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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의 필터 거부한 ‘각성된’ 리얼리스트
관념의 필터 거부한 ‘각성된’ 리얼리스트
  • 정주하 백제예술대
  • 승인 2005.10.03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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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비평: 스티글리츠와 근대사진

정주하 / 백제예술대·사진가

▲Alfred Stieglitz ©
어떤 방식으로든 한 인간이 그려놓은 삶의 궤적을 바르게 추적하는 일은 불가능하리라 본다. 그가 평범한 삶을 살았던, 혹은 특별하게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던 그 경중에 관계없이 그러하다. 이는 아마도 인간의 속성이란 너무도 복잡하고 오묘한 것이어서 한 지점에서 제대로 풀어 이해하기가 불가능하기에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게다가 우리와 같은 민족도 아니요, 같은 동시대의 사람도 아닐 경우는 그 서술의 난감함이 더욱 크다. 그저 한 켠에서 비껴 본 그림자를 어루만지는 정도 일게라 스스로 위무한다.


알프레드 스티글리츠(Alfred Stieglitz, 1864~1946)는 매우 복잡한 삶을 살았다. 1881년에 뉴욕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듬해 베를린으로 기계공학을 공부하러 떠날 때 까지만 해도 그는 사진과 관계가 전혀 없었다. 허나, 베를린에서 자신의 전공과는 무관하게 사진화학을 가르치는 헤르만 빌헬름 포겔(H. W. Vogel) 교수를 만나고부터, 그리고 거리에서 박스형카메라를 우연히 구입하게 되면서 급격하게 사진 안으로 자신의 삶을 밀어 넣게 된다. 뭐 이상할 것은 없다. 누구나 무엇을 시작할 때 반드시 극적이거나 필연적인 사건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헌데 이 스티글리츠는 그렇게 시작한 사진을 단단히 움켜쥐고는 깊숙하게 빠져들어, 한편으로는 사진가로, 다른 한편으로는 사진운동가로 일생을 마치게 된다. 잡지발행을 세 번이나 거듭하고, 여러 번 아마추어 사진그룹을 결성하여 당대에 회자되던 사진 경향들에 격렬하게 맞서기도하고, 또 자신이 운영하던 포토 291 갤러리를 통해 당시 미국의 사진뿐만 아니라 유럽의 모더니즘 예술을 소개하기도 한다. 그리고 돈버는 일은 안한다. 직물상인이던 부유한 아버지의 도움이 얼마나 컸을까를 연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질타도 무척 컸겠지만.


스티글리츠가 사진가로서 활동했던 시기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이다. 이 시기는 예술사적으로 매우 박진감이 넘치는 때였다. 모더니즘 시기와 일치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적어도 서구의 예술계가 그 이전의 시기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고자 애썼던 시기이며, 동시에 그 예술을 통해 새로운 사회와 인간형의 창조에 가능성이 있다고 굳게 믿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미 회화에서는 르네상스 이래 3백여 년 동안 지속해 오던 원근법에 의한 대상재현이 무너진 시기다. 그림의 대상이 숭고하고 엄격하던 것으로부터 일상적이고 비천한 것으로의 이동이 이루어졌으며, 그 재현 방식 또한 ‘방식’(예컨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스푸마토(sfumato) 기법과 같은)적인 것으로부터 불완전한 시각에 ‘의존’(빛의 현란한 역할과 인간의 시각사이에 이루어지는 관계 안에서)하는 것으로 이동하였다. 때문에 보는 것에 대한 과학적인 탐구와 더불어 빛의 존재와 역할이 회화에 매우 깊은 영향을 미치던 시기였다.


