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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앎과 무지의 경계
[學而思] 앎과 무지의 경계
  • 정진배 연세대
  • 승인 2001.06.25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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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6-25 15:28:45
정진배/연세대·중문학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늘날의 대학이 ‘아는 것이 힘’이라는 근대적 계몽 구호를 내세우며 교육을 수행해 왔으니, 학생들에 대한 교수의 지적 전수가 대학이라는 제도의 백미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런데 인문학의 경우 학문적 지식이 ‘앎’ 자체와 동의적으로 인식될 때, 인식론적 혼란이 발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문학의 궁극적 대상이 인간인 이상, 이 주제는 사실상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적 지평의 너머에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을 경험할 수 있지만, 인간을 결코 지식의 대상으로서 알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인문학은 끊임없이 앎의 영역만으로 학문의 범위를 축소해 왔다. 더욱 가공스러운 것은 알지 못함이, 왜곡된 지적 권위의 외투를 쓰고서 ‘앎’으로 둔갑하여 상아탑에서 활개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사적으로 볼 때 지식이 고압적이고 현학적인 허장성세로 전락할 때면 지적 권력의 저편에서는 권위를 해체시키고 패러디하려는 저항이 존재해 왔다. 예를 들어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는 것”이라고 한 유가의 정명론적 사고에 대해, 장자는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은 모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는 반문을 통해 앎에 대한 최소한의 잣대마저 해체시켜 버린다. 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사용하여 당시 소피스트들의 무지를 여지없이 폭로하는데, 결국 그는 알지 못함을 알고 있었다는 그 사실로 인해 아테네의 현인으로 남게 된다. 한편 바흐친의 소설론은 앎과 알지 못함이 문학 장르론적으로 이론화돼 발전한 경우이다. 그는 ‘대화성’과 ‘카니발’ 등의 개념을 통해 질서정연하게 봉쇄된 앎의 영역을 온통 휘저어 버리며, 결과로서 지적 명료함은 사라지고 앎의 미종결과 알지 못함의 잠재성만이 남게 된다.

앎과 알지 못함의 모호한 경계가 여기에까지 이르면, 이쯤에서 한번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즉 우리가 대상을 안다고 할 때,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점이다. 실제로 우리의 앎은 앎에 대한 규정이며, 그 규정은 사회문화적으로 결정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명론적 충돌이 빈번한 역사의 전환기적 시점에서 앎과 알지 못함 사이를 배회하는 인식론적 혼란이 등장하는 것은 자명하다. '5·4 계몽시기'(1919)에 쓰여진 魯迅의 초기 단편소설은 이러한 문제를 작품의 전면에 배치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孔乙己’에서 작가는 공을기를 통해 몰락해 가는 구지식을 패러디하고 있으며, ‘狂人日記’의 광인은 중국의 古書를 가득 메운 仁義道德의 문장 속에서 ‘食人’이라는 두 글자를 읽어낸다. 즉 어떤 의미로든 두 작품 모두에서 앎에 대한 본질적 재규정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인문학의 핵심은 알지 못함의 앎에 있다. 그러나 이 점이 의도적으로 왜곡되거나 간과될 때, 권위적 담론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자본주의 근대는 알 수 없음을 끊임없이 앎의 영역에서 배제해 버린 시대였다. 침묵보다 웅변이 존중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자기가 하는 말의 의미를 전혀 새겨보지 않은 채 열변하는” 지식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문명의 도시는 삶에 대한 절대적 타자인 죽음을 어둠침침한 병원 모퉁이의 영안실로 내쫓아 버렸다. 그러나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칠흙같은 어둠의 밤이 드리워질 때, 비로소 우리의 머리 위에 광활한 우주의 신비가 펼쳐진다는 사실은. 어쩌면 인문학적 사유에서 정작 필요한 것은 낯익은 일상 속에서 알 수 없음을 보아내는 영감인지 모른다. 그것은 지적 혜안이며 도덕적 겸허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고 자신 있게 말하려는 순간, 그 앎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자신에게 되물어 보게끔 하는 경고이다.

우리 시대 인문학의 위기 운운은 어쩌면 발빠르게 인간을 너무 잘 알아서 비롯된 소치일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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