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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작, '점의 변주'는 어디로 갔나
1957년작, '점의 변주'는 어디로 갔나
  • 정민영 미술평론가
  • 승인 2005.10.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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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_‘2005 올해의 작가’ 전을 통해본 ‘산정’의 그늘

▲瑞日(서일) / 1970 / 72x130cm ©

 

서세옥은 한국화단의 산역사로 통한다. 1950년대 말, 비구상 한국화 그룹인 ‘묵림회’를 조직해 한국화의 현대화를 이끈 장본인으로서, 지금도 여전히 작품활동중이다. 그런데 이 거목의 나이테에는 2개의 치유되지 않은 옹이가 굵은 고딕체로 박혀있다. 잡지사와 서울대 동문들 간의 싸움으로 변질된 1974년 문명대와의 논쟁과 2000년 평론가 류병학이 제기한 ‘서세옥 제몫 찾아주기’가 그것이다. 전자가 그때까지 산정의 작품에 나타난 역사의식과 시대성의 결핍 그리고 일본화풍의 잔재를 지적한 것이었다면, 후자는 국내 미술계에서 음성적으로 지적돼온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 ‘자리싸움’과 국내 미술대학 교육의 문제점을 산정의 ‘이상한’ 도판편집 읽기를 통해 조명한 것이다.

현재 전시중인 산정의 개인전에 대한 일부 미술인들의 관심은, 류병학이 제기한 문제의 연장선에 있다. ‘선구자 병’(『미술세계』, 2000년 3월호)은, 작품도판 사용을 허락받지 못해 정작 중요한 산정의 작품이 거의 수록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글에서 작품제목만 접했던 독자에게, 이번 전시회는 산정의 모든 작품을 직접 보며, 사실을 확인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하지만 전시회는 1950년대 말~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사람’ 시리즈까지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선정한 ‘2005 올해의 작가 展’답지 않게 작품구성이 부실했다. 의혹이 제기된 작품들을 비롯해 일부 연대기의 작품들이 빠진 탓이 크다. 

전체 2개의 전시실 중 제1실에는 새떼, 염소, 산, 병아리, 닭, 연못, 당나귀, 비, 나무 등을 소재로 한(물론 몇몇 추상작품도 있다) 작품과 초기의 ‘사람’ 시리즈가, 제2실에는 2000년대까지의 ‘사람’ 시리즈가 대작 위주로 전시되었다. 이런 출품작들만 놓고 보면, 산정의 작업역정은 ‘사람’ 시리즈를 완성하기 위한 오랜 산고의 여정 같은 인상을 준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것은 1실의 작품구성과 초기작품의 출품유무였다. 총 41점이 전시된 1실의 작품들 중 27점이 구상과 추상의 반복양상을 보여주는 전반기의 작품이었고, 나머지 14점이 ‘사람’ 시리즈였다(이 시리즈는 2실의 작품까지 포함하면, 모두 42점으로서 전체 출품작인 69점의 절반이 넘는다). 나는 이런 전시장의 동선을 따라가며,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작품들을 찾아보았다. 그런데 웬걸, 이 시기의 작품은 4점뿐이었다. 그것도 1959년 작품이 3점(‘정오’, ‘선의 변주’, ‘점의 변주’), 1962년의 작품이 1점(‘비명’)이었다. 반면에 1970년 작품이 무려 19점이나 되었다. 왜 시기별로 작품 수가 고르지 않고, 문제의 1957년 작품은 왜 출품되지 않은 걸까. 

이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해서는 ‘선구자 병’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번 전시회에도, 이 글에서 지적된 산정의 문제점이 ‘은밀히’ 보존돼있기 때문이다.

