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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진한 풍경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
순진한 풍경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10.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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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종족집단의 경관과 장소』

▲『장소와 장소상실』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 외 옮김┃ 논형 刊┃ 2005┃ 352쪽 『종족집단의 경관과 장소』 전종한 지음┃ 논형 刊┃ 2005┃ 328쪽 ©

장소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생활세계이자 인간 실존의 근본적인 토대이다. 인간답다는 것은 의미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며,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장소로부터 뿌리뽑힌” 인간의 현재 지적

그러나 오늘날의 삶은 장소로부터 뿌리 뽑혀있다. 장소에 대한 통찰을 통해 삶의 직접성을 깨닫기란 대단히 어려워진 것이다. 1976년 출간된 인문지리서의 고전, ‘장소와 장소상실’은 장소의 진정성을 물음에 붙임으로서, 역으로 당시 드러나기 시작한 ‘무장소성’(placeness)을 들춰 보인다.

저자는 디즈니랜드 같은 대규모 오락공원으로 대표되는 무장소성의 포스트모던 경관이 미학적 대중주의, 문화적 생산물의 깊이없음, 의미의 해체, 역사성의 빈곤, 중심의 분산, 정서의 고갈 등을 특징으로 하고 있음을 분석하면서, 이를 토대로 장소경험과 현대경관을 해석하는 개념과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 책은 출간된지 30년이 지나도록 현대 경관해석의 가장 기본적인 통찰을 놓치지 않고 있다.

오늘날 인문지리학계는 지표상의 형태적 요소를 매개로 공간을 설명하기보다는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공간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사회 속에 감추어진 공간적 차원과 공간에 함축된 사회적 의미를 겹쳐서 읽어냄으로써 지리를 삶 속에서 조망하는 새로운 관점을 도출해내고 있다.

‘종족집단의 경관과 장소’는 국내 소장 지리학자가 종족집단을 둘러싸고 전개된 경관과 장소의 파노라마를 전개시키고 있는 사유의 場이다.

저자(전종한 박사)는 종족내 권력의 핵심이었던 종가, 죽어서까지 그 배후에 자리하며 종가의 권위를 지켜온 사당과 조성묘소, 종족의 집단의식을 표상하는 종족마을들, 사회 관계망과 문화정치의 장이었던 각 지방의 정자와 서원 등을 살피면서 당대의 사회와 정치, 순진한 의미의 저편에 감추어진 권력과 지식의 관계, 이데올로기와 담론의 세계를 파헤치고 있다.

가령 전남 보성으로부터 충북 청원군 현도면으로 그 근거지를 완전히 바꾼 寶城 吳氏를 사례로 종족집단의 공간이동 과정을 추적한 제4장은 흥미로운 사실을 밝혀낸다.

본관인 보성 지방에는 단 한곳의 종족촌락이 분포할 뿐인데, 宗派가 정착한 문의 및 청주 지방에 무려 여덟 곳의 종족촌락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 그것.

저자는 이를 통해 종족촌락이 발생하는 장소는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던 조상의 출신지인 경우가 많고, 이것은 정치적 현달이 마을 단위의 토지 확보를 가능하게 해준 유력한 요인이라는 점을 의미한다고 강조한다.

종족집단의 형성에 얽힌 권력 분석

저자는 또한 매천 황현으로부터 조선사회의 세가지 폐단 중의 하나인 ‘호서지방의 사대부’로 거론된 바 있는 ‘충청도 양반’의 공간적 실체를 찾아서 떠난다. 그는 황현이 일컬은 ‘호서지방’이 바로 연산~회덕을 중심으로 그 세력이 미치는 영역이며 시간적 길이는 대략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라는 점을 밝혀낸다.

이 시간적 길이는 이 지역사회를 형성한 주요 종족집단들이 정착초기부터 거주지를 확대하고 사회적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서 외부 세계화 사회적, 공간적으로 차별화된 시기를 일컫는다. 또한 저자는 연산 지역에서 광산김씨가 17세기에 이르러 생원·진사 합격자의 37%를 차지했다는 점, 회덕에서는 16세기부터 은진송씨가 합격자로 배출되기 시작해 19세기에는 70%에 이르는 전체합격자 대비 비율을 기록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경관과 장소는 사회적 본질 함축한다

그것은 외부에서 들어온 이들이 연산서씨와 회덕황씨라는 두 토착 성씨가문을 축출하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점을 환기시킨다. 나아가 저자는 이들 유력 종족집단이 시기별로 앞서거니 뒷서기니 ‘지역화’하는 과정 속에서 그들 사이의 상대적 위계관계를 재구성하기도 한다. 저자는 “종족집단은 먼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그리고 모든 개인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줄기를 차지하는 집단적 실체”라는 점을 이번 작업을 통해 잘 증명해보인다.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무심코 지나쳐버리는 종족집단의 경관과 장소는 바로 한반도에서 엮어온 우리 삶의 사회적 본질과 역사성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 책이 앞의 에드워드 렐프의 선행저서와 통하는 지점은 바로 공간과 장소를 바라보는 시선에 사회성과 역사성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렐프는 “세상을 매우 기계적이고 추상적이며 세계를 쉽게 재현된 구조나 모델로 단순화해서, 일상적인 경험의 미묘함이나 의미를 소홀히 다룬다는 점”을 비판하고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의 분석들에도 여전히 유용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지리학에서 자라나온 사회분석의 ‘세밀함’이 실제로 어떤 것인지 느껴볼 흥미를 자극한다.
두 책을 통해 인문지리의 초기적 시각이 30년 동안 어떻게 발전했는지를 지켜보는 기회도 가질 수 있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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