지만, 자연에 대한 문명의 관계는 인간사회 안에서 이미 존재하는 많은 지배질서(성·계급·인종·종교에 따른)와의 연관 속에서 다뤄야지, 독립된 추상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이런 점에서 단순히 데카르트 이래의 이성이 자연을 지배했다고 하는 말도 관념론에 빠지기 쉽다는 것이다.

철학, 추상적 관념성에서 벗어나야

또 서양의 기술이 자연을 지배했다고 말하는 것도 역설적으로 기술결정론에 빠지기 쉬운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기술문명을 비판하면서 하이데거에 의존하는데, 그의 기술론이 서양사유를 비판한 성과는 인정되더라도, 오늘 되돌아보면 서구의 존재론적 역사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 형이상학의 궤적 위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술 발전의 악영향도 사실이지만, 그 과정 역시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점차 최고의 가치가 된 개인의 정치경제적 자유, 합리주의적 통제의 자장 속에서 실현된 수명연장·인구증가·복지정책 등과 함께 판단되어야 한다. 기술의 지배는 통제와 자유가 동시에 강화된 ‘민주주의적 역설’의 차원에서 성찰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철학은 자신의 추상적 관념성을 먼저 비판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철학의 위기’를 자초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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