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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9] 출판·예술에는 퍼졌으나, 노동운동에는 미미했던 영국의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69] 출판·예술에는 퍼졌으나, 노동운동에는 미미했던 영국의 아나키즘
  •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 승인 2021.12.13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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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스터튼
조셉 콘라드
헨리 시무어
크로포트킨
톰 만
제임스 라킨
노아 애블렛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의 『목요일이었던 남자』(The Man Who Was Thursday)
사진=위키미디어

1894년 그리니치 공원에서 폭탄이 터져 프랑스 아나키스트가 자폭한 것은 영국인들에게 아나키즘에 대한 혐오를 확인시켜주었다. 체스터튼(G. K. Chesterton, 1874~1936)의 『목요일이었던 남자』(The Man Who Was Thursday)와 콘라드(Joseph Conrad, 1857~1924)의 『비밀요원』(Secret Agent)은 이에 영향을 받아 아나키스트 테러리스트를 불길하게 묘사하기도 했다. 이는 앞에서 본 요한 모스트가 헨리 제임스(Henry James, 1843~1916)의 소설 『카시마시마의 공주』(The Princess of Cassimassima)에 소재를 제공한 것과 같다. 

당시 사회주의 동맹은 혁명적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다른 아나키스트가 생겨났다. 개인주의자인 시무어(Henry Seymour, 1860~1938)는 1885년에 처음으로 <아나키스트>(The Anarchist)를 출판하여 개인의 자유의 요새로 개인 소유에 대한 프루동과 터커(Benjamin Tucker, 1854~1939)의 견해를 표현했다. ‘영국 아나키스트서클’(English Anarchist Circle)을 창립한 시무어는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다른 저널인 <혁명 평론>(Revolutionary Review)도 계속 간행했다. 그는 개인적 소유가 자유에 불가결하고 합리적 교환제도는 사회적 해방에 중요한 열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장하는 아나키즘 운동의 주된 경향은 대륙에서처럼 코뮤니즘을 향한 것이었다. 괴짜 단 체터튼(Dan Chatterton, 1820~1895)은 1884년부터 1895년 사망할 때까지 그의 <체터튼의 코뮌-무신론적 코뮤니즘 스코처>(Chatterton's Commune - the Atheistic Communistic Scorcher)를 출판했다.

Freedom Press
사진=위키미디어

1886년에 시무어와 협력한 망명객 크로포트킨을 포함한 그룹은 <자유>(Freedom)지를 창간했는데 이 잡지는 가장 오래 운영된 아나키즘 저널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발행되고 있다. <자유>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아나키스트들은 시민들 서로 서로가 원조하고 자발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위해 일한다. 우리는 모든 정부와 경제 억압을 거부한다. 1936년부터 계속 발행되는 이 신문은 아나키즘을 보다 폭넓게 설명하고 아나키스트 사회에서만 인간의 자유가 번창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크로포트킨이 동료 혁명가들과 협력하는 동안 차이콥스키(Tike Nicholas Chaikovsky, 1851~1926)도 영국 아나키스트 운동에 포함되었다. 케임브리지 교육을 받은 샬롯 윌슨(Charlotte Wilson, 1854~1944)은 1886년에서 1895년까지 <자유> 편집자였다. 크로포트킨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동맹국을 지지한 탓에 그들과 결별할 때까지 그룹의 주요 지식인으로 남아 있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에 영국 아나키즘 운동이 절정이었을 때 유대인 공동체도 영국에서 가장 큰 아나키스트 그룹을 형성했다. 1885년에 이디시어(유럽 내륙 지방과 그 곳에서 미국으로 이주하여 간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언어) 저널 <노동자의 벗>(Arbeter Fraint)이 발행되었는데, 이 잡지는 1891년에 이르러 광범위한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아나키즘적 입장으로 옮겨갔다. 1895년 정치적 난민으로 런던에 온 루돌프 로커(Rudolf Rocker)는 이디시어를 배워 1898년 편집자가 됐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고 억류될 때까지 잡지를 냈다. 그 잡지는 1912년 작업장 노동자들이 성공적으로 파업을 하는 동안에 널리 읽혔다. 

유대인 아나키스트 그룹의 깃발
사진=위키미디어

1902년에는 영국과 파리에 ‘유대인 아나키스트 국제연합’(Federation of Jewish Anarchist Group)이 결성돼 1914년까지 활동했다. 유대인 아나키스트들은 문학 번역본을 출판했을 뿐만 아니라 노동자 교육을 위한 센터로 ‘주빌리가 연구소’(Jubilee Street Institute)를 만들었고, 복지와 교육 그룹으로 노동자 서클(The Worker’s Circle)을 설립했다.  

 

절대적 자유에 매료되면서도 테러리즘에 반발했던 예술가들

윌리엄 모리스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의 일부
사진= 위키미디어

 

1880년대와 90년대에 영국의 지성인과 예술가 사이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한 흥미가 컸댜.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1950)는 권위에 대한 태도 때문에 아나키즘이 불가능하다는 내용의 글을 ‘페이비언 소사이어티’(Fabian Society)와 시무어의 <아나키스트>에 기고했다. 모리스는 사회주의동맹과 밀접하게 관여했으며 아나키스트에게 가장 사랑받았던 소설인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를 썼다.

