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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자애로운 어머니일까, 가혹한 계모일까
자연은 자애로운 어머니일까, 가혹한 계모일까
  • 안재원
  • 승인 2021.12.22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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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_ 선도 국가란 무엇인가 ②

"선도국가 논의는 기후 위기 시대에 한 국가와 한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존경받는 나라이며, 아울러 물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를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은 모색이다."

 

지난 12월 7일 <교수신문>에서 김월회 서울대 교수는 “다른 나라와의 비교를 통해 우월한 위치에 서는 국가, 곧 선두국가(leading nation)로서의 선도국가가 아니라, ‘첫발을 내딛는 국가(first mover nation)’를 선도국가”로 규정한다. 이에 대한 보충으로 글을 시작하고자 한다. 맞는 말이다. 이른바 ‘선진국’이라 불리는 나라를 선도국가라 부르지 않는다. 부자 나라들을 선진국이라 부를 수 있다. 하지만 세계화의 시대에 인류와 세계,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존경과 행해야 할 의무를 지지 않으려는 나라를 선도국가로 부를 수는 없다. 경제적으로 돈이 많다 해서, 군사적으로 힘이 세다 해서 그 나라를 선도국가라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단적으로 지금 인류에게 닥친 기후 위기는 상품의 생산 양식, 소비 방식, 유통 구조, 더 나아가 소유 방식의 재조정과 재구성을 강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세의 도입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은 강제적인 구조 변경과 토대 전환은 지금 누리고 있는 경제적인 풍요를 이전처럼 누릴 수 없게 되었다는 점에서, 지금의 부자 나라들이 10년 뒤에도 ‘선진국’ 딱지를 달고 있을지 잘 모르겠다. 

패권국가를 자임했던 ‘선진국’이 선도국가는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인류와 세계, 자연에 대한 존경과 의무는 부자 나라와 가난한 나라를 구분하지 않는다. 예컨대 자연에 대한 의무는 돈이 많든 적든, 힘이 세든 약하든, 생존을 위해서든 지속적인 번영을 위해서든 필수 조건이 되어 버렸기에. 이런 일에 먼저 앞장서는 나라가 선도국가라 부른다. 돈이 많고 힘이 센 패권국가임을 자임하고, 그렇게 행세했던 이른바 선진국이 선도국가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힌다. 이런 의미에서, 선도국가 논의는 기후 위기 시대에 한 국가와 한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고, 더 나아가 존경받는 나라이며, 아울러 물적 풍요와 정신적 여유를 공유하고 향유할 수 있는지에 대한 작은 모색이다.  

각설하고, 자연이 예컨대 기후 위기를 통해서 보내는 신호와 메시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다면, 지금의 선진국들이 10년 뒤에, 조금 길게 잡아서 30년 뒤에도, 부자나라라는 호칭을 유지할 수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자연의 설득을 먼저 자발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말이다. 자연도 처음에는 설득했다.

하지만 지금은 강제하고 있다. 이를테면, 코로나19를 통해서 말이다. 코로나19도 어쩌면 아직은 자연이 인간을 설득하는 한 수단일 지도 모르겠다. 이런 설득에도 인간이 자연의 설득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면, 그때는 자연은 강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설득과 요구를 먼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나라가 선도국가이다.

세계화 시대에 인류와 세계, 자연에 대해 가져야 할 존경과 의무를 지지 않으려는 나라를 선도국가로 부를 수는 없다. 사진=펙셀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돈이 많고 힘이 센 패권 국가일지도, ‘선진국’ 호칭에 우쭐거리는 나라일지라도 자연의 강압에 의해서 선도당하는 나라로 떨어질 것이다. 이런 나라를 뭐라 불러야 할까. ‘바보 나라’ 혹은 ‘오만한 나라’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자연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지켜주며 품어주는 어머니가 아니라 차가운 눈초리로 인간을 째려보는 계모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자연학자 플리니우스(Plinius, 서기 23-79년)의 말이다. 
  
