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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천재 진단하기
문학 천재 진단하기
  • 최승우
  • 승인 2022.01.18 10: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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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나 시롯키나 지음 | 그린비 | 416쪽

정신의학으로 읽는 러시아의 격변기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그들의 작품은 광기의 산물이었을까?

러시아 사회에서 고골,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는 사회의 목소리이자 시대의 상징이라는 독보적 위상을 지닌다. 또한 러시아 지식인에게 문학비평은 사회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한 통로였고, 이는 정신의학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따라서 정신의학자들은 러시아 작가의 정신 병리에 관한 전기적 기록, 이른바 병적학을 전략적으로 이용했다. 사회 구호 기관에서부터 시작된 러시아의 정신의학은, 대문호들을 진단하려는 정신의학자들의 노력을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아 의학의 한 분야로 제도화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심리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이리나 시롯키나는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의 정신의학사를 소개하며 문학, 정신의학, 이데올로기, 권력이 뒤얽힌 흥미로운 사실들을 들려준다. 이러한 연구는 그 사회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1~2002년 미국 현대언어협회로부터 알도 앤 잔 스카글리오네상(Aldo and Jeanne Scaglione Prize) 슬라브어 문학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다.

정신의학의 위대한 모범이었던 문학
러시아 정신의학자, “문학의 진실”을 갈망하다

이 책은 러시아의 대문호에 대한 정신의학자들의 변화하는 진단을 기술함으로써 광기와 천재성에 관한 의학 논평이 어떻게 이데올로기와 시대의 압력에 편승했는지를 보여 준다. 그렇다고 정신의학자에 대한 시롯키나의 어조가 처음부터 끝까지 비판적인 것은 아니다. 책에서는 1880년부터 1930년대 제국-소비에트로의 격동기에 문학비평을 가장해 자신들의 의학적 권위를 강화했다는 사실 이상으로, 정신의학의 진보와 국가보건 발전에 심혈을 기울인 정신의학자들의 행적과 노력에 방점을 둔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문학은 정치 및 대중적 삶의 유일한 방출구로서 가장 중요한 문화적 자원이었다. 때문에 러시아 정신의학자들은 단지 교양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작업을 정당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문학을 수용했다. 정신의학자들은 인간 정신을 탐구하고 시대의 심리적 불안정성을 반영하는 데에 정신의학의 목적이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정신의학 저서를 기술하는 데 소설 속 인물들이 직접적인 예로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했으며, 순수문학을 그들 직업의 “진정한 교과서”라고 칭했다. 문학에 대한 그들의 글은 실제로 문학비평가의 견해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었다. 러시아의 급진적 비평가들은 후기 고골의 작품을 ‘사회적 현실도피’라고 혹평했는데, 이에 따라 정신의학자들도 전문적 소견을 내놓으며 고골을 정신 질환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20세기 초 러시아 문학비평계에서 예술의 사회적 책임론이 지위를 상실하자 고골에 대한 정신의학적 진단 역시 완전히 바뀌었다. 당시의 정신의학은 문학비평의 도덕 프로젝트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정신의학자들은 고골이 빛을 추구하며 타인의 고통을 덜어주는 자라고 칭송했고, 기존의 정신의학이 작가의 창조적 정신을 간과했다고 비판했다.

문학에 대한 정신의학자들의 존경심은 작가에 대한 정신의학적 진단을 주저하게 만들기도 했다. 가령 도스토옙스키와 동시대를 살았던 의학자들은 그의 질병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렸다. 당시에 뇌전증은 타락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신의학자들은 도스토옙스키의 재능에 경의를 표하며, 그에게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말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중 한 명인 바제노프는 만약 자신이 감히 도스토옙스키의 병을 진단하게 된다면, 과학적 반달리즘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바제노프는 데카당 작가와 시인들을 퇴폐로 규정했지만 존경받는 작가인 도스토옙스키에게 그러한 명칭을 붙이는 것만큼은 피하려 했다. 정신의학자들은 도스토옙스키의 병에 대해 적당한 병명을 붙이기 위해 퇴폐의 개념을 재고해야만 했고, 결국 대안으로 ‘시대에 앞선 사람들’이라는 개념을 발명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적 재능은 퇴폐가 아니라 오히려 인류가 얼마나 큰 혁신을 이루어 냈는지 보여 주는 징표였다.

시대정신을 추구한 정신의학
“퇴폐의 징후”가 “영웅의 고귀함”이 되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정치적 상황을 변화시켰고, 러시아는 사회의 주요 가치로 행동, 영웅주의, 자기희생을 강조했다. 이에 발맞춰 많은 정신의학자가 정신 질환의 의미를 재고하였다. 정신의학자들은 문학작품 속 인물로 환자들을 개념화하고 정신병에 대한 가치 지향적 접근법을 기반으로, 질병의 원인을 환자의 뇌가 아닌 시대정신에서 찾고자 했다. 가령 세르반테스가 창조한 인물인 돈키호테는 이상하지만 활기차고 결단력 있는 병리적 “이타주의자”로 설명되었다. 그들의 병은 자신의 고귀한 의도와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는 무능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들은 병리적이라는 용어의 사용이 결코 이타주의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는다며, 명백한 사회적 의미를 갖는 정신의학을 창조하려 했다.

정신의학자들은 혁명의 시기에 국가 권력과 협력하기도 했다. “예방정신의학”이 그 예인데, 소비에트와 포스트 소비에트 시대의 러시아에서 신경정신의학 진료소와 정신 건강 치료를 위한 기초 교육 기관을 네트워크화하는 계획이었다. 또 실현되지는 못했지만 ‘천재들을 위한 진료소’ 프로젝트가 추진되기도 했다. 이를 계획했던 정신의학자 세갈린은 정신병이 재능을 촉진한다고 믿었으며, 정신 질환이 잘 배양되어야 하고 국가 기관을 통해 보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프로젝트는 모두 대중, 국가, 정신의학적 통제를 특별 기관에 통합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었다. 이러한 프로젝트들은 훗날 지식인 박해를 위해 이용된 기관들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이 책은 188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기간은 정신의학의 직업적 기반이 잡히고, 새로운 심리 치료의 도입, 러시아 혁명을 통한 대전환 등 러시아 정신의학에서의 주된 변화가 이뤄지는 시기이다. 러시아 정신의학사에 대한 해설서가 부재한 가운데 이 책은 정신의학사적으로, 문학사적으로, 그리고 정치사적으로 가장 격변기였던 시기에 대해 폭넓은 정보를 제공해 준다. 러시아 문화에서 문학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고, 이는 정신의학과 문학이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독특한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이 책은 한 분야의 역사를 알기 위해 통섭적 시각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해 주고 있으며, 지식 간의 융합을 통해 역사의 다층적인 면모를 보여 준 훌륭한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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