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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티푸스’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이 실패한 이유는 ‘티푸스’ 때문이었다
  • 유무수
  • 승인 2022.01.06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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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_『화려한 화학의 시대』 프랭크 A. 폰 히펠 지음 | 이덕환 옮김 | 까치 | 423쪽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안네 프랑크도 티푸스로 사망해
프랑스 생물학자 니콜은 이가 티푸스 매개한다고 발표

「쇼생크탈출」(1994)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이 감옥에 들어갈 때(1948년, 30세) 통과의례는 소방호스로 쏘는 물에 강제샤워를 당한 후, 화학 약품으로 보이는 하얀색 가루를 뒤집어 쓴 것이었다.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지만 가루는 그 당시 파리, 모기, 이, 벼룩 등의 해충을 제거하는 방역사업에 실제로 사용했던 DDT였을 것이다. 

 

이(louse)가 발진티푸스를 옮긴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시기의 아일랜드에서는 600만 명의 인구 중에서 70만 명이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1528년 나폴리를 공격했던 프랑스군은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병사가 티푸스에 희생되어 실패했다. 1567년 신대륙에서는 티푸스로 200만 명이 넘는 멕시코 원주민들이 희생되었다. 1741년 프라하가 프랑스에 점령당한 이유는 오스트리아 수비대 3만 명이 티푸스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1812년 나폴레옹의 실패는 티푸스 때문이었다. 그가 이끄는 50만 명의 침략군 중 8만 명이 모스크바에 도착했고 귀환한 병사는 1만 명에 불과했다. 1917∼1923 러시아 내전에서는 3천만 명이 티푸스에 감염되고 300만 명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수용소에 갇혔던 안네 프랑크도 티푸스에 걸려 사망했다. 

1909년 프랑스 생물학자 니콜은 이가 티푸스를 매개한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1939년 스위스의 화학자 파울 뮐러는 DDT의 살충효과를 발견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DDT를 적극 활용했다. 미군의 예방의료 부대는 하루 5만 명의 속도로 200만 명에게 DDT 분말을 뿌렸다.  제 1차 세계대전에서는 우크라이나와 발칸 지역에서 900만 명이 티푸스로 목숨을 잃었지만, 제 2차 세계대전에서 DDT의 세례를 받은 미군 병사들 중 티푸스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독일의 화학자들은 빈대와 이 등을 제거하는 화합물을 연구했고, 치클론 B라는 농약을 개발했다. 원래 티푸스 퇴치를 위해 개발된 치클론 B는 나치 치하에서 집단수용소의 유대인을 신속히 학살하는 데 사용됐다. 나치를 적극 지원한 독일의 화학회사 I. G. 파르벤은 점령지의 화학회사를 차지했고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인체실험을 했으며 그들을 노예로 부리면서 돈을 쓸어 담았다. 종전 후 I. G. 파르벤의 관리자들은 뉘른베르크 군사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레이첼 카슨(1907~1964)과 국내 번역된 『침묵의 봄』(에코리브르) 표지. 사진=위키백과

레이첼 카슨이 1962년에 출간한 『침묵의 봄』은 살충제의 무차별적인 살포로 봄을 알리는 철새소리를 들을 수 없는 지역이 늘어나고 있는 자연파괴의 현실을 조명했다. 화학기업은 해충에 고통 받고 흉작에 시달리는 시골이 유토피아라는 것이냐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이덕환 옮긴이(서강대 명예교수, 화학과)는 카슨의 주장은 더욱 안전한 농약을 생산하고, 환경에 미치는 폐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전염병의 원인과 해결책을 발견하는 과정에는 과학자들의 헌신이 있었다. 전염병을 연구하다가 그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발견의 과정에서 기본 공통점은 세밀한 관찰이었다. 스코틀랜드의 과학자 로널드 로스는 자신이 흘린 땀으로 녹이 슬 때까지 현미경을 들여다봄으로써 말라리아의 감염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과학의 그 다음 과제는 모기박멸이 되었다. 

유무수 객원기자 wisetao@naver.o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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