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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과 소통의 시대, 성숙도 성장이다
표현과 소통의 시대, 성숙도 성장이다
  • 안재원
  • 승인 2022.01.17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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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 선도 국가란 무엇인가 ④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자신을 드러내는, 
‘표현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지켜지고 보장돼야 한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문복지권’의 문제를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한 나라는 없다. 
인문복지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는 이런 일에 앞장서는 나라가 선도 국가일 것이다.

 

<교수신문> 2022년 1월 3일자에 김월회 선생이 “인문복지라 함은 4차 산업혁명, 지식기반 사회, 평생공부 시대의 본격적인 전개에 따라 평생복지의 차원에서 차별 없이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 권리를 말한다”라고 규정하면서 제기한 ‘인문복지’론에 대한 주석으로 ‘선도국가란 무엇인가’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우선, 김 선생이 제기한 주장의 헌법적인 근거는 헌법 제10조 1항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로 명시된 ‘행복추구권’에서 찾을 수 있다. 김 선생의 ‘인문복지권’은 아마도 매우 빠른 속도로 도래하고 있는 ‘디지털 문명’의 핵심이 ‘인문(Humanitas)’에 있음을 염두에 둔 주장으로 짐작된다.

물론, 디지털 문명의 기본 토대는 자본과 기술이다. 하지만 인류 문명의 한 양태이고 한 방식인 한, 디지털 문명도 결국은 말과 이야기, 텍스트의 형식으로 표현되고 유통되며 지속될 것이기에 그렇다. 말을 통해서 마음을 나누며 언어를 통해서 소통하며 공동체의 갈등과 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 존재로서의 인간 본성은 앞으로도 여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좋든 싫든,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매체 전환은 삶을 구성하는 문명의 바탕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문명의 제도적 기제들, 예컨대 교육, 언론, 방송, 경제, 산업의 구성 방식도 그 근간부터 바뀌고 있다. 이른바 ‘디지털 대전환’이 정치적 구호가 아님은 분명하다. 산업의 경우, 기존의 굴뚝 산업들도 ‘스마트 팩토리’로 변신하고 있다. 1970년대의 ‘새마을 운동’을 능가한다.

경제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암호 화폐, 올원뱅크, 토스, 페이팔, 카카오 뱅크와 같은 디지털 금융의 도약도 위세당당하다. 언론은 또한 어떠한가? 단적으로 하향식 기성언론(Broadcast)과 유튜브를 활용한 상향식 개인언론(Narrowcast)의 경쟁도 점입가경이다. 이른바, 문명의 대전환이라 부를 만 하다. 

‘표현과 소통’의 디지털 문명 시대 

이 거대한 변화는 교육 시장에서도 발견된다. 암기와 이해 중심의 학습 방식은 그 효용이 다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가 이제는 암기와 기억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문명 이전의 시대가 지식의 내장화를 추구했다면, 지금은 지식과 기억이 외장화되고 있다. 정보, 지식, 이야기, 텍스트가 디지털 기술의 도움을 받아서 기억 밖으로 나와 손안에서 노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굳이 교실에서 억지로 외우지 않아도 손가락만으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 김 선생은 이를 ‘지식기반사회’라고 부르는데, 맞는 말이다. 미래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현재이기 때문이다. 

디지털 격차와 양극화를 해소하는 문제는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수 있는 표현 능력과 소통 소양을 길러주는 것으로 확대돼야 한다. 사진=픽사베이

이와 같은 기억의 외장화 과정은 사회적으로 많은 변화와 거대한 전환으로 이어질 것이다. 사실, ‘다음 중 아닌 것을?’을 잘 골라내는 사람이 성공하던 시대는 이미 끝났다. 암기와 이해의 정확성을 묻는 시험 방식에 최적화된 두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 출세하는 시대가 더 이상은 아니기에. 기억의 외장화 덕분이다. 교육에서 암기와 이해의 시대는 이렇게 막을 내리고 있다. 굳이 외우지 않아도 억지로 암기하지 않아도 주어진 문명 기제들이 기억 역할을 대신해주는 지금은, 외장화된 기억들을 이용하고, 그것들을 자신의 말과 글로 지으며 이야기로 엮어서 텍스트로 만들어내는 표현의 시대로 전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가 중등 교육의 교과서들을 압도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지금은 대전환의 시대이다. 교육도 이해(Understanding)가 아닌 표현(Expression)으로 전환되고 있다. 1인 방송시대다. 유튜브 시대다. 김 선생이 주장한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 권리”는 이 대목에서 중요해진다. SNS를 통해서 누구나 세상에 자신을 알리고, 아무나 방송을 만들어 세계와 소통하는 표현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신화가 현실이 되어 버렸다. 오비디우스의 말이다.

