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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된 신체는 어떤 기억을 남기는가
훼손된 신체는 어떤 기억을 남기는가
  • 박영수
  • 승인 2021.12.24 10: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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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인류학이 본 에티오피아 (상)

에티오피아 오로모 민족이 겪은 역사적 트라우마
선·도덕 상징하는 오른팔 잘리며 사회적 신체 훼손

아비 아머드 에티오피아 총리는 201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UN으로부터 에티오피아 내전이 종족말살적으로 격화되고 있다는 경고를 받았다. 티그라이 민족은 지난 30년간 에티오피아를 지배해왔다. 그런데 이제는 구별되어 직장에서 쫓겨나고 구금되는 민족 프로파일링(ethnic profiling)을 겪고 있고, 군인들에 의한 성폭행, 대량 난민 발생과 기근으로 인해 인도주의적 지원이 절실한 상황에 놓여있다.

인구 1억 명의 에티오피아는 80개가 넘는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연방국가다. 2007년 이후로 정치적 민감성 때문에 발표되지 않고 있는 민족별 인구 분포에 따르면, 오로모(34.4%), 암하라(27%), 소말리 (6.2%), 티그라이(6.1%) 민족이 포함돼 있다. 본 기고문은 국가폭력 사태로 민족간 갈등이 격화되던 계엄령 하의 에티오피아에서 2015년부터 2017년까지 수행한 현장연구를 토대로, 내전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역사적 기억의 한 단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팔과 가슴을 자르는 학살을 자행

오로모 민족이 주민의 다수를 구성하고 있는 오로미아 주의 아르시 존에 위치한 시골 읍내 이테야에는 1886년에 인근 마을 아놀레에서 일어난 학살의 장소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에티오피아 왕국 메넬릭 2세의 군대는 5년 넘게 저항하던 아르시 오로모인들의 팔과 가슴을 자르는 학살을 자행했다.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에티오피아의 정복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오로모인들의 인명이 희생되었고, 그들의 드넓은 땅은 에티오피아 귀족과 군인들의 소유가 되었다. 그리고 한 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아놀레 학살에 대한 기억은 국가에 의해 억압받아왔다. 

2014년 저널리스트 엘리아스 게브루가 아놀레 기념공원이 민족간 분열을 조장한다는 사설을 썼다가, 그의 글이 학생 시위와 관련 있다고 에티오피아 정부에 의해 감옥에 갇히는 사건이 있었다. 한 세기가 넘는 시간이 지났지만, 잔혹하게 훼손된 오로모 선조들의 몸에 대한 기억은 이야기와 손동작, 기념공원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졌다. 오로모민족의 역사적 트라우마는 이들이 겪어 온 국가폭력, 토지수탈, 강제이주, 경제적 빈곤, 사회적 차별을 통해 끊임없이 재경험 되어왔다.

 

아놀레 학살 기념공원 안내 표지판. 사진=박영수

2015년 집권여당이 압승한 부정선거에 대한 항의로 시작된 시위는, 아디스아바바 확장계획으로 인해 격화됐다. 오로미아 주의 주요한 산업이 밀집한 수도권과 오로모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종교적 성지 비쇼프투를 수도 아디스아바바로 넘긴다는 확장계획은, 오로모인들에게는 토지수탈과 사회경제적 차별의 역사가 되풀이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후 2년 동안 시민들과 학생들의 비폭력 시위와 폭력적인 공권력의 진압이 계속되었다.

2016년 리우 올림픽 마라톤 은메달리스트 페이사 릴레사는 결승선에서 오로모인에 대한 학살과 구금에 대한 항의로 두 팔을 ‘X’자로 교차하여 오로모 시위대에 대한 국가폭력 사태를 전세계에 알렸다. 2016년 10월 2일, 비쇼프투에서 오로모 추수 감사절 의례인 이레차 행사를 위해 모인 군중들을 향해 헬기 사격이 자행되었고, 300명이 넘는 오로모 시위대의 인명이 희생되었다. 비쇼프투에서 시체로 돌아온 희생자 어머니들의 곡소리가 며칠 동안 마을을 가득메웠고, 무기고를 탈취한 거리의 시위대는 경찰과 군인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 당했으며, 정부여당 당원 소유의 호텔과 외국 자본의 사탕수수밭은 시위대에 의해 불질러졌다. 수많은 마을 청년들이 아무런 기록 없이 체포되거나 실종되고 망명을 떠났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했고, 통금과 수색, 집합 금지, 인터넷 중단, 무장군인의 감시는 마을의 일상이 되었다. 몇몇 오로모 사람들은 이 비극적인 정치적 사태를 아놀레 학살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에 빗대어 ‘이레차 학살’이라고 불렀다.