‘선구자 병’은,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 자리를 선점하기 위해 박서보, 이우환, 서세옥 세 화가가 벌인 ‘제작연도 스캔들’(‘일그러진 우리들의 영웅’ 참조) 중 산정의 경우를 집중해서 다룬 것이다. 그러니까 산정이 화집을 발간할 때마다 이전의 화집에는 없었던, 상대방보다 제작연도가 앞서는 작품도판을 계속 선보였는데, 이 글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인쇄된 산정의 자료를 모조리 수집해, 1996년에 출간한 화집의 수록작품과 대조하며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 중의 하나가 “왜 수십 년이 지난 1996년에 서세옥은 1959년에 제작됐다는 작품을 자신의 화집에 도판으로 인쇄했을까. 1959년은 무슨 특별한 의미라도 있는 것일까.”(이하 인용은 ‘선구자 병’에서)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이, 제자인 이우환이 1993년 출판한 화집에서 1959년뿐만 아니라 1958년 도판까지 수록한 걸 의식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라고 의문을 품는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98년에, 산정은 놀랍게도 다시 1959년보다 2년이나 빠른(공식적으로 발표된 적이 없는) 1957년 작품을 선보였다.

이 부조리한 제작연도 편집 스캔들은 단지 세 작가의 싸움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심각성이 있다. 그것은 국내 대학에서 한국현대미술사를 강의할 수 없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 즉 “그로 인해 파생되는 문제, 국내 미술대 미술사나 미학 등 이론과를 졸업한 학생들이…기껏 대학에서 배운 것이 식민지 시대의 근대미술이나 그 이전 시대란 점에서 오늘날의 국내 현대미술에 적응할 수 있겠느냐”라는 것이다.

이 글은 한국현대미술사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라도, 화집 편집을 통해 교묘히 진행된 뒤틀린 사실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 화가의 작품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주는 회고전 성격의 개인전이라면, 작품 수에서 연대별로 균형이 맞아야 한다. 그래야만 관람객이 작품세계의 변화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산정의 경우는 각 연대별 작품 수가 들쑥날쑥이었다. 50년대 3점, 60년대 1점, 70년대 19점, 80년대 4점 등 작품 수의 편중이 심했다.

▲점의 변주, 닥지에 수묵, 740*950cm, 1959. ©

이와 맞물린 문제점 두 가지만 살펴보면, 먼저 산정 작품세계에서 의혹이 제기된 작품이 전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즉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 자리다툼 스캔들과 맞물린 1957년(1996년 화집에는 없고, 1998년 ‘한국현대미술전’의 도록에 처음 발표된) 작품 ‘점의 변주’는 전시되지 않은 채, 1959년의 작품만 전시됐다. 산정은 왜 1957년에 제작됐다는 작품을 “그가 화단생활을 시작하지 만 50년”이 되어서 발표한 것일까. 혹 그것은 한국현대미술의 선구자로 지명된 박서보와 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서? 박서보의 첫 추상화가 1957년에 제작되었기 때문에?” 이런 의혹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시에서 그 작품을 선보였어야 했다. 그리고 약력란에 1958년 ‘묵림회전’을 가졌다고 인쇄돼있는데, 이 해의 작품은 왜 빠진 것일까, 이것도 의문이다.

▲사람들 / 1987 / 132x163cm ©

다음으로 1950년대 작품과 문맥을 따져볼 수 있는 1960년대의 작품이 단 1점(‘비명’, 1962; 1996년 화집에는 1968년으로 표기)만 전시됐다는 점이다. 눈밝은 관객이라면 한번쯤 이런 의문을 가질 법하다. 산정은 1961년과 1963~1969년에는 과연 어떤 작품을 제작했을까. 하지만 전시장과 화집 어디에서도 그것을 확인할 수가 없다. 1960년대의 작품으로 ‘작품’(1961), ‘점의 변주’(1962), ‘태양을 다투는 사람들’(1967), ‘운’(1963), ‘길상대례’(1965), ‘산수’(1966), ‘춘양’(1965), ‘작품’(1968) 등이 있다는데, 이런 작품들은 왜 뺐을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고르지 못한’ 작품구성은 이번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화집에서도 반복된다. 사실 ‘화가는 죽어서 화집은 남긴다’고 할 만큼 미술계에서 화집은 중요하다. 전시회가 끝나면, 미술사료로 영생하기 때문에 화집의 체형과 체질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산정의 이번 화집에는 전시 출품작이 모두 실려 있다. 하지만 수록작품 중에는 1실과 관련된 작품 1점, 2실과 관련된 ‘사람’ 시리즈 32점이 각각 전시되지 않았다. 왜 ‘사람’ 시리즈만 화집에 가득 인쇄했을까.