에드워드 카펜터는 기존의 억압적인 문명을 비판하며 ‘비정부 사회’를 촉구했다. 오스카 와일드는 습관적인 웅변과 재치로 개성의 중요성을 변호하고 <사회주의 아래 인간의 영혼>(The Soul of Man Under Socialism)에 대한 놀라운 그림을 제시했다. 헨리 솔트는 동물권을 주장하고 고드윈의 재산론을 재간행 했으며 셸리의 혁명적 비전을 홍보했다. 런던 문학계에서 가장 직접적인 아나키스트는 라파엘전파(Pre-Raphaelite) 화가인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Dante Gabriel Rossetti, 1828~1882)의 동생이자 작가인 윌리엄 마이클 로세티(William Michael Rossetti, 1829~1919))의 10대 딸들이었다.

올리비아(Olivia)와 헬런(Helen) 두 자매와 형제 아서(Arthur)는 <횃불: 아나키스트 코뮤니즘의 혁명적 잡지>(The Torch: A Revolutionary Journal of Anarchist Communism)를 집에서 출판했으며, 루이즈 미셸, 세바시티안 포레(Sebastien Faure), 말라테스타(Malatesta), 졸라(Zola), 옥타브 미르보(Octave Mirbeau) 및 젊은 휘퍼(Ford Madox Hueffer, 1873~1939)의 기사를 포함하여 피사로의 그림을 실었다. 많은 다른 세기말 작가들과 예술가들은 절대적 자유라는 아나키스트의 이상에 매료되었지만, 행위에 의한 선전이 자행한 테러리즘에는 반발했다. 

 

영국 노동운동에 침투하지 못했던 아나키즘

세계산업노동자연맹(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IWW 또는 워블리 - Wobblies)는 미국 시카고에 본부를 둔 노동조합이다. 핵심 강령은 모든 노동자들이 하나의 계급으로서 단일거대노조 아래 단결해야 하며, 노동자를 자본가의 임금노예가 되게 하는 임금제도는 붕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AFL(American Federation of Labor: 미국노동총동맹)의 보수적인 지도와 자본주의 수용에 불만을 품고 만들어졌다.
사진=위키미디어
 

반면 아나키즘은 영국 노동운동에는 거의 침투하지 못했다. 오언의 대국민통합노조의 반정치성에도 불구하고, 생디칼리슴은 영국에서 늦게 발전했고 개혁주의 노동조합 운동을 이기지 못했다. <산업 신디칼리스트>(The Industrial Syndicalisf, 1911)에서 톰 만(Tom Mann, 1856~1941)과 그의 동지들은 미국의 ‘세계산업노동자’(IWW: Industrial Workers of the World) 모델에 따라 산업별 노동조합의 형성을 장려하려 했으며 산업의 국유화와 반대되는 노동자 관리를 주장했다. 톰 만은 계급투쟁과 혁명적 노동자 운동을 옹호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법적 또는 국가적 지원이 있든 간에, 또는 단지 자발적이든 간에, 사용자와 장기간의 협정을 맺는 것을 거부할 것이고 전반적인 개선을 위해 싸울 모든 기회를 잡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아일랜드의 노동투사였던 제임스 라킨(James Larkin, 1874~1947)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의 숙련공 중심 노동조합과 달리 라킨은 비숙련공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사회주의의 혁명적 브랜드인 생디칼리슴을 옹호했으며 동정파업과 불매운동을 선호했다. 당시 아일랜드의 주류 노동조합 지도자들과 지식인들은 라킨에 반대했고 영국 정부의 탄압은 가혹했다.   

노아 애블렛(Noah Ablett, 1883~1935) 등이 사우스 웨일즈에서 익명으로 출판한 강력한 아나키즘 소책자 <광부의 다음 단계>(The Miners' Next Step, 1912)는 광부들이 광산을 통제할 수 있는 최저임금을 요구하고, 리더십 개념을 거부했다. “모든 지도자는 자신의 선의에도 불구하고 부패한다.” 그리고 노조를 최고 통제권을 갖는 지부와 순수한 행정 기관으로 분리해 새로운 사회의 세포가 될 것을 촉구했다. 애블렛은 자신의 주장을 과학적 노동조합주의라고 불렀다. 

<생디칼리스트>(The Syndicalist, 1912)와 관련된 또 다른 그룹은 보다 직접적으로 아나코-생디칼리스트의 영감을 받았으며 더 큰 분권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영국의 생디칼리슴은 소수 운동으로 그쳤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약해졌다. 비록 일부 아나키스트들은 뉴캐슬 근처의 클루스든 힐(Clousden Hill)과 코츠월드의 화이트웨이(Whiteway)와 같은 지역 사회에 참여했지만, 세기의 전환기에 적절한 아나키스트 운동은 길을 잃었다. 게다가 제1차대전을 맞아 크로포트킨처럼 동맹국을 지지하는 소수와 전쟁에 반대하는 소수로 분열되어 영국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4년까지 혼란에 빠졌다. <자유>는 1927년에 발간이 중단되었고 주로 런던, 셰필드, 사우스 웨일즈 및 글래스고에 노동계급 아나키스트의 일부만 남았다. 

아나키스트 운동이 다시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스페인 남북 전쟁이 시작된 뒤였다. 버넌 리처즈(Vernon Richards, 1815~2001)의 <스페인과 세계>(Spain and World)는 1936년에 출판되어 프리덤 출판사(Freedom Press)가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됐다. 전쟁 동안 프리덤 출판사 그룹은 전쟁 논평을 내놓았고, 그 결과 1944년에 폐간되었으며 편집자들도 군대에 불만을 퍼뜨린 혐의로 1943년에 투옥되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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