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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의 정치
테크놀로지의 정치
  • 최승우
  • 승인 2022.01.11 10: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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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재서노프 지음 | 김명진 옮김 | 창비 | 396쪽

“기술문명이 그저 장미꽃밭은 아니다”
기술진보는 어떤 윤리적 곤경을 낳고 있는가?
기술진보는 분명 매력적이다. 기간산업에 투자해 농업 중심이던 경제를 빠르게 산업화하고 아시아의 4대 신흥공업국 중 하나로 성장한 경험이 있는 한국에서는 기술혁신이 진보의 강력한 동인이라는 믿음이 지배적이다. 기술 자체가 공공선으로 비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일반적인 믿음과는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장미꽃밭 속에서 기술의 부정적 영향을 예견하거나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누구의 임무인가?” 인도 보팔 가스누출참사 이후 수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로 인해 고통받은 사람들이 존재하고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 “우리는 위험을 예측하고 방지하며 책임을 논할 도구와 수단을 가지고 있는가?” 인류는 핵전쟁의 위험을 충분히 알고 있지만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지 않는다. 기술발전이 더 유익하다는 결정론적인 가정 아래 군비경쟁은 심화되고 실재하는 위험 가능성은 도외시된다. “기술발전은 부와 권력의 격차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전세계에서 고속 데이터통신망 기술을 경험할 수 있지만 사람들은 거주 지역과 수입, 교육과 직업에 따라 다른 경험을 한다. 자연히 기술 경험에 따른 사회적 격차 또한 발생한다.(21면)
이렇게 저자는 기술진보의 이면을 비추는 여러 질문을 던지며 우리가 잘 이용한다고 믿은 기술이 실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기술이 우리 삶을 더 낫게 바꿔주리라는 무조건적인 통념에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상대적으

로 새로운 학문 분야인 STS의 관점에서 과학기술이 법, 제도, 그리고 인간의 삶과 만날 때 도출되는 논쟁적 지점들을 면밀하게 살펴보자고 제안한다.(46면)

테크놀로지는 왜 비판적으로 해부되어야 할 정치의 장인가?
2장 ‘위험과 책임’과 3장 ‘재난의 윤리학’에서는 기술혁신이 수반하는 각종 위험과 산업재해의 사례를 살피면서 그것이 어떻게 관리되고 무시되는지 질문한다. 1960년대부터 냉장고, 에어컨 등에 불연성 냉매로 널리 쓰인 염화불화탄소가 오존층을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 이것이 지구 온난화를 야기하는 상당한 위협으로 인식되기까지 15년이 넘는 시간이 더 걸렸고, 국제 공동체는 1989년에야 몬트리올의정서를 발표해 생명을 위협하는 화학물질의 생산을 중단했다. 이런 사례는 과학기술의 발전에 상응하는 위험분석의 특징을 보여준다. 위해의 예측은 정밀하지 못하고 언제나 너무 늦게 이루어지며, 조기경보는 무시되고 관리의 책임은 산만하게 분산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일어난 대표적인 산업재해가 1984년 인도 보팔의 유니언카바이드 화학공장에서 일어난 가스누출참사다. 이 사건은 기술재난이 일어날 경우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들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는 익숙한 각본을 보여주면서도 전문가 예측의 한계·제한적인 보상·구조적 불평등의 원천이라는 산업재해의 세가지 근원적 문제를 여실히 드러냈다. 이런 사건의 재발을 철저히

