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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5] 프랑코의 군대가 접근하자, CNT는 아나키즘을 등졌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5] 프랑코의 군대가 접근하자, CNT는 아나키즘을 등졌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1.24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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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당시의 포스트. 사진=위키미디어

1936년 7월 프랑코의 반란 직후 전선 후방에서는 안달루시아, 카탈루냐, 레반테, 아라곤 및 카스티야의 일부에서 농민들이 코뮌 전통에 따라 그들의 땅을 집단화했다. 1937년까지 약 300만 명이 농촌 집단에 살고 있었다. 아라곤에서는 토지의 약 4분의 3이 수백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집단에 의해 관리됐다. 안달루시아는 전쟁 초기 프랑코 군대에 의해 함락되기 전에 많은 마을 코뮌이 설립돼 화폐를 폐지하고 토지를 집단화하는 등 상품의 직접 교환을 시도했다. 그들은 문맹 퇴치와 기초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자유롭고 평등한 빈곤이 이상이었다. 수 세기에 걸친 빈곤과 억압을 경험한 그들은 엄격한 도덕적 열정과 혁명적 이상주의자로 유명해졌다. 

 CNT 신디케이트는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전체 인구의 대중적인 집회로 바뀌었다. 총회에서는 총회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는 행정 위원회를 선출했다. 의사결정은 일상적인 운영을 맡은 촌락 의회와 CNT 위원회 간 합의로 정해졌다. 그들은 '자발적 권위'라는 시스템을 통해 조직을 운영했다. 지역 연맹은 집단을 조정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개인주의자 농민은 원하는 경우 자신의 토지를 경작할 수 있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소비자 티켓이 특별히 인쇄되었다. 대부분의 집단은 필요에 따라 분배한다는 공산주의 목표를 향해 움직였다. 새로운 재배방식이 모색됐고, 노동력이 전쟁으로 인해 줄었어도 전반적으로 농업
생산은 늘어났다.

 

CNT에 대한 페너 브로크웨이의 평가

페너 브로크웨이. 사진=위키미디어
페너 브로크웨이는 반전주의자이며 사회주의 정치가다.  사진=위키미디어

도시에서 CNT는 공급의 놀라운 효율성으로 생산력을 유지했다. 스페인 전체 산업의 70%를 차지하는 카탈루냐에서는 직물과 유리 같은 산업이 더 큰 단위로 재편됐다. 도시 집산화의 중심지였던 바르셀로나에서는 공공 서비스와 산업을 인수하여 대성공을 거두었다. 1936년 7월부터 10월까지 거의 모든 생산과 유통이 노동자의 통제하에 있었다. 1937년 여름까지도 영국 독립노동당의 비서인 페너 브로크웨이(Fenner Brockway)는 스페인 방문 후, CNT가 가장 큰 노동자계급 조직임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그는 CNT가 수행하고 있는 건설적인 혁명 사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노동자가 통제하는 산업과 그들의 성취는, 하나의 영감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스페인의 아나키스트들은 CNT를 통해 지금까지 노동계급이 수행한 가장 큰 건설적인 작업을 하고 있다. 최전선에서 그들은 파시즘과 싸우면서도 전선 뒤에서는 새로운 노동자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그들은 파시즘에 대한 전쟁과 사회혁명의 이행이 불가분의 관계임을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브로크웨이는 '아나키스트들 사이에 존재한 위대한 연대는 지도력에 의존하지 않고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개인에 기인한다'고 말했다. 장기적으로 아나키스트들은 전쟁에 질지 모르지만 토지와 산업의 성공적인 집단화는 가장 오래 지속되고 건설적인 업적으로 남을 것이었다. 물론, 브로크웨이 같은 동정적 시선을 가진 방문객이 보지 못한 난관도 있었다. 서로 다른 기업 간의 관계는 종종 우연이었고 일부 집단은 여전히 사기업인 것처럼 경쟁했다. 임금은 같은 산업 내에서도 어떤 공장이냐에 따라 달랐다. 마드리드 정부가 금 보유고에서 자금을 방출하는 것을 거부했을 때에는 자본과 자재가 부족해지는 일 또한 있었다.

오웰이 본 혁명의 풍경

 

무헤레스 리브레. 사진=위키미디어

1936년 10월 24일에 카탈루냐 총독이 집단화 자체는 인정했으나 그 방식을 노동자 통제가 아닌 정부 통제 방식으로 바꾸는 법령을 공포하면서 혁명은 중단됐다. 이 같은 조치는 그들의 추가 발전을 막았을 뿐만 아니라 100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기업으로 산업의 집적화를 제한했다. 개인 소유 공장에서는 생산을 늘리고 엄격한 규율을 보장하기 위해 노동자 통제 위원회가 설립되었다. 또한, 경제 평의회(최종 산업 당국으로 강제권을 가짐)와 기업 평의회(총독의 '관리자'가 합류한 노동자 대표 포함)라는 기구가 설립되기도 했다.

 둘 다 중앙 정부 통제를 향한 표류를 반영했다. 그러나 전시 경제의 모든 제한에도 불구하고, 오웰은 바르셀로나에서 “‘노동계급이 안장에 앉았던’ 활기찬 도시의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매일의 관계는 변화되었다. 남성은 ‘하이’라는 친숙한 인사로 서로를 불렀다. 여성들은 대규모로 혁명에 참여했다. 전쟁 초기에는 당연히 남성과 함께 싸웠고, 마을 회의에서 공동 의사 결정에 참여했다. 많은 여성들은 법적 결혼을 상호 신뢰와 공동 책임을 기반으로 하는 '자유 결합'으로 대체하기 원했다.