      첫 자리는 당연히 인간에게 주어져야 맞을 것입니다. 대자연은 인간을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자연은 자신이 제공한 선물들의 반대급부로 잔인한 댓가을 치르게 한다. 그래서 자연을 자애로운 어머니로 불러야 할지 아니면 가혹한 계모로 불러야 할지 가늠이 안 될 정도이다. (플리니우스 『자연학』 제7권 1장)

 “잔인한 댓가”라는 언표가 눈에 띤다. 지금 인간이 문명의 이름으로 자연에게 치러야 할 값이 잔인할 정도로 크기에 그렇다. 그 대가가 더 커지기 전에 먼저 움직이는 나라가 선도국가이다. 늦으면 늦을수록 치러야 할 대가가 눈덩이처럼 커질 것이다. 그렇다면, “반대급부”의 대가가 큰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이에 대한 플리니우스의 답변이다.     
   
      자연은 다른 모든 생명들 가운데에서 오로지 인간만은 다른 생명들로부터 빌린 자원들로 감싸주었다. 다른 것들에게는 각자에게 맞는 보호 장비를 제공했다. 각질, 껍질, 가시, 가죽, 모피, 거센 털, 머리털, 솜털, 깃털, 비늘, 양모가 그것들이다. 심지어 나무줄기에게도 껍질을 주어서 추위와 더위를 막아주었다. 가끔은 두겹으로 감싸주기도 한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만은 태어난 날부터 벌거벗은 채로 벌거벗은 땅에 내던졌다. 곧장 소리내어 울고 눈물을 흘리도록 내버려 두었다. 자연이 막 태어난 인간에게 준 것은 눈물과 울음이었다.

헤라클레스에게 맹세코, 조숙하다 해도 아무리 빠르다 해도 웃음은 태어난 지 40일이 되기 전에는 주지 않았다. 이렇게 빛을 보는 첫 시작부터 온몸이 사슬과 끈에 의해서 묶인다. 그래서 운좋게 태어났음에도 손과 발이 결박된 채로 누워있는 동물이 인간이다. 울면서 말이다. 장차 다른 생명들을 지배하게 될 동물이 눈물을 흘리면서 말이다. 태어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간은 이런 처벌을 받으면서 삶을 시작한다. 인간은 이런 시작으로부터 우월함에 이르도록 태어났다고 믿는 사람들의 정신은 얼마나 미친 것일까. (플리니우스 『자연학』 제7권 2~3장)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게, 자연에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이를 갚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사진=픽사베이

자연이 계모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

두 점이 인상적이다. 하나는 인간이 “벌거벗은 동물”(animal nudum)로 규정된다는 점이다.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은 자연이 다른 생명들로부터 빌려준 “자원” 덕분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것은 어떤 것도 없었다. 오직 눈물과 울음만이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다.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웃음도 태어나서 40여일 뒤에나 주어진다. 이런 언급은 인간이 아주 보잘 것 없는 동물에 불과함을 보여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자연이 이렇게 초라하고 무력한 동물에게 무상으로 준 것이 아니라 빌려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언젠가는 갚아야 할 혹은 치러야 할 반대급부의 대가들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이제는 몸으로 직접 겪으면서 확인하고 있는 기후 위기가 그 대가 중에 하나일 것이다. 자연이 빌려준 자원을 되갚지 않은 것에 대한 반대급부가 실은 기후 위기이기에. 크고 작은 많은 다른 생명들이 인간에게 자신들을 자원으로 빌려주었지만, 정작 자신들은 멸종되었거나 멸종의 위기에 처하고 말았다. 자연이 계모의 얼굴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인간은 다른 생명들에게, 자연에 큰 빚을 지고 있는데, 이를 갚지 않는다면, 어찌 될까? 처벌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어쩌면 지금이 아닌가 싶다. 선도국가란 자연에 대해 인간이 지은 빚을 갚는 일에 앞장서는 나라를 말한다. 