사진 역시도 1880년대에 이르면, 인간의 시각이 편만하지 못한 눈알의 형태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한 적확한 초점재현이 완전한 사기라는 깨달음이 보편화되었다. 하여 피터 헨리 에머슨(P. H. Emerson)과 같은 사진가는 나서서 초점이 흐린 사진이 오히려 인간의 시각적 진실에 가까울 뿐 만 아니라, 좋은 예술사진이라는 충고를 여기저기에 흩뿌리고 다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지각에 대한 새로운/보편적 각성은 많은 사진가들로 하여금 사진과 회화의 합일을 꿈꾸게 하였다. 픽토리얼리즘(pictorialism, pictur?sque하다는 뜻에서 연유된)이라는 이 웃지 못 할 조어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이 시기의 이론에 깊은 세례를 받은 스티글리츠는 그러나 평생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시기마다 바꾸어가며 사진이 가진 본래의 힘을 드러내고자 애쓴다. 그가 믿었던 사진의 힘은 “카메라에 의한 사실적 재현”이다. 기계를 통한 재현매체인 사진은 대상이 무엇이고, 작가의 태도가 어떠하든 사실적으로 그것을 재현한다. 이 힘을 사진의 한계로 파악할 것인가 아니면 무한한 가능성으로 파악할 것인가가 동시대의 사진觀이 된다. 한계로 볼 경우 이를 극복하기위해 제삼의 힘을 사진에 덧붙이도록 노력하게 될 것이며, 가능성으로 볼 경우 더욱 그 사실성에 매진하게 된다.


“새로운 이즘(ism)이란 그 前 시대에 있었던 이즘에 적극적인 찬동 또는 반발로 이루어진”다는 아놀드 하우저의 생각처럼, 스티글리츠의 이 믿음도 그 전시대의 생각들과 관계가 있다. 그가 1893년에 뉴욕에서 찍은 ‘5번가의 겨울’이라는 사진은 그 좋은 예이다. 눈이 오는 추운 뉴욕의 거리에서 대형 카메라로 촬영해 보지 않았기에 그가 얼마나 힘들게 이 사진을 찍었는지 생물학적으로 공감하기는 한계가 있으나, 절대로 쉽지 않았을 것임은 명확하다.

눈이 오거나 흐린 날이면 셔터스피드가 상대적으로 느리게 마련이다. 게다가 감광유제가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 커다란 카메라를 도로 위에 세우고 오랫동안을 기다려 달려오는 마차에 초점을 맞추고 이처럼 또렷하게 잡아내는 것이 날씨가 주는 추위 못지않게 매우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이 사진을 잘 살펴보면 앞, 뒤, 좌, 우 초점이 선명하며, 그 화면 구성이 아주 절묘해서 매우 생생한 느낌을 준다. 이는 그가 당시로서는 익숙하지 않았을 광각렌즈를 사용하였을 것임을 보여주며, 또 유리 건판과 감광재료를 다루는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었는지를 여실하게 증명해준다.

▲Winter on Fifth Avenue 는 1893년 2월 핸드 카메라(4*5)를 이용해 마차를 소재로 스냅을 하기 위해 눈보라 치는 거리에서 3시간이나 버틴 끝에 얻은 작품. 명암의 배분과 원근 구성이 완벽하고, 마차의 모습이 인상적으로 잘 표현됐다 ©
지금의 감광유제로도 15분의 1초 이하로 셔터스피드가 떨어졌을 터인데 이처럼 흔들림 없이 촬영된 것을 보면 필름이 증감현상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니까 부족하게 촬영을 해서 현상액에서 높은 온도와 긴 시간을 선택해 부족 된 노출을 정상화시켰을 것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베를린 유학당시 포겔교수로부터 배웠을 이 방식이 아니라면 이 사진의 제작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우리가 더욱 중요하게 보아야하는 것은 그가 촬영한 ‘대상 선택’이다. 당시는 픽토리얼리즘의 분위기가 매우 탱충했다.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보다 예술적인 대상을 선택하려 애썼다. 또 그 대상을 촬영하는 방식도 스냅의 형식이 아니라 꾸며지고 계획된 포즈와 공간을 선호했다. 마치 회화가 그런 것처럼. 그리고 그 사진에 부드러운 선을 가필하기도하고, 좀더 흐릿한 상을 얻기 위해 프린트하는 과정에 여타의 방식을 개입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스티글리츠는 자신이 촬영하고자 하는 대상을 거리에서 약속 없이 스냅으로 촬영한 것이다. 게다가 그 대상은 일상이었다.