보다 적극적인 페미니스트들은 무헤레스 리브레(Mujeres Libres)라는 아나키즘 그룹을 결성해 여성을 수동성·무지·착취로부터 해방시키고 남성과 여성 간의 협력적 이해를 추구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성 해방은 부분적일 뿐이었다. 여성은 집단 내에서 남성보다 낮은 급여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여성의 일'을 계속했고, 그들은 주로 성별이 아니라 계급의 관점에서 투쟁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가톨릭과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여성은 자신감을 가지고 공개석상에 처음으로 동반 없이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실험은 오래가지 못했다.

 

정부의 요직으로 향한 CNT의 간부들

프랑코 총통.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코 총통. 사진=위키미디어

CNT가 운영하는 공장은 원자재 부족으로 민병대에 필요한 장비를 제공할 수 없었다. 그들은 대다수 노동계급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사회혁명을 발전시키려는 그들의 시도는 프랑코 군대와의 전쟁과 다른 공화파 분파, 특히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으로 저지되었다. 1936년 9월 CNT의 마드리드 신문은 여전히 '사회의 아나키적 변혁은 국가의 폐지와 노동계급에 의한 경제 통제의 결과로서만 일어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0월 말에 프랑코(Franco)의 군대가 마드리드에 접근하자, 바르셀로나의 CNT는 UGT와 통합된 명령, 군사 규율 및 징집의 필요성을 수용하기로 동의했다. 또한 smallSpain 소유주와 기업의 몰수를 중단했다. 바르셀로나의 CNT-FAI에는 전위 엘리트주의가 물씬 풍기는 투사 학교도 세웠다. 아나키즘 지도자들은 정부와의 협력을 통해 사회혁명을 더욱 견제했다. 일부는 1936년 11월 지역 국방회의라는 핑계를 대고 카탈루냐 총독부에 합류했다. CNT 4명의 지도자는 12월에 Largo Caballero('스페인 레닌'으로 알려짐)의 사회주의 정부에서 장관이 되었다.

후안 로페즈(Juan Lopez)와 후안 펜트(Juan Pent')는 각각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FAI 투사 가르시아 올리버(GarciaOliver)는 법무부 장관직을 수락했다. 그는 몇 가지 자유 개혁을 도입했지만 정치범을 위한 노동 수용소를 옹호하기도 햇다. 많은 고뇌 끝에 아나키스트 지식인 Federica Montseny는 항상 '국가는 절대적으로 아무것도 달성할 수 없으며 정부와 권위라는 단어는 개인과 인민의 자유 가능성의 부정을 의미한다‘고 믿었음에도 보건부 장관이 되었다. 

CNT의 강점은 항상 국가와 정치적 음모에 대한 거부에 있었다. 그것은 정당으로부터 독립하고 직접행동을 통한 혁명에 헌신하였다. CNT 일간지인 Solidaridad Obrera는 그 지도자들이 카바예로에 합류하자 '노동계급에 대한 압제를 멈추고, 국가는 더이상 사회를 계급으로 나누는 유기체를 대표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CNT의 지도자들은 외국의 원조를 받고 프랑코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타협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필연적으로 그들은 과거에 그토록 격렬하게 비난했던 바로 그 제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집단화 과정을 점검했다. 그들은 민병대가 군대로 변모하는 것을 감독했다. 법무부 장관 가르시아 올리버는 1937년에 새로운 군사 학교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민군의 장교로서 여러분들은 철의 훈련을 지키고 그것을 당신의 명령하에 있을 부하들에게 부과하라. 그리고 서로간 동지가 되는 게 아닌 그저 우리 군대의 톱니바퀴가 되라.” 이후의 연대와 군사화는 많은 아나키스트 민병대와 노동자들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버넌 리차드(Vernon Richards)는 정부에 대한 FAI와 CNT의 협력을 피할 수 없는 결과라고 설명했다. 엠마 골드만(Emma Goldman)과 같은 다른 사람들은 공화주의 세력을 통합하고 파시즘을 무찌르기 위한 편의로 그것을 변명하려 했다. 

 

전쟁의 혼란속 스페인 아나키즘, 다른 이념에 쓸려가다

국제 여단. 사진=위키미디어
스페인 내전 당시 활동했던 국제 여단. 사진=위키미디어

1937년 중간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아나키스트 실험은 사실상 끝났다. 그것은 겨우 1년 동안 지속됐다.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이 공화주의 대의에 대한 유일한 외국 무기 공급자였기 때문에 영향력을 증가시켰고,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그들은 아나키즘 위원회를 시 정부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민병대는 중앙집권적 지휘 구조를 가진 정통 여단으로 전환되었다. 1936년 12월 16일 <프라우다>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카타루냐에서 트로츠키주의자와 아나키생디칼리즘의 정화가 시작되었다. 그것은 소련에서 수행된 것과 동일한 에너지로 수행될 것이다.” 체카 모델을 기반으로 하는 공산주의자가 통제하는 비밀경찰이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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