다른 하나는, 인간이 전혀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우월’에 해당하는 라틴어 원어는 ‘superbia’이다. 말 그대로 ‘위에 있다’는 뜻을 지닌 단어로, 때로 탁월함, 때로 오만함을 뜻하기도 한다. 플리니우스에 따르면, 인간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함이라는 것이다. 자연이 아무 것도 아닌 동물을 ‘만물의 영장’의 위치에 놓아준 것처럼 인간은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착각에 불과하다. 자신의 분수를 모르는 인간이 그저 오만한 동물에 불과함을 플리니우스는 ‘superbia’를 통해서 말장난을 하고 있다. 이것이 과연 말장난에 불과한 것일까. 1978년 10월 5일에 선포된 「자연보호헌장」의 일부이다.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혜택 속에서 살고 자연으로 돌아간다. 하늘과 땅과 바다와 이  속의 온갖 것들이 우리 모두의 삶의 자원이다. 자연은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원천으로서 오묘한 법칙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 질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 그러나 산업문명의 발달과 인구의 팽창에 따른 공기의 오염, 물의 오탁, 녹지의 황폐와 인간의 무분별한 훼손 등으로 자연의 평형이 상실되어 생활환경이 악화됨으로써 인간과 모든 생물의 생존까지 위협을 받고 있다.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오만한 주장부터 폐기해야

이 「자연보호헌장」이 아직도 유효한지는 잘 모르겠다. 이것마저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기에, 그 취지는 아직도 살아있다 하겠다. 하지만 플리니우스의 시각에서 「헌장」을 다시 보면, 인간이 얼마나 오만한 동물인지가 잘 드러난다. “자연을 보호”하겠다니, “온갖 것들이 우리 모두의 삶의 자원이”라니, 이 얼마나 오만하고 상도(商道)에 어긋난 말인가. 자연은 인간에게 “삶의 자원”을 공짜로 준 것이 아니다. 빌려준 것이다. 반드시 되갚아야 하는 것이다. 아닐 경우, 처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자연보호헌장」은 자연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보호를 받아야 할 대상이 인간-동물임을 망각한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인식을 보여준다. 그럴 수도 있다. 자연의 처벌이 당시에는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기에. 물론 「자연보호헌장」에는 자연이 어머니라는 인식을 담고 있다. 

하지만, 많이 약하다. 자연이 계모라는 인식을 놓쳤기 때문이다. 이제는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지금의 자연은 더 이상 어머니가 아니라 “가혹한 계모”라는 점을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간단하다. 자연을 보호하겠다는 오만한 주장부터 폐기해야 한다. 겸손하게 인간을 살려달라고 자연에게 간청하고 탄원해야 할 때이다. 예컨대, ‘탈탄소행동강령(Actio Decarbonitatis)’을 선언하고 실천에 옮겨야 할 때이다. 계모의 얼굴이 더 찡그려지지 않도록 말이다. 어머니의 얼굴로 인간을 돌봐주고 품어줄 수 있도록 말이다. 자연이 이렇게 마음을 되돌리는 일에 앞장서는 나라가 선도국가일 것이다.

어쩌면 자연은 그런 나라에게 경쟁에서 앞서 나갈 수 있는 이른바 성장과 번영의 기회를 보너스로 줄지도 모르겠다. 문명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을 빨리 찾도록 도와주고 싶은 것이 자연의 속마음일지도 모르겠다. 자연도 찡그린 계모의 얼굴을 계속 유지하고 싶지는 않을 것임이 분명하기에 하는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서양고전문헌학
서울대에서 언어학 학사와 서양고전학 석사를 했다. 독일 괴팅엔대 서양고전문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주요 저역서로 『인문정신이란 무엇인가』 『인문의 재발견』 『고전의 힘, 그 역사를 읽다』  『수사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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