세상의 한 가운데, 바다와 대지와 하늘의 중간에, 우주의 삼계(三界)가 서로 만나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는 아무리 멀리 있어도 다 보이고, 열린 귀에는 다 들린다. 이곳에 소문의 여신, 파마(Fama)가 산다. 맨 꼭대기에 거처가 있다. 그곳에는 수많은 입구와 천개의 통로가 있다. 문턱에는 문을 달지 않았으며, 밤낮으로 열어 놓았다. (『변신이야기』 제 12권 39~46행)

지금은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우주의 삼계를 손 안에 쥐고 놀며 부릴 수 있다. 가히 표현의 시대이다. 이런 표현의 시대에는 남의 생각과 말을 외우고 이해하고 전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이해를 넘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을 때, 다시 말해 표현과 소통의 능력을 갖출 때, 비로소 ‘인문복지권’을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격차·양극화 해소 문제도 달라져야

그런데, 이 권리는 잘 외워 시험 잘 보는 사람의 두뇌 능력을 위해서 설정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이미 외장화된 지식과 정보와 이야기를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 디지털 문명 세계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의 문제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하나 묻자.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 능력을 제대로 갖춘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권리도 능력이 있을 때에 누릴 수 있고 지킬 수 있기에 묻는 말이다.

과연, 인문복지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교육과 훈련을 받은 적은 과연 있을까? 5지선다형 문제에 제시된 답을 고르거나 찍는 것 이외에, 즉 주어진 정답을 찾아내는 것 말고는 다른 연습을 해 본적이 그리 많지는 않기에 하는 말이다. 적어도, 대학에 들어와서 인문 교육과 교양 교육을 받기 전에는 말이다. 물론, 대학에서 인문 교육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왈가왈부를 당연히 허용해야 할 것이다. 

사실, 근본적인 물음은 이런 논쟁이 아니라 헌법의 기본권 차원에서 제기된다. 디지털 문명의 시대가 표현과 소통의 시대라면, 그래서 ‘인문복지권’이 중요하다면, 인문 교육을 받지 못한 혹은 소외된 혹은 제도적으로 배제된 사람들의 권리는 어떻게 보장될 수 있는지가 바로 그것이다. 대학 문턱을 밟아보지 못한 사람들의 인문복지권은 누가 지켜줄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그것은 국가이다. 물론, ‘인문복지권’이라는 용어는 헌법에 규정된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문명이 대전환되는 과정에서 소외되고 배제되는 국민들의 권리 보장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의 관점에서 결코 작은 문제는 아니다. 특히 행복추구권의 관점에서 그렇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는 자신을 드러내는, 즉 ‘표현하고 소통하는 과정’에서 지켜지고 보장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세계 어느 나라도 ‘인문복지권’의 문제를 헌법에 명시적으로 규정한 나라는 없다. 그러기에, 이런 일에 앞장서는 나라가, 즉 인문복지에서 소외되거나 배제된 사람들을 돕고 구제하는 정책을 선도적으로 추진하는 나라가 바로 선도국가일 것이다. ‘인문복지’가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하나의 실천 수단이라면,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지켜주고 충족시켜주는 것이 국가의 의무라면 말이다. 

물론, 국가도 그 의무를 방기한 것은 아니다. 디지털 격차와 양극화를 해소하는 문제는 그동안 경제력의 이유에서 컴퓨터나 스마트폰과 같은 통신 장비를 구입할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운 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다름 아닌 “인문을 활용하고 누릴” 수 있는 표현 능력과 소통 소양을 길러주는 것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인문복지권’을 충족시켜주는 것이 국민의 ‘행복추구권’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수단이기에. 

정신의 성숙도 성장의 중요한 모멘텀

특히, 표현과 소통의 시대로 특징되는 디지털 문명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도 그럴 것이 한 개인이 학교, 방송국, 병원, 기업, 종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음이 기술적으로는 이미 가능한 디지털 문명을 바탕으로 하는 표현과 소통의 시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디지털 격차와 양극화는 더욱 커지고 그 폐해도 심각해질 것이다. 산이 높으면 계곡도 깊다. 기술적인 편리함과 경제적인 풍요는 정신의 성숙이 동반하지 않으면 중독과 탐닉으로 이어질 것이다. 음모론은 진영론의 울타리에 갇힌 ‘정의’의 이름으로 광장과 담론의 세계를 횡행할 것이다. 이를 감내하고 해결하는 과정에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이런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해서는 ‘인문복지권’의 보편적인 도입과 확대는 필연적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표현과 소통의 시대에 폭발적으로 증가되고 있는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방안인 정신의 성숙도 성장의 중요한 모멘텀이 될 것이다. 물론, 국가가 정신의 성숙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추격 국가 단계에서는 그럴 수 있다. 특히 교육의 차원에서 그래왔다. 그도 그럴 것이, 수능 시험의 난이도에 따라 춤추는 여론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이기에 하는 말이다. 

하지만, 주어진 답들에서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닌 좋은 물음을 만들어 함께 자신의 답을 찾아가는 교육 방식과 교육 내용으로 바꾸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어쩔 수 없을 것이다. 표현과 소통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표현과 소통의 시대에는, 불공정의 해소가 성장의 한 방식이듯이, 성숙도 성장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서양고전문헌학
서울대에서 언어학 학사와 서양고전학 석사를 했다. 독일 괴팅엔대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역서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인문의 재발견』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  『수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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