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조약 직후 고종황제가 친서로 쓴 을사조약 무효선언. © |
원 교수는 “영국이 일본에게 먼저 한일합방을 제안했다는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영국 측 외교문서를 검토한 뒤 “영국은 그들의 인도지배에 대한 일본의 보장을 대가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승인해줬지만, 한국의 국제적 지위가 ‘보호국’보다 낮게 전락하는 것은 막으려 했다”라고 주장했다.
또한 원 교수는 한일합방까지 미국의 활동은 지금껏 알려진 것보다 훨씬 적극적이었음을 밝혀냈다.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지배에 대한 단순한 지지와 승인”을 넘어 영국과 독일을 설득하고, 일본에 비판적이던 프랑스를 윽박질러서 한반도 병합을 조건으로 친일전선을 마련해 러시아를 견제하려 했다는 게 원 교수 주장의 요지다. 이것은 “러일전쟁이 임박해서 극동지역의 중립과 영토보전의 대상지역에서 한국을 배제한 것을 영국이 의아해하자 영국을 설득했던 사례”에서도 드러나고, “독일이 일본의 한국지배방침을 지지해준 것에 대해 루즈벨트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전달했던 것”에서는 확증된다.
나아가 원 교수는 그간 독일과 프랑스에 대한 미진했던 연구를 실증적으로 확장하면서 두 국가를 차별화하고 있다. 사실 그간 우리의 제국열강의 인식에 있어서 독일과 프랑스는 '그놈이나 이놈이나'였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원 교수는 “독일이 일본의 한국지배를 묵인 또는 간접승인에 그쳤다는 견해는 잘못된 주장”이며 “독일은 영국이나 미국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한국의 주권문제에 아무런 단서도 달지 않고 일본의 한국지배를 승인”했다는 것이다. 독일사에 해박한 원 교수는 그 이유가 “당시 빌헬름2세 시대 독일 내부의 구조적 문제, 즉 18세기적 지배구조의 비효율성에서 야기된 국가구조의 취약성의 결과로 독일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자, 미국에 잘 보여야 했던 상황”이었다고 분석한다.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대해서도 “일본의 대한정책을 묵인 또는 간접승인한 국가”라는 기존의 판단이 잘못됐다고 비판한다. 적어도 을사조약 때까지는 프랑스가 한국의 독립과 중립을 위해 “차관공여”, “대일견제” 등을 통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프랑스가 간접승인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드는 근거인 “프랑스가 루즈벨트 강화안을 러시아에게 권고했다는 것”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원 교수의 이러한 주장은 당시 열강들의 상황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정보를 주고 있다. 또한 미국을 중심으로 당시 열강들의 이해관계가 주도됐다는 점이 보다 명확해지게 되었으며, 치하루 이나바 교수 같이 “1904년 이전의 일본에는 한국을 병합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는 주장도 그 근거를 잃게 됐다. 이에 대한 논의와 학문적 추인이 필요할 듯하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