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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조강연 : 대한제국, 전면 재평가해야
기조강연 : 대한제국, 전면 재평가해야
  •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
  • 승인 2005.10.24 0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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民國 세우고 경제토대 확립

▲한영우 한림대 특임교수, 한국사 ©
대한제국을 전면적으로 재평가할 단계에 이르렀다.

대한제국의 성립은 近, 遠因이 합쳐져 나타난 정치적 혁명이다. 近因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강압적인 갑오경장, 1895년의 을미사변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려는 전국민적 애국심과 고종의 결단으로 세워진 ‘반일자주독립’과 ‘民國’ 건설을 목표로 한 근대국가건설이다. 그 과정에 각계각층의 칭제요청 상소가 쇄도하여 ‘국민적 지지’와 ‘여론수렴과정’이라는 절차를 거쳤다. 이로써  대한제국 탄생의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다. 1868년 일본의 메이지유신보다도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절차와 방법을 택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遠因은 호란 이후로 동양문화의 정통이 명나라에서 끊어지고 조선으로 넘어왔다는 자긍심이 바탕이 되어 영정조에는 성인군주=탕평군주=황제군주상이 형성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양반국가’를 지양하여 백성을 넓게 포용하는 ‘민국’을 세우려는 노력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성인군주=탕평군주=황제군주=민국이념은 19세기 세도정치기에 후퇴했다가 고종의 등장 이후 다시 부활하여 지속적으로 개혁운동이 추진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東道西器’, ‘舊本新參’에 입각한 주체적 근대화운동이 추진되었고, 그 연장선상에서 대한제국이 탄생한 것이다. 대한제국이 ‘동도’와 ‘구본’을 내세운 것은 이러한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근대와 접목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다.

대한제국은 ‘구본신참’의 원칙을 내걸고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옛것에서 빌어오고, 그밖의 제도는 거의 대부분 근대 서양의 제도를 채용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황제가 정치, 재정, 군사, 외교, 인사 등 전권을 장악하는 황제전제체제를 구축했는데 이는 일본의 침략에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국력결집을 최대로 높이려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갑오경장으로 분리된 ‘민’과 ‘국’을 다시 하나로 묶어 ‘민국’을 재건하려는 목적이 담긴 것이기도 하다.

대한제국의 이같은 정체성을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일본의 실체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당시 일본은 한국과 통상을 원하거나 근대화시키기 위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武力的 幷合’을 목표로 했다. 그것은 8세기에 편찬된 ‘일본서기’에서 ‘한국=일본번국’관을 구축한 이후 18세기의 ‘국학’과 19세기의 ‘정한론’과 ‘大아시아주의’를 거쳐 연면히 내려온 일본의 일관된 대한정책이었다. 그래서 메이지 일본은 항상 무력을 개입시켜 왕실을 위협하고 왕비를 살해했다. 일본을 다른 열강과 똑같은 외세의 하나로 간주하거나, 일본을 우방으로 간주한 급진개화파의 시국인식이 부당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한제국의 목표는 안으로 ‘民國’을 건설하고, 밖으로는 근대적 國際法인 ‘萬國公法’에 바탕을 두어 국제적으로 ‘자주독립적인 中立國’임을 인정받으려 했다. 이는 당시의 국가생존전략으로 합당한 선택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근대국가의 또 하나의 핵심은 식산흥업을 통한 국력신장이다. 이는 자본주의체제와 근대적 회계 및 금융제도, 국가재정수입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를 위해 대한제국은 양전지계사업을 통해 토지의 근대적 소유와 지세수입의 확장을 가져오고, 근대적인 회계제도 도입[1896], 각종 회사설립, 대한천일은행설립, 전환국을 통한 화폐발행, 광산개발. 홍삼전매사업, 기타 잡세 수입의 증가를 도모했다.

이로써 대한제국의 국가수입은 급속히 늘어나 이를 가지고 국방비, 철도, 통신, 건축, 의료 등 근대적 인프라 구축비, 교육비, 황실비용 등에 지출했다. 문제는 이러한 국가수입을 度支部에 모두 위임하지 않고 황실직속기구인 宮內府 산하의 內藏院에 집중시켰다는 것이 지금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대한제국은 국력의 효율적 결집을 위해 황제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했는데, 오직 재정만을 황제로부터 분리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 청일전쟁, 노일전쟁 등으로 재정적 압박을 심하게 받고 있던 일본이 대한제국의 재정을 노리고 있는 상황에서 재정권을 탁지부에 넘긴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기도 했다.

또, 고종은 일본이나 일반 관리들이 알지 못하게 써야 할 많은 ‘비자금’이 필요했다. 반일의병운동을 지원하거나, 국제사회와의 반일외교, 그리고 황제심복세력을 키워야 하는 일이 그것이었다. 일본의 사주를 받아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쿠데타 음모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관리들의 배신이 비일비재하던 상황에서 심복세력의 양성은 무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상과 같은 당시의 특수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국가재정은 탁지부가 관리해야 된다는 원론만을 가지고, 당시의 재정구조를 ‘가산국가체제’니 ‘앙시앙 레짐’이니, ‘봉건적 체제’니, ‘황제가 탐욕스러웠다’느니 하고 비판하는 것은 역사를 총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도적에게 쫓기는 사람을 보고 왜 큰 길로 도망가지 않고 골목길로 가느냐고 비판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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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파 2005-10-25 01:26:53
고려황실은 외가댁 이며(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