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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4] CNT-FAI, 아나키-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74] CNT-FAI, 아나키-코뮤니즘의 가능성을 보여주다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2.01.10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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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티
프랑코
조지오웰
가르시아 올리버
극단주의를 대표하는 부에나벤투라 두루티(Buenaventura Durruti, 1895~1936)는 앞에서 본 페레와 함께 스페인 아나키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특히 스페인내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사진=위키미디어

CNT와 ‘드 트라바하도레스 사회주의자 일반연합’(Union General de Trabajadones: UGT)은 1934년 10월, 아스투리아스에서 7만 명의 광부들의 반란을 지원했지만 모로코 군대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었다. 수백 명이 죽고 9000명이 재판을 받았다. 뒤이은 ‘검은 2년’(bienno negro)에서 국가는 내전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동안 CNT는 “투표함 대신 사회혁명(Prente a las urns, la Revolucidn Socia)"이라는 슬로건으로 선거 투표를 일관되게 거부했다. 

CNT는 1933년 선거에서 기권함으로써 우익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그러나 모든 구성원이 그 정책에 만족한 것은 아니었고, 많은 사람들이 1936년 초 선거에서는 투표를 통해 인민전선 연합이 집권하게 되었다. 1936년 5월 사라고사에서 열린 전국 대회에서 약 50만 노동자를 대표하는 CNT는 온건한 반체제 인사들을 다시 환영하고 사회주의 UGT와 동맹을 모색하는 데 동의했다.

대회에서 CNT는 또한 혁명적 아나키스트 신념을 재확인했다. “혁명의 폭력적인 측면이 끝나면 사유재산, 국가, 권위의 원칙, 그리고 결과적으로 인간을 착취자와 피착취자, 피억압자와 압제자로 나누는 계급이 폐지된다”라 선언했다. 혁명은 갑작스러운 폭력 행위일 뿐만 아니라 심오한 심리적 변화를 수반하는 것임을 분명히 했다. 

 

자유롭게 연합된 신디케이트를 꿈꾼 CNT

열흘에 걸친 대회에서 내린 결의안은 아나키 코뮤니즘의 가장 웅변적이고 예리한 진술 중 하나였다. 새로운 사회는 지역 및 국가 연합을 통해 생활필수품을 생산하고 교환하는 자유롭게 연합된 신디케이트를 기반으로 하는 코뮌이라는 것이었다. 행정이나 관료적 성격이 없는 코뮌의 선출된 위원회는 농업, 위생, 문화, 규율, 생산 및 통계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역할로 정의됐다.

사회적 위계질서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생산자들은 하루가 끝날 때 모여서 공동 집회의 승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부적인 문제를 논의하는 모델을 꿈꾸었다. 개인은 모든 사회적, 경제적, 도덕적 창조의 세포이자 초석으로 여겨졌지만, 대회는 경제적 코뮤니즘 원칙을 채택했다. 자신의 힘과 능력에 따라 집단에 도움을 준 모든 사람은 공동체로부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얻을 것이었다. 생태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새로운 사회는 결국 각 코뮌의 자치에 필요한 모든 농업 및 산업 요소를 보장해야 한다고 결의했다. 또한, 다양성의 관용은 대회의 원리 중 하나였다. 

이처럼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아나키즘적 견해를 통합하려는 모든 시도가 이루어졌다. 코뮌은 다양한 형태를 취할 것이며 산업기술의 반대자들과 나체주의 옹호자들은 자신들만의 코뮌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었다. 대인관계에 관해서는 혁명이 가족에 대해 폭력적으로 행동하지 않아야 함이 확인했다. 왜냐하면 가족은 사회의 연대를 조성하기 때문이었다.

지식인과 육체노동자 사이에는 구별이 없어야 했지만, 교육은 문맹을 종식시키고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도록 돕기 위해 개발해야 하는 것이었다. 법원과 감옥은 더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었다. 대회에 모인 사람들은 '인간 본성은 악하지 않으며, 비행은 우리가 살고있는 불의 상태의 논리적 결과'라고 생각했다. 반사회적인 사람들은 화해의 정신으로 인민회의에서 각자의 사건에 대해 정당한 해법을 찾았다. 그것들은 '완전한 해방을 향한 인류의 출발점'이라는 초기 계획의 개괄적인 윤곽으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모두 혁명적인 요구였다. 대회는 이에 대한 준비를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하지 않았다. 민병대를 훈련시켜야 한다는 제안은 게릴라전 사상을 지지하는 사람에 의해 무산되었다. 혁명적 총파업은 군사적 반란에 대한 답이었다. 그러나 코뮤니즘의 자유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에 대한 모호함이 그 인기를 떨어뜨리지는 않았다. 대회 당시 CNT의 회원은 50만 명이었다. 그해 말에는 그 수가 15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공화정에서 주류가 됐던 CNT-FAI 연합의 한계와 가능성

