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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혁 위해 타협도 기꺼이…옥타비아누스 “천천히 서둘러라”
변혁 위해 타협도 기꺼이…옥타비아누스 “천천히 서둘러라”
  • 서영식
  • 승인 2021.12.23 09: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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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물로 읽는 리더의 정신

공공성을 명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려고 했던 정치인
공직 사퇴·원로원에 권한 이양으로 존엄한 자로 불려

우리 인류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리더의 명멸을 목격해왔다. 그리고 그들의 성공으로부터 지혜를 얻거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고자 애쓰곤 한다.

 

옥타비아누스(Gaius Julius Caesar Octavianus, BC 63∼AD 14)는 서양 역사의 흐름과 방향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 영웅들 중에서도 상석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주지하듯이 그는 양아버지 카이사르(BC 100∼44)의 피살사건 직후 10대 중반의 어린 나이에 권력투쟁의 한복판에 뛰어들어야 하는 운명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옥타비아누스의 대중적 인지도는 정적들과 이른바 2차 삼두정(BC43∼33) 체제를 주도했으며, 악티움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물리치기까지 10여 년 세월 동안 발생했던 다양한 에피소드를 통해 주로 형성됐다. 그러나 그의 지도자로서의 자세와 노력 그리고 업적은 오히려 대중의 관심에서는 어느 정도 벗어나 있는 로마제국 일인자로서의 통치시기에 훨씬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집권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지난 백여 년간의 내전으로 황폐화된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러한 노력은 통치기간 내내 지속된다. 따라서 그는 재임 후반기에 “내가 발견한 로마는 벽돌로 되어 있었지만,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외칠 수 있었다. 도로 정비, 목욕탕 신축, 수로 건설 등 그가 행한 대규모 건축사업과 시설투자를 칼로 거머쥔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한 거래적 리더의 노회한 책략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가 증거하듯이 당시의 정치인들은 오직 권력투쟁에 몰두하거나, 업적 과시를 위해 웅장하지만 실용성은 거의 없는 기념물을 세우는 일에만 열을 올렸다. 반면에 옥타비아누스는 시민들의 생활에 구체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다양한 도시개발사업을 통해 삶의 질을 개선하고자 노력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동시대의 수많은 야심가들 중에서 공적인 ‘이익’(utilitas)’, 현대적 용어로는 ‘공공성’(publicness)의 의미를 가장 명확하게 이해하고 실천하려 했던 인물이다.

다른 한편, 카이사르의 양자라는 사실은 옥타비아누스의 정치활동 기간 내내 양날의 칼이 되었다. 그는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면서도 양부의 후광을 입고 단번에 로마 정치의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집권 후에도 공화정 폐지와 왕정복고를 노린다는 의심 속에서 죽임을 당한 기피 인물의 양자라는 꼬리표를 쉽게 떼어낼 수 없었다. 정치천재 옥타비아누스는 이 애매한 상황을 극복하고 진정한 리더로 인정받기 위해 정적들이 상상하지 못한 정공법을 택한다. 그는 집권 3년차를 맞이한 BC 27년 초 원로원에 출석하여 공직 사퇴와 함께 국정에 관한 모든 권한을 원로원에 이양한다고 공식적으로 선언했던 것이다. 역사는 이날의 사건을 이른바 ‘공화정 회복’(res publica restituta) 선언으로 기술하고 있다.

 

오히려 권력을 공고히 해준 공화정 회복

옥타비아누스를 비판하는 입장에서는 그의 사퇴 선언은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는 시도의 출발점일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국가운영 시스템인 공화정을 껍데기만 남겨둔 채 이른바 ‘원수정’(principatus)의 이름으로 사실상 제정(帝政) 체제를 도입하기 위한 지능적 퍼포먼스에 불과했다고 힐난하기도 한다. 어쨌든 옥타비아누스는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을 향한 엘리트 귀족층의 의구심을 상당부분 해소할 수 있었으며, ‘존엄한 자’(Augustus)라는 칭호까지 수여받는다.

또한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로원의 권위와 역할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으며, 실제로도 귀족과 평민계층 모두를 포용하고 국정에 동참시키는 방안을 나름대로 모색하였다. 즉 옥타비아누스는 집권기간 동안 원로원과 민회를 유지하고 적당히 존중함으로써 내부의 안정을 도모하면서도, 다른 한편 단계적이고 철저한 행정개혁을 통해 로마제국 전역이 향후 명확한 비전과 시스템에 따라 통치될 수 있도록 자신의 좌우명처럼 “천천히 서둘렀던”(festina lente) 것이다.

 

죽임 당한 공화파 후손을 포용하다

나아가 옥타비아누스는 정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고 통치에 자신감을 갖게 되자, 권력투쟁 기간 동안 정치적으로 대립하다가 죽임을 당했던 공화파 인물들의 후손에게 관직을 수여함으로써 그들을 포용하고 정치적으로 화해하는 정책을 실시한다. 대표적으로 그는 키케로(BC 106-43)의 큰아들이 로마제국 최고위직인 집정관과 속주 총독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키케로는 살아서는 공화정의 원로이자 실세로서 국정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내전 초기 옥타비아누스의 묵인 하에 안토니우스에 의해 처형당한 후에는 귀족들 사이에서 공화정 수호를 위해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영웅으로 은밀하게 평가받던 인물이다.

흔히 리더십의 본질적인 요소로 ‘목표 달성’과 ‘영향력’ 두 가지가 거론된다. 리더십이란 ‘특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치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옥타비아누스는 이러한 리더십의 조건을 최상의 수준에서 충족시킨 인물이다. 그는 로마인들이 열망했던 미래 즉 ‘평화로운 세상’(pax romana)을 새롭게 만들어서 보여주는 변혁적 리더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다른 한 편 그는 권력투쟁에서의 승리와 정치적 이상의 궁극적 실현을 위해 현실적인 타협과 양보도 주저하지 않는 거래적 리더의 행보를 보였다. 이로 인해 그는 지나치게 현실주의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동시대인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제국화 되어가는 로마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서 있음을 자각한 리더였다. 또한 그는 최상의 자제력과 불굴의 인내심 그리고 한없이 신중하고 겸손한 태도를 무기로 공익과 시대정신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한국사회는 지난 세기 산업화와 민주화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21세기에 접어든지 2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날 여전히 수많은 난제들에 포위되어 있는 형국이다. 누구나 리더를 자임하면서도 정작 ‘리더에게 요구되는 정신’(leaderspirit)을 소유하고 실천하는 인물은 눈을 씻고도 찾아보기 힘든 까닭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이 책임진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비전을 찾아내서 공유하며 구성원과 함께 도달하기 위해 솔선수범할 줄 아는 리더를 필요로 하고 있다. 이천여 년 전 옥타비아누스가 지중해 일대에서 보여준 리더로서의 통찰과 실천궁행은21세기 한국사회에 필요한 지도자상 정립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서영식
충남대 교수·서양고전철학

스위스 루체른대에서 서양고전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충남대 리더스피릿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또한 한국동서철학회 편집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공공성과 리더스피릿』(공저, 2021), 『고전의 창으로 본 리더스피릿』(공저, 2021), 『플라톤철학의 실천이성담론』(2017), 『청춘의 철학』(2016) 등 10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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