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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아편
지식인의 아편
  • 김재호
  • 승인 2022.01.07 12: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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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몽 아롱 지음 | 변광배 옮김 | 432쪽 | 세창출판사
광신적 믿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

레몽 아롱이라는 이름은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다. 특히 그와 동시대에 여러 사상적 자취를 남긴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카뮈라는 거대한 이름에 비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사르트르와 아롱이 절친한 친구였다는 사실도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아롱 자신은 한국에 관하여 관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초기부터 북한의 도발로 한국전쟁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주장’했다. 지금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르트르와 같이 우리나라에 귀책 원인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당시를 생각해 보면, 그의 통찰력을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여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아롱이라는 인물을 우리는 다시 조명해야 할까? 그것은 21세기 들어 시작된 아롱의 ‘복권’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르트르의 고장, 프랑스에서는 21세기 들어 아롱의 복권과 사르트르의 추락이 시작되었다. 왜 프랑스는 갑자기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사르트르를 밀어내고 아롱을 높여 주기 시작했을까? 프랑스 철학이 우리나라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이 놀라운 현상을 주시하지 않을 수 없다. 사르트르의 몰락과 그 사상적 적대자의 부흥이라니, 놀라운 일이 아닌가.

놀라운 점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아롱이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에는 자신도 사회주의자로서 ‘좌파 가족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런 아롱이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한 해방된 프랑스에서는 ‘소외된’ 지식인으로서 좌파와의 결별을 선언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된 것이다. 그가 이렇게 스스로 ‘외톨이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왜 스스로 ‘추방당한’ 지식인이 되어 ‘고립된 섬’ 같은 처지를 자처했을까? 그것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프랑스 지성계는 그를 외면했지만, 그는 끝까지 ‘지식인’으로 남았다. 

다시 앞 이야기로 돌아가서, 왜 프랑스 지성계는 다시 아롱을 주목하기 시작했을까? 그것은 이른바 새로운 밀레니엄 시대, 좌파의 위기로부터 기인했다. 혁명은 이제 그 방향을 바꿨다. 사람들은 총체적 혁명보다는 분자적 혁명을 주장했다. 소련은 몰락했고, 좌파 지식인들은 길을 잃었다. 이러한 좌파 지식인의 실종 상황 속에서, 그들이 그동안 배척해 왔던 아롱을 되돌아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방향이었다. 그리고 되돌아본 자리에는 묵묵히 지식인의 길을 걸어간 하나의 위대한 지성이 서 있었다. ‘배반자’ 레몽 아롱의 승리였다.

 

신화, 역사 그리고 소외

『지식인의 아편』이라는 서명을 들었을 때, 당신은 무엇을 떠올리는가? 혹시,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그 유명한 말을 떠올렸는가? 그렇다면 바로 짚었다. ‘지식인의 아편’은 바로 그 ‘민중의 아편’에 대응하는 말로서 공산주의가 바로 지식인의 종교이며 아편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아롱은 공산주의라는 아편에 취해 있던 프랑스 지식인들을 비판하기 위한 이 책을 세 개의 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정치적 신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 “지식인들의 소외”가 그것이다. 

1부에서 다루고 있는 ‘정치적 신화’란 ‘좌파’, ‘혁명’, ‘프롤레타리아트’라는 세 가지 신화를 말한다. 아롱은 이 부에서 역사상에서 통일된 ‘좌파’라는 건 없다고 말한다. 이어서 좌파를 자처하는 자 중 도대체 누가 진정한 좌파냐고 묻는다. 또 ‘혁명’은 그 과정에서의 재앙은 사라진 채, 위엄만이 남았다고 말하며, 도대체 어디까지가 혁명이고 어디부터는 혁명이 아닌지 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명’, 나아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하나의 단결된 ‘집단’이 과연 존재하느냐고 묻는다. 아롱은 이런 질문들을 통해서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레몽 아롱(Raymond Aron, 1905년 3월 14일 ~ 1983년 10월 17일)은 현대 프랑스의 작가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드골에 협력하여 잡지편집을 맡았다. 철학, 경제학, 사회학 등에 관한 저서가 있다. 사진=위키백과