프랑코 총통. 사진=위키미디어

프랑코가 1936년 7월 공화국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프랑코의 군대는 민병대에 의해 빠르게 무장해제 되었다. 7월 말까지 그는 국가의 절반만 통제할 수 있었다. CNT는 혁명적 총파업을 선언하고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요구함으로써 대응했다. 그 후 10개월 동안 CNT와 FAI는 스페인 공화정에서 지배적인 연합체였다. 아나코-스페인 생디칼리스트들은 즉시 바르셀로나의 행정권을 인수했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이 관찰했듯이, 활동적인 혁명가 대부분은 '모든 의회를 불신하는 아나키스트'였다. 

카탈루냐(Catalunya)는 사실상 독립 공화국이 되었다. 반파시스트 민병대 위원회가 노동자 조직과 다양한 정당과 단체를 대표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임시 정부의 해산 문제에 직면했을 때 CNT-FAI 지도자들은 이를 그대로 두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가르시아 올리버는 “CNT와 FAI는 협력과 민주주의를 결정했고, 아나키스트와 연방 독재에 의한 혁명의 질식으로 이어질 혁명적 전체주의를 포기했다.”라며 냉담한 논평을 냈다. 

그러나 카탈루냐 정부와 협력하기로 한 결정은 사회 혁명의 발전을 방해했다. 두 달 만에 반파시스트 민병대 위원회는 폐지되었다. 1936년 9월 27일에 CNT-FAI의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지역방위협의회(Regional Defense Council)라는 이름으로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려 했으나 결국은 정부에 들어갔다. 대표라는 기능을 잊고 그들은 인민운동을 지도하려고 노력했다. 그들은 “우리는 승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희생합니다(Sacrtficamos a todo)!”라는 슬로건에 매료되었다. 

장기적으로 사회 혁명 자체는 프랑코와의 전쟁을 위해 희생되어야 했다. CNT 지도부는 '아나키스트 독재'를 거부하고 다른 공화정 정당 및 노동조합과의 협력을 선택했지만 여전히 집단화 과정을 지지했다. 사회주의 UGT의 상당 부분과 협력하여 CNT 대원들은 재빨리 토지를 집단화하고 공화군이 장악한 지역의 공장을 인수했다. 

비록 단기간이었지만 노동자와 농민이 자신의 일을 관리하고 아나키-코뮤니즘의 가능성에 대한 실험은 성공적으로 보였다. 아나키스트들은 다른 파벌들과 마찬가지로 민병대를 형성하여 자신의 장교를 선출하고 명령을 수행하기 전에 토론했다. 군사 규율의 부족은 부대의 주도권과 용기로 보상된 것 이상이었다. 오웰은 아나키스트 군대가 '순수한 스페인군 중 최고의 전사'로 악명 높다고 주장했다. 독립노동당원으로 스페인에 간 오웰은 반체제 코뮤니즘 그룹인 POUM(Partido Obrerode UnificaciOn Marxism)에 들어갔다. 그는 국제 여단보다 그것을 선호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상황을 더 잘 이해했다면 아나키스트에 합류했을 것이라고 고백했다. 더욱이 오웰은 영국의 아나키스트와 생디칼리스트의 잘못된 표현을 바로잡고 특히 카탈루냐 전쟁 초기에 스페인 아나키즘의 놀라운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나섰다. 

조지오웰은 스페인 내전이 발발했을 때,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POUM) 산하의 의용군에 들어가 최전선을 자원했다. 사진=위키미디어

또 다른 영국인인 월터 그레고리(Walter Gregory)는 그의 공산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아나키스트들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그들의 명백한 성실, 헌신 및 열정은 훌륭했다. 어떤 고난도 그들의 명분의 자연적 정의나 성취에 대한 그들의 깊은 확신을 약화시키지 않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 민병대의 열정과 용감함에도 불구하고 두루티 부대가 아라곤으로 진격한 후에는, 전체 전쟁에서 가장 정적인 전선 중 하나가 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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