그런데 문제는 화집의 제작주체가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1966년 화집처럼, 이번에도 산정 측에서 제작한 것이다. 객관성 면에서 이번 화집도 금이 간 셈이다. 이와 달리, ‘2004 올해의 작가’였던 정점식 의 경우는 그의 작품을 시기별로 분류하고, 연구논문을 싣는 등 작품세계를 체계화한 도록을 발간했다. 게다가 이 작업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했다는 점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그러므로 산정 측이 제작한 이번 화집을, ‘2005 올해의 작가’전 공식화집이라고 하기에는 객관성과 공신력 면에서 문제가 있다.

이 ‘제작연도 스캔들’에 대한 미술이론가들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발언해야할 위치에 있는 이들은 완강한 ‘침묵의 카르텔’로, 줄곧 금기시돼온 이 스캔들 ‘보호’에 앞장섰다. 그 사이에 문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마련한 전시로 고스란히 이월됐다. 불행한 일이지만, 산정의 작품세계는 아직도 본격적인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의문에 찬 이번 전시는, 그 점을 재확인시켜주었다. 이는 개인적인 불행을 넘어 우리 미술계 전체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산정은 제기된 의혹을 씻어줄 필요가 있고, 이론가들은 입을 열어야 한다. ‘서세옥 제몫 찾아주기’는 곧 ‘한국현대미술 제몫 찾아주기’ 인 것이다.

정민영/ 미술평론가·전 미술세계편집장

 

 

 

 

 

 

묵림회-1960년대 기성화단에 대한 도전, 현대화 모색

▲사람, 닥지에 수묵, 92.7*116.5cm, 1996. ©

해방이후 동양화단은 왜색을 탈피하고 민족미술을 구현하려는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특히 동양화는 전통적 양식인만큼 새로운 화풍이 절실히 요구됐던 영역이었다. 1946년 서울대 미술과는 우리 미술계가 열망한 민족적 양식의 모색에 있어 가장 주요한 실천의 장이었는데, 당시의 교수였던 김용준, 장우성, 노수현 3인과 더불어 젊은 작가 지망생들의 동조가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제 1세대는 곧 서세옥, 박세원, 장운상 등 해방 1세대를 포함해, 그 후배격인 장선백, 권순일, 전영화, 남궁훈, 민경갑 등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들로 구성됐다. 제1세대는 1960년 2월 ‘한국 동양화단의 유일한 전위적 청년작가들의 집결체’를 표방하고 묵림회(墨林會)를 결성해 동양화의 현대화를 모색해 나갔다. 기성체제에 변혁적 가치를 제시하며 거부의 몸짓을 보였던 이들은 왜색을 청산하고 전통과 기존가치에 도전하며 새로운 실험을 시도했던 묵림회는 당시 서양화단에 불어 닥친 추상표현주의와 때를 같이하면서, 수묵채색화의 현대화 운동을 주도했다. 즉, 수묵채색화를 전통적 맥락에서 해석해 추상표현주의에서 보이는 강렬한 필치를 전통문인화의 사의와 書畵一致論과 연결시켜 동양화의 추상운동 이념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묵림회는 그러나 1964년경에 이르러 스스로 해체의 길을 걷게 됐고, 이에 가담했던 정탁영, 송영방, 신영상 등이 중심이 돼 韓國畵會를 창립함으로써 묵림회의 실험정신을 이어받았다.

이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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