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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실패한 경제학이 정치학을 장악하는가
왜, 실패한 경제학이 정치학을 장악하는가
  • 이충훈 미국통신원
  • 승인 2005.10.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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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서평_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하여

▲『Perestroika! : The Raucous Rebellion in Political Science』 Yale University Press, 2005 ©
2000년 10월 15일, 미국정치학회보의 편집자와 10여명의 정치학자들에게 전달된 한통의 전자우편은 21세기 미국 정치학의 새로운 논쟁의 시작을 고지했다. 보낸이의 이름(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을 따 페레스트로이카로 명명된 이 논쟁은 전자우편을 통해 급격하게 확대됐고, 미국 정치학 내부에서 그와 관련된 다양한 논쟁들을 유발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학계 내부의 논쟁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대중 매체들을 통해 조망되기도 했다. 미국에서 20세기가 소칼의 지적사기에 대한 논쟁으로 막을 내렸다면, 21세기는 특정한 방법론적, 실천적 헤게모니에 입각한 지적 구체제(ancien regime)에 대한 새로운 도전과 더불어 시작됐다.

비판과 주장을 11개의 질문의 형태로 제기한 이 전자우편에서, 아직까지도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는 미국 정치학의 방법론, 미국 정치학회와 미국 정치학회보의 운영, 그리고 학계와 교육(특히, 대학원)의 관행 등 실타래처럼 얽혀있는 주제들에 대하여 통렬하게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우선 왜 조악한 게임이론가들이나 삼류 경제학 대학원생과도 경쟁이 되지 않는 정치학자들이 방법론의 다양성을 대표하는 미국 정치학회 내에서 주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제기한다. 특히 경제학의 자유시장 모델이 IMF나 세계은행(World Bank) 내부에서조차도 문제시되고,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저항에 직면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제학 세미나에서는 쓰레기로나 취급될 단순하고 유아적인 모델들이 정치학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퍼지고 있는 현상에 대하여 비판한다. 왜 실패한 경제학자들이 정치학을 지배하고 있는가.

이러한 사실은 미국정치학회가 발간하는 미국정치학회보를 살펴보면 보다 분명해진다. 고전적인 정치철학에 관련된 극소수의 “상징적”인 립서비스를 제외한 거의 모든 논문은 통계학과 게임이론이라는 동일한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는 정치사나 국제정치사, 정치 사회학, 해석적 방법론, 구성주의, 지역 연구, 비판이론이나 탈근대주의 등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헤게모니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는 미국정치학회와 편집위원회가 미국 사회의 다양성을 반영하는데 실패했다고 비판한다. 미국정치학회와 편집위원회의 압도적인 다수는 백인 남성들이었다. 흑인이나, 히스패닉, 여성, 게이, 그리고 아시아계 학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방법론적으로 배척당했던 베네딕트 앤더슨이나 찰스 틸리, 리차드 포크나 수잔 루돌프, 혹은 아리 졸버그, 제임스 스캇이나 테다 스캇치폴과 같은 대가들은 언제 미국정치학회장이 될 수 있는가. 왜 동부해안의 소위 고귀한 지식인들(East Coast Brahmins)이 미국정치학회를 조종하는가.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가 문제를 제기한지 어언 5년이 흘렀다. 그동안 미국정치학계도 많은 변화를 경험했다.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가 제기한 문제 중 몇몇은 이미 실현됐다. 테다 스캇치폴과 수잔 루돌프는 미국 정치학회장을 역임했고, 그동안 소외돼왔던 방법론이나 새로운 방법론, 그리고 이슈 중심의 정치학을 위해 미국정치학회는 ‘Perspectives on Politics’라는 잡지를 발간하기 시작했다. 많은 대학원에서 질적 방법론 강좌가 새롭고 개설됐고, 미국 정치학회의 운영위원회 역시 소수자를 위한 자리를 배정하기 시작했다. 현재 진행중인 미국 정치학회 운영 위원 선거에서도 9명의 후보자중 6명은 방법론적 다원주의의 입장에 대한 옹호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다.

물론 이 모든 변화를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에게만 돌릴 수는 없을 것이다.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가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도 다양한 형태의 개별적인 문제제기가 있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는 방법론적, 실천적 헤게모니에 대항하는 다양한 소수의 방법론이나 실천에 구심점을 제공하였다는 점 역시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가 누구인지에 상관없이 그는 이미 단수가 아닌 복수의 집합을 의미하게 됐다. 

이번 9월에 출간된 ‘Perestroika!’는 지난 5년간의 미국 정치학계에서의 페레스트로이카 논쟁과 그 성과를 집대성하고 있다. 문제제기의 폭만큼이나 다양한 학자들이 방법론적 문제뿐만 아니라 미국정치학회와 그것이 발행하는 잡지, 그리고 대학원 교육에 페레스트로이카가 미친 영향에 대하여 논쟁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개혁에도 불구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가 성공적인 가는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여전히 다수의 정치학자들이 기존의 방법론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는 무의식적 통계학자나 현실과 괴리된 방법론상의 과의식적 게임이론가의 길을 걷고 있다. 미스터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제제기 이후, 구체제의 방법론적 정당화 역시 강화돼왔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출간된 ‘Perestroika!’는 논쟁의 최종적 정리와 종언을 의미한다기 보다는 앞으로 있을 좀 더 본격적인 논쟁을 고지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이충훈 / 미국통신원·뉴스쿨대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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