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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일본, 서양의 문법적 관점에서 자신의 언어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일본, 서양의 문법적 관점에서 자신의 언어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 최익현
  • 승인 2022.01.25 09: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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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동아시아 사랑방 포럼 학술대회 ‘번역과 메이지 일본의 사상’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학회장 강상규 방송대 교수)와 동아시아 사랑방 포럼이 주최한 제15회 동아시아 사랑방 포럼 학술대회가 지난 1월 15일 오후 2시부터 5시 30분까지 줌(Zoom)으로 진행됐다. ‘번역과 메이지 일본의 사상’을 주제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시민강좌’의 일환이다.

이날 학술대회에는 김현 연세대 연구원(한국정치사상)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어떻게 읽을 것인가?」, 송경호 연세대 정치학과 BK21 연구단 박사후연구원(동양정치사상)의 「서양사정에서 서양의 개념들이 어떻게 번역됐는가?」,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동양정치사상)의 「서양을 번역하다―19세기 동아시아 번역자들의 고뇌」, 홍철기 서강대 글로컬사회문화연구소 전임연구원(서양정치사상)의 「정치사상의 번역, 번역의 정치사상」 등의 논문이 발표됐다. 

발표자와 토론자의 면면을 보면, 이들에게는 공통항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균관대출판부가 ‘동아시아문명총서’로 간행한 『서양을 번역하다』와 『번역된 근대』, 그리고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서양사정(西洋事情)』의 저자이거나 번역자라는 점이다. 

후쿠자와 유키치, ‘문명의 정치’ 겨냥했다

발표자들은 메이지 시대 일본 지성들이 자신의 나라와 문화적 지평에 존재하지 않았던 근대 서구 정치사상 용어들을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모국어로 ‘명명’하고 이를 번역해냈는지를 추적했다. 자유, 철학, 이성, 사회 등 오늘날 일반적으로 쓰이고 있는 ‘개념어’의 등장과 정착까지 훑어보려는 시도였다. 이번 학술대회가 개념사적 접근으로 읽히는 대목이다. 

후쿠자와 유키치의 『서양사정』 초편(1866)의 집필의도를 살핀 김현은 근대 서구를 발견한 후쿠자와 유키치라는 한 인물이 자신들에게 결핍된 의미의 지평을 어떻게 근대 서구의 정치사상 산물에서 가져오는지를 짚어냈다. 

서양사정 초편-속표지-일본 게이오기주쿠대 도서관 디지털컬렉션 센터
후쿠자와 유키치 초상(1891)

발표자에 따르면, 후쿠자와 유키치가 근대 서구 정치사상의 산물을 일본어로 가져오고자 했던 배경에는 ‘문명의 정치’에 대한 그의 열망이 작동한다. 특히 발표자는 후쿠자와 유키치의 지적 궤적이 보인 이중성을 ‘근대 문명의 이중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번역과 메이지 일본의 사상’이란 주제에 좀더 접근한 발표는 송경호의 몫이었다. 그는 ‘서양의 개념’들이 어떻게 일본어로 번역되는가를 살폈는데, 후쿠자와 유키치가 당시 근대 서구의 정치용어들을 자국의 언어로 옮겨온 것에 대해 “아마도 몇 년 뒤에는 그 사람들이 모두 원문을 이해하게 되어 이 책과 같은 것들은 틀림없이 창 아래 빈 술병처럼 낡은 종이에 불과하게 될 것”이라고 스스로 밝힌 부분을 주목했다. 

송경호는 특정 시기, 특히 언어와 대응하는 객관적 사물과 세계를 갖지 못한, 의미 지평이 부재하는 한 문화권에서 특정 문화권의 산물을 가져오는 것을 전제로 『서양사정』에 접근할 것을 권유했다. 

19세기 일본 번역가의 고뇌와 용어의 정착

김현과 송경호가 『서양사정』에 나타나는 근대 서구의 정치적 용어들의 19세기적 정착과, 그런 용어 선택의 고뇌를 조명했다면, 소진형과 홍철기는 정치사상이란 의미지평에서 번역자의 고투를 짚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서양사정 번역서

더글라스 하울랜드 위스콘신대(밀워키) 교수의 책 『서양을 번역하다』의 공번역자인 소진형은 ‘19세기 동아시아 번역자들의 고뇌’를 콕 찍어 소환했다. 

소진형은 번역가들의 문제의식과 번역 대상 선정을 파고들면서,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표출해냈다. 이 문제의식은 무엇을, 왜, 어떻게, 누가 번역했는가로 요약된다. 발표자에 따르면, 여기서 19세기 일본의 번역가들은 ‘번역’에서 늘 중요한 부분인, ‘충실성’(원전에 충실한 번역)과 ‘가독성’(독자들의 이해를 돕는 번역) 사이에서 고투했으며, 전자는 텍스트의 성공적인 재생산에, 후자는 새로운 텍스트 만들기로 이어졌고, 번역어의 표준화와 형식화에 대한 정치한 고민이 축적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할 만 한 점은, 소진형이 지적했듯, 19세기 메이지 일본이 번역 과정에서 서양의 문법적 관점에서 자신의 언어를 사유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대목은 향후 좀더 많은 논의가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 행위 자체가 일종의 정치 행위라고 말하는 홍철기의 발표도 흥미로웠다. 그의 말처럼 ‘정치에 관한 모든 담론은 번역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메이지 일본이 자신들에게서 전혀 찾아낼 수 없었던, ‘자유’ ‘개인’ ‘권리’ ‘의무’ ‘사회’ 따위의 용어들을 자신의 것으로 호명하려고 했을 때, 이 호명 행위 자체가 상호 경쟁하는 정치적 갈등으로 스며들게 된다. 

시민강좌 성격 돋보이나 ‘친절한 안내’ 아쉬워

강상규 교수는 이번 학술대회에 대해 “매우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우리가 지금 서있는 시점 역시 매우 거대한 전환기적 상황이라는 것을 고려할 때, 19세기 번역을 둘러싼 고투의 과정을 추체험하는 것은 21세기의 전환기의 상황에서 지혜로운 선택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리고 또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생각해보게 한다”라고 의미를 매겼다.

‘줌’으로 시민강좌를 진행한 점은 코로나19 국면에서 돋보였지만, 참여자들의 이해를 돕는 좀더 친절하고 섬세한 배려가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번역과 개념사를 연계한 국내 학계의 작업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메이지 일본이 수행한 다양한 번역 양상까지 짚어줬다면 시민강좌 온라인 참가자자들의 이해를 높였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에서 접속한 김봉진 키타큐수대 명예교수(동양정치사상)는 “개념사 문제를 짚은 의미 있는 학술대회였다. 하나 더 문제를 추가하자면, 번역어가 일본에서 번역될 때 거기에 대응하는 전통적인 용어와 배경이 말소, 변질, 곡해, 왜곡되는 과정을 겪었다. 우리가 빌려서 쓰는 일본화된 번역어의 문제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지적해 눈길을 끌었다. 

이번 학술대회는 비록 줌으로 진행됐지만, 4시간 가까이 실시간 접속자가 80여 명을 유지하는 등, 온라인 참여자들의 뜨거운 관심을 모았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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