방지하고 기술을 민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서는 혁신의 가치나 경제적 편익뿐 아니라 지구 환경과 사회정의까지 고려하는 윤리적인 거버넌스가 필요하다.
4장 ‘자연을 다시 만들다’와 5장 ‘인간에 대한 조작’에서는 유전자 조작, 생의료 과학기술의 진보가 제기하는 윤리적·도덕적 질문들을 탐구한다. 예컨대 유전자변형생물체(GMOs)들은 산업현장에서 골치 아픈 거버넌스의 문제를 제기한다. 이것들이 전지구적 규모의 생태계와 인간의 건강에 초래할 결과는 ‘거대한 모름’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대리모가 아기를 출산했을 때 부모의 권리를 둘러싼 난제들이나, 특정 유전 형질을 인공적으로 선택하는 ‘맞춤아기’의 가능성 등 인간의 생명현상을 조작하는 문제는 윤리, 법률, 정책의 차원에서 한층 더 복잡한 쟁점들을 제기한다. ‘줄기세포 시대에 생명은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가?’ ‘생명이 상품이 될 수 있는가?’ 같은 질문들은 법이나 제도 못지않게 정치와 윤리 범주에 속한 문제다.
6장 ‘정보의 거친 첨단’에서는 디지털혁명 속에서 프라이버시와 사상의 자유에 드리워진 위기의 그림자를 묘사한다. 과연 사이버공간은 자유로운 장소인가? 2013년 에드워드 스노든은 미 국가안보국이 영국의 중앙정보부와 협력해 인터넷에서 방대한 양의 정보를 매일 수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대거 폭로했다. 저자는 이를 검토하며 우리의 전자통신은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며, 사실은 엄청난 통제 속에 놓여 있음을 드러낸다. 거대 온라인 상거래 시장의 알고리즘 문제도 거론한다. 소비자들을 잠재적 공략 대상으로 보고 페이스북이 70만명의 익명 이용자에게 동의 절차 없이 수행한 기분 실험을 소개하며 이를 방지하고 검토할 윤리적 장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온라인에서 ‘잊힐 권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제도의 미비함을 인정하고 헌법과 같은 기존의 법적·윤리적 개념틀이 온라인상의 자유와 프라이버시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신장하고 수용할 수 있는 유연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한다.
7장 ‘누구의 지식이고, 누구의 재산인가?’에서는 지식재산권 문제로 눈을 돌린다. 인간의 몸에서 분리한 유전자로 실험을 할 때 그 결과물은 누구의 소유인가? 저자는 생의료 연구에 공헌한 세포주를 제공했음에도 어떠한 댓가도 받지 못했던 헨리에타 랙스의 사례, 유전자를 둘러싼 각종 특허 소송의 사례를 돌아봄으로써 자유로운 과학 탐구의 이상과 지식을 독점해야 한다는 현실적 판단 사이에서 긴장을 유발하는 규칙들을 검토한다. 특히 필수의약품에 대한 특허를 엄격하게 강제함으로써 삶과 죽음을 통제하는 제약산업의 힘을 숙고해야 한다는 저자의 주장은 백신과 치료제를 어떻게 공평하게 분배해야 할지 현명한 판단을 요하는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특히 뼈아프게 와닿는 대목이다.
8장 ‘미래를 되찾다’와 9장 ‘사람을 위한 발명’에서는 과학기술의 통제와 거버넌스의 문제를 탐구한다. 저자는 그간 과학기술의 힘을 관리하는 데 참여한 이들이 주로 기술관료들이나 과학자, 금융가들이었음을 지적한다. 반면 대중들은 무력한 소비자로만 정체화될 뿐 기술진보의 방향에 대해 전혀 발언권을 갖지 못했다. 여기에 민주주의가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다. 저자는 과학기술이 법과 제도만큼이나 사회에 질서를 부여하고 이득과 부담을 분배하는 권력의 통로이자 강력한 거버넌스의 수단임을 강조하며, 기술 통치라는 게임의 규칙을 정하는 힘을 자본과 산업, 그리고 대의제의 정치적 대리인들에게서 환수해 새로운 윤리적·정치적 선택을 가능케 할 의지와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오만의 기술’에서 ‘겸허의 기술’로 나아가기 위하여
코로나19 대유행 속에서 한국은 각종 검사와 접촉자 추적 시스템 덕분에 2021 세계보건안전지수 보고서에서 전염병에 대비가 잘된 상위 10개국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일각에서 우려하는 바와 같이 사태가 종식된 후에도 생체정보 및 추적 장치들이 계속 쓰인다면 어떨까. 국가는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감시와 통제의 주체가 되어 프라이버시와 자율성의 상실을 초래할 수 있다. 이미 우리는 온라인상에서 데이터 수집과 심리적 통제의 대상이 되어버린 스스로를 발견하고 움찔할 때가 있다. 앞으로 기술혁신의 정치적·윤리적 차원들에 주목하지 않는다면 혁신의 댓가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힐지 예상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만든 기술이 인간을 통제하지 못하도록 예비할 수 있을까? 과학기술의 힘으로 평등한 사회를 이룩할 순 없을까? 기술발전이 급속도로 진행되는 만큼 편리하지만 위험할 수 있는 ‘오만의 기술’을 옆으로 밀어두고 평등과 책임, 그리고 생명에 대한 존중을 잊지 않는 ‘겸허의 기술’을 요청해야 할 때다.(7~9면) 책임있고 윤리적인 기술진보의 가능성을 자신의 문제이자 민주주의 정치의 핵심 논제로 삼고자 하는 모든 시민에게 든든한 가이드북이 되어줄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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