 

피로 물든 시위 사태는 인터넷으로 확산

피로 물든 오로모 시위대의 훼손된 신체 사진들이 페이스붘과 오로모 디아스포라 미디어를 통해 인터넷 상에서 빠르게 확산되었다. 아르시 오로모 사람들은 국가폭력 사태의 슬픔과 두려움, 분노 앞에서, 자신의 왼쪽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자르는 몸짓을 하며, 오로모 인들의 죽음 앞에서 자신의 팔이 다시 잘려나가는 것과 같은 고통을 느낀다고 호소했다. 오로모 인들은 오른쪽 어깨를 서로 부딪히며 인사를 나누고 음식을 먹을 때는 오른손으로 먹으며, 오로모어로 오른쪽은 선과 도덕, 정치적 법적 권리를 의미한다. 오로모 인에게 오른팔이 잘린다는 것은, 그들의 육체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체까지 동시에 훼손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팔을 자르는 제스처를 통해 아놀레 학살의 기억을 현재의 국가폭력 사태와 연결하며, 선조들이 아놀레에서 경험했던 고통을 아직도 아르시 오로모 인들이 느끼고 있으며, 여전히 백년전 그들의 땅을 빼앗아 갔던 총을 든 자들의 지배 체제하에 살고 있다고 분노했다. 훼손된 신체의 이미지들은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아놀레 학살 기념공원에는 잘린 오른 손이 잘린 가슴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각이 세워져 있다. 잘린 가슴을 형상화한 녹색 반구의 건물로 들어서면 학살의 현장이 재현되어 있다. 동굴처럼 생긴 깊은 어둠 속을 따라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깊은 숲속으로 둘러싸여 소리가 반향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학살의 현장을 새롭게 재경험할 수 있는 공간이 조성된 것이다. 기념공원이 조성되기 이전에도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던 오로모 후손들이 조상들이 묻힌 땅을 찾아 이곳에 찾아와서 제사를 지내왔다. 아르시 출신 정치인으로 하원의장이었던 압바둘라 감마다는 아놀레 역사에 대한 책과 다큐멘터리를 만들었고, 아놀레 기념공원이 2014년에 완공되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다. 아놀레 기념동상은 오로모 인들의 역사적 트라우마에 강렬한 잔상을 남겼고, 오로모 정치 세력화의 배경이 되는 이미지를 제공했다.  

 

인구 1억 명의 에티오피아에서 오로모 민족은 인구 3천만 명이 넘는 다수 민족이다. 하지만 1886년에 있었던 아놀레 학살에 대한 역사적 트라우마가 최근의 정치적 폭력으로 재현되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아놀레 학살 기념공원에는 잘린 오른 손이 잘린 가슴을 들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거대한 조각(오른쪽)이 세워져 있다. 사진=박영수

아놀레 기념공원의 마지막 코스는 학살의 장소에서 다시 바깥 세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계단은 오로모 전통 정치체제인 가다체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8계단씩 5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8년씩 동년배집단을 구성한 오로모 전통사회에서는 5번의 순환을 거치면, 마을의 지도자가 되었기 때문에, 8년마다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정치, 종교, 군사, 법 등의 영역을 각각 담당한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권력이 분산되어 있었다. 그들은 민주주의적인 과거의 자신들의 전통을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과거로부터 민주화된 미래를 꿈꾸고 있었다. 

가다 체제 하에서 분쟁은 신성한 오다 나무 아래서 평화롭게 조정되었다. 거대한 오다 나무는 죽은 자들의 영혼과 산자들이 의례를 통해 만나는 곳이었고, 선조부터 후손들까지 오로모의 족보를 형상화한 사회적 신체였다. 오다나무 아래서 평화를 기원하는 이레차 추수감사절 의례와 8년 주기로 이뤄졌던 정권이양 의례가 행해졌고, 아놀레 학살과 이레차 학살도 오다나무 아래서 자행되었다. 아르시 오로모인들은 오다 나무 아래서 모든 마을 행사를 시작하며, 오로모 민족 전체와 에티오피아,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 함께 기도했다. 이를 통해 훼손된 오로모의 사회적 신체를 회복하고자 했다. 

2018년 계엄령 하에서도 확산되던 전국적인 시위 속에, 하일레마리암 데살렌 총리가 물러나고, 아비 아머드가 최초의 오로모 출신 총리가 되었다. 민족간 갈등에 기반한 민족정치를 극복하고자 하는 아비 총리의 노력은, 30년간 정치·경제·군사 권력을 독점해 왔던 티그라이민족해방전선(TPLF) 세력의 저항과 충돌하여 내전으로 이어졌다. 1974년부터 91년까지 에티오피아를 지배한 사회주의 더그 정권의 핍박 속에 강제이주와 대기근의 막대한 역사적 트라우마의 피해자였던 티그라이 인들은, 다른 민족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핍박한 가해자의 위치에 섰다가, 다시 새로운 내전의 피해자로 전락했다. 에티오피아 내전으로 이어진 일련의 상황은 신체적 훼손에 깊이 새겨져 민족간 갈등과 정치적 폭력의 악순환의 근원이 되고 있는 역사적 트라우마를 극복할 사회적 치유의 과정을 모색할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다. 

 

 

 

박영수
해버퍼드칼리지 의료인문학 교수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베를린자유대와 런던대(UCL)에서 박사후 연구원으로 일했다. 『아프면 보이는 것들』(공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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