신화가 무너진 자리에는 ‘역사’가 등장한다. 그런데 이 부에서 말하는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에서 역사에 대한 ‘우상숭배’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를 지엄한 심판대로 여기는, 이른바 ‘역사의 판결’과 같은 생각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역사에 특정한 ‘길’이 정해져 있다는 계시적 역사관을 말한다. 아롱은 역사에 대한 ‘성직자들과 신도들’을 비판하면서, 역사의 최종적 의미나 필연성 같은 건 없다고 말한다. 역사에는 과연 최종적 목적지가 존재하는가? 역사는 과연 누구의 승리를 공언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마지막 부인 ‘지식인들의 소외’는 뭔가 동떨어져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신화가 무너지고 역사의 의미가 무너진 자리에는 ‘소외’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롱은 먼저 ‘지식인들과 그들의 조국’ 간의 관계, ‘지식인들과 이데올로기’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지식인들은 결국 종교를 찾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들의 이상과 다른 조국, 그들의 현실과 다른 이데올로기 사이에서 고뇌하는 지식인들은, 결국 자신들이 만들어 낸 하나의 종교에 기대게 된다. 공산주의는 바야흐로 ‘지식인의 아편’이 되어 버린 것이다.

 

광신적 믿음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

그런데, 지금 도대체 누가 공산주의를 추앙한단 말인가? 물론 소련의 몰락 이후로 공산주의를 추앙하는 사람들은 대개 전향하거나 사라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에서 도대체 왜 『지식인의 아편』을 읽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아롱이 이 책에서 무엇보다 비판하고자 한 것은, 이른바 공산주의에 대한 광신적 믿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른바 ‘광신적 믿음’이 공산주의에만 한하는 것은 아니다. 광신적 믿음은 비판적 사유를 수용하지 않는 일종의 경향이다. 우리가 『지식인의 아편』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비판적 사유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하면서도, 우리에 대한 비판적 사유는 달가워하지 않는다. 비판적 사유는 오직 내가 아닌 상대편에게 향할 때만이 ‘비판적’이다. 그러나 지식인이라면, 당연히 자신을 향해서는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존재마저도 의심했는데, 어떻게 지식인이 자신의 신념을 확신할 수 있단 말인가? 지식인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사회를 위해서도 비판적이어야 한다. 맹신은 지식인을 침묵하게 하며, 침묵은 사회를 낭떠러지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는, 더 이상 인간들의 사회가 아니다.

넷플릭스의 《지옥》이라는 드라마를 시청한 사람이라면, 맹신과 맹종의 무서움을 보았을 것이다. 의문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비판자들은 배교자가 되어 탄압받는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과연 《지옥》 속의 사회와 얼마나 다른가? 그 정도나 맹신의 대상은 다를지 몰라도, 우리 사회도 얼마간은 비판이나 의문에 대해 맹공을 퍼붓지 않는가? 아니, 나아가 그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상대를 공격하기도 하지 않는가? 우리는, 나는, 당신은,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당당할 수 있는가? 그것이 무엇인지는 몰라도, 우리는 아직 무언가를 숭배하고 있지 않은가?

『지식인의 아편』은 우리를 이러한 신화로부터 해방해 줄 것이다. 한 지식인이 우리에게 길을 비춰 주고 있지 않은가. 물론 아롱에 대해서도 비판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비판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비판하면 될 뿐이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는가. “나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는 이 책을 던져 버려라─그리고 밖으로 나가라.” 우리는 다만, 우리도 어느새 다른 이름을 한 새로운 아편에 취해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기회를 마련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지식인의 아편』은 그것을 돕는 아주 쉬운 방도일 뿐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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