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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한국정치사상학회 주최 ‘신화와 정치-동서양 신화의 정치사상사적 해석’
[학술대회] 한국정치사상학회 주최 ‘신화와 정치-동서양 신화의 정치사상사적 해석’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1.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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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5 15:53:17
엘리아데는 신화를 ‘신성한 역사’라고 했다. 조셉 캠벨은 “신화는 삶의 경험이며 인간에게 내면으로 돌아가는 길을 가르쳐준다”고 썼다. 신화를 “과학의 시초이며, 종교와 철학의 본체이자 역사이전의 역사”라고 규정한 J.F.비얼레인도 있다. 표현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신화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공유한다. 신화가 태초의 사건이나 자연·사회현상의 기원과 질서를 설명하고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이야기한다고 보는 점이다.

‘물질성’과 ‘영원성’

물론 이들이 신화를 역사 자체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들에게 신화는 어디까지나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단순한 허구의 이야기는 아니다. 신화는 경험세계와는 다른 질서를 갖는 또 다른 세계와 인간의 관계를 표상한다고 보는 까닭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이 말하는 신화는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와도 유사한 구조를 지닌다. 요컨대 이데올로기가 “인간이 그들의 세계와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의 표현”이라면 신화란 “초월적 세계와 맺고 있는 상상적 관계의 표현”인 셈이다. 결국 이들이 볼 때 이데올로기가 그러하듯 신화 역시 ‘물질성’을 지니며, 이데올로기가 ‘영원’하듯 신화 역시 그렇다. 이들의 견해는 신화가 그것의 ‘비합리성’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인간의 삶에 무시 못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70년대 이후 국내에서도 신화에 대한 연구는 간헐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서구에 비해 ‘초보적인’ 수준이랄 수밖에 없는 신화의 ‘의미론적 분석’ 차원에 머물러 있었고 연구자층 또한 얇았다. 연구자들 대부분이 종교학이나 문학비평 전공자들로 한정돼 있었다. 90년대 후반 이후 다소 형편이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神話素 분석을 통해 텍스트의 의미론적 구조를 탐구하는 ‘신화비평’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다는 평이 지배적이다. 이러한 가운데 정치학계 일각에서 동서양 신화를 정치사상적으로 해석하려는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어 관심을 모은다.

지난 16일 서강대 다산관에서는 ‘신화와 정치’를 주제로 한국정치사상학회(회장 이종은 교수)가 주최한 연례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의 취지는 단순한 ‘신화해석’을 넘어 정치적 삶이라는 컨텍스트 안에서 신화의 의미가 어떻게 생산되고 재해석되는지를 규명한다는 것. 4부로 나뉘어 진행된 행사에서는 총 10편의 논문이 발표됐다. 정영훈 정신문화연구원 교수는 ‘단군신화와 단군민족주의’란 논문을 통해 단군신화의 내용과 의의를 분석하고, ‘단군민족주의’에 의해 단군신화가 근대 한국민족주의의 정치적 동력으로 발전해가는 과정을 되짚었다.

식민지시기 저항에너지로 기능

정교수에 따르면 단군신화는 한민족이 역사의 태동기에 갖고 있던 세계와 국가에 대한 인식과 여망들을 담고 있다. 이는 후대의 사상사가 민족이 나아갈 방향을 모색하는 데 있어 중요한 상상력의 원천이 되었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상조류가 ‘단군민족주의’였다는 것. 이때 ‘단군민족주의’란 “단군을 민족의 공동조상으로 상정하고, ‘단군의 자손’으로서 민족정체성에 기반해 민족의 통일과 발전을 추구하던 일련의 의식-사상 또는 정치적-문화적 운동”을 지칭한다. 정교수는 단군민족주의가 ‘삼국유사’나 ‘제왕운기’보다 훨씬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중세기 사대모화사상에 의해 약화되긴 했지만, 한말에 대중적으로 부활해 한민족을 동포의식과 민족국가의식을 공유한 ‘근대적 민족’으로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으며, 식민통치기 자주독립을 위한 저항에너지를 조성하고 동원하는 핵심적 기제로 기능했다고 평가한다.

이와 함께 정교수가 강조하는 것은 ‘단군민족주의’가 단순히 민족단위의 역사의식(민족주의)으로서만 아니라 전제군주체제를 거부하는 ‘국민주의’와 결합, 민주주의와 함께 균등과 복지를 강조하는 ‘사회적 민족주의’로 발전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논의는 최근 소장 서양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는 한국 민족주의 비판론에 대한 직접적 반론에 해당하는 셈이어서 귀추가 주목된다.

하지만 정교수의 논의는 사상이나 운동의 형성과 변화를 상징과 의식, 정체성의 형성이란 요인에 의존하여 설명하려 한다는 점에서, 통합적 기능의 긍정성에만 주목한 나머지 신화적 상징에 의존하는 민족주의의 배타성과 억압성을 간과한다는 점에서 80∼90년대 민족주의 사학에 제기됐던 비판으로부터 여전히 자유롭지 못해 보인다. 이 같은 관점은 ‘중국신화의 역사화’ 과정을 다룬 장현근 용인대 교수에 의해 어느 정도 교정된다.

장교수는 ‘중국신화의 역사화’를 통해 ‘반고와 여와’ 신화에서 나타난 ‘창조에 대한 상상’이 ‘역사의 신화화’를 거쳐 천자의 탄생기에 이르러 마침내 ‘신화의 역사화’, ‘권력의 정당화’에 이르는 과정을 추적했다. 장교수에 따르면 모든 신화는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상력의 산물”이며, “좋은 세상을 꿈꾸는 인간의 정치적 사유의 산물”이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자기정당화를 위해 활용하는 것이 신화이기도 하다. 이 과정에서 문자가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장교수는 문자의 발명이 ‘상상’을 ‘설명’으로 대치함으로써 민중이 ‘창조의 상상’에서 멀어지고 문자를 독점한 권력자들에 의해 신화가 자기정당화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과정을 ‘신화의 역사화’ 과정을 통해 보여준다. 신화가 “권력의 정당화 기제일 수도, 올바른 삶의 전형으로 자기완성의 지향일 수도, 권력이나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일 수도 있”음을 정교수는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다.

신화의 이중성 : 정당화와 비판

원준호 외국어대 교수의 ‘유럽통합과 신화 ‘에우로페’’는 막바지에 다다른 유럽통합과 관련하여 사태를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적지않은 시사점을 제공한다. 원교수가 이 논문에서 살펴보려는 것은 오늘날 유럽에서 재해석되고 있는 에우로페 신화의 정치문화적 의미다. 그에 따르면 신화 에우로페는 그 자체로는 정치적 신화가 아니지만 에우로페가 유럽으로 지명화되면서 이미 정치신화로 전환된 신화의 경우다. 원교수는 논문을 통해 신화 에우로페와 여기서 배태된 유럽 개념이 중세에 정치적 수식어로 기호화되고 근·현대에서 통합의 아이디어와 기호로 전환되는 과정을 추적하는 한편, 그것이 오늘날 유럽적 정체성을 제공함으로써 이해관계에 기초한 정책적·기능적 통합을 용이하게 해줄 뿐 아니라, 통합된 제도가 상징적 대의에 기초해 발휘하는 실체적 통합기능의 미흡함을 보완해주고 있음을 규명했다.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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