화가나 사진가가 작업의 대상을 숭고한 것으로부터 일상적인 것으로 전환한다는 것은 그들의 세계관이 그처럼 전환되어지는 것과 등가의 관계를 갖는다. 무엇을 보고 살아갈 것인가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와 등가인 것과 같다. 서른이 채 안된 스티글리츠가 오랜 독일 유학에서 다시 뉴욕으로 돌아와 3년 만에 작업한 이 ‘5번가의 겨울’이라는 작업은 이 후에 ‘삼등선실’ 혹은 ‘종착역’등의 사진과 같은 선상의 작업이다. 세기 말과 세기 초에 세상을 다른 관념의 필터 없이 스트레이트하게 보겠다는 생각은 그의 삶이 매우 스트레이트 할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스티글리츠의 사진 활동은 이처럼 작업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독일서 이탈리아를 거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곧 ‘뉴욕 아마추어사진가 클럽’에 회장으로 피선되어 활동을 시작한다. 그리고 두 번에 걸쳐 기관지인 ‘The American Photographer’와 ‘Camera Note’의 편집장이 되어 미국의 사진을 소개하는데 힘을 기울인다.

그리고 이 두 번의 출판/인쇄경험을 바탕으로 1903년에는 사진의 역사에 길이 남을 ‘Camera Work’를 창간하기에 이른다. 이번에는 사재를 털어서 만들었다. 이때로부터 1917년까지 15년 동안 총 50호를 발행한 이 사진 잡지는 그러나 단순한 저널이 아니었다. 아직 망판인쇄가 채 활용되기 이전이어서 이기도 하지만, 스티글리츠는 이 잡지에 개제할 사진을 포토 그라뷰어 프린트(Photo Gravure Print, 요판사진인쇄술)로 만들어 하나하나 손으로 붙인다.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표지를 동료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컨이 디자인한 이 잡지는 두개의 층위로 되어있다. 한 장의 종이에는 활판으로 글을 인쇄하고, 다음 페이지에는 위에서 말한 방식의 사진을 붙여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사진은 얇은 일본종이에 프린트 된 것이라 책의 전체 두께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500부 한정판인 것이 당연한 이 책은 단지 사진 만이 아니라 당시 유럽 예술계를 뜨겁게 달구었던 큐비즘과 그 큐비즘에 정신적인 영향을 주었던 아프리카 니그로예술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1914년에 자신의 ‘291화랑’에서 ‘아프리카 조각’ 전시를 하고는 1916년 카메라 워크에 마리우스 드 자야스(Marius de Zayas)의 ‘아프리카 니그로 미술 : 현대 미술에 끼친 영향’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는 당시 유럽에서 ‘야수파’ 혹은 ‘표현주의’로 알려지기 시작한 매우 급진적이며 새로운 방식의 미술과 그 미술에 영향을 준 아프리카 니그로 예술에 스티글리츠가 매우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하는 사건이며, 동시에 그가 지닌 아방가르드적인 성향을 상기시킨다. 이 카메라 워크는 신예 사진가인 27세의 폴 스트랜드(Paul Strand)를 49호와 50호에서 특집으로 다루고 그 막을 내린다. 이 폴 스트랜드의 사진은 전적으로 스트레이트한 사진이었다.


스티글리츠의 삶은 이 후에도 여러 번 변화를 겪는다. 그중에서도 1920년도 이후에 이큐벌런트(equivalent)라는 개념을 가지고 하늘의 구름을 연속적으로 찍는 작업은 그가 사진을 통해 상징과 상상을 무기로 삼는 예술로의 진입에 얼마나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반영한다. 내게 개인적으로는 그다지 큰 관심을 주지 못하는 이 작업은 그러나 무엇이든 그대로 복제해내는 힘 밖에는 없지 않냐는 사진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일거에 무력화 시킨 그런 작업이다.


이제 스티글리츠는 사진 안에서 고전이 되어간다. 지금 뤼미에르 갤러리에서 전시되고 있는 그의 사진들과 그리고 동시대의 포토시세션 그룹의 사진들도 그렇다. 하지만 그가 꿈꾸었던 열정의 사진은 여전히 그대로 거기에 스며져있다. 나아가, 최근 들어 미국의 사진이 끝 갈데없이 커지고,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서는 듯이 무질서 해지는 그 바탕에는 반드시 스티글리츠와 동시대의 사진가들이 있다. 그는 파리의 으젠느 앗제와 달리, 함브르크의 하인리히 찔레와 달리 ‘각성된’ 사진의 리얼리스트였기에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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