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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쟁점: 철학과 생태적 관점에서 보는 배아복제
학술쟁점: 철학과 생태적 관점에서 보는 배아복제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5.09.2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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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기세포, ‘암덩어리’ 가능성 … 진정한 ‘複製’란 없다

황우석 교수에 대한 비판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리둥절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황 교수팀의 연구성과가 제기한 윤리적인 문제, 실질적인 치료가능성 등에 대해 냉정한 질문들이 쏟아진다. ‘녹색평론’이 지난 7·8월호의 특집 ‘과학연구의 윤리와 사회적 책임’에서 이 문제를 다뤘고, ‘환경과생명’은 가을호에서 ‘황우석과 과학기술의 신화를 넘어서’를 통해 좀더 본격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진보평론’ 역시 가을호에서 ‘생명공학과 줄기세포 연구의 담론구조’라는 시론으로 분석을 시도했으며, ‘녹색평론’은 9·10월호에서 고삐를 늦추지 않고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역할’이라는 글을 통해 황우석 등 과학현상에 침묵하는 인문학자들을 질타하면서 논의의 맥락을 넓게 펼치고 있다.

이들은 크게 윤리적 쟁점과 과학적 쟁점으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다. 윤리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녹색평론 7·8월호에 ‘생명공학 시대와 인간의 미래’를 쓴 박충구 감리교신학대 교수(사회윤리학)다. 박 교수는 “황 교수가 배아의 도덕적 지위를 박탈했다”라고 말한다. 비록 정자 플러스 난자로 이뤄진 수정란이 아니더라도 배아는 엄연히 ‘인간’이라는 게 그의 주장 요지다. 그는 근거로 “복제양 돌리”를 든다. 즉, 그 배아가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나 박 교수의 논지는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운 게 사실. 그가 말하는 생명이 여타 실험실 동물을 포함한 것인지, 단지 인간배아를 의미하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또한 배아의 복제인간으로서의 발달가능성을 가지고 윤리적 문제를 삼는 것은, 심정적으로는 이해가 가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극단적인 논리이다. 배아의 현재성을 가지고 논의를 해야 극단적 대립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윤리적 쟁점은 배아복제가 배아와 여성의 난자를 수단화한다는 것. 촉진제를 놓아 여성에게서 난자를 과도하게 꺼내는 것에 대한 비판은 많은 동조를 얻고 있다. 명진숙 여성민우회 사무총장은 난자를 그런 식으로 빼내는 것보다 불임클리닉의 잉여배아를 연구에 이용하는 쪽이 낫지 않냐고 하면서도 “현재의 배아 관리가 엉망이며, 유출도 심하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그런데 명 씨의 주장 가운데도 모순이 발견되는데, 배아복제에 기초한 치료법이 엄청 비싸서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누릴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평등주의’는 위험한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치료혜택을 받을 경우 사회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점을 간과한 주장인 탓이다.

이런 윤리적 쟁점 말고도 황우석 교수가 넘어야 할 산은 많다. 황 교수는 “큰 대문은 다 열었고 사립문만 남았다”고 말했지만 말이다. 먼저 기술적인 난점이 많음에도 과학자들이 입을 다물고 있다는 주장들이 속속 제기된다. 박병상 풀꽃세상을위한모임 대표는 “복제했던 잔여배아를 활용했든 배아줄기세포는 안전과 안정성이 없다”고 주장한다. 복제배아에서 얻어낸 줄기세포는 어떤 조직체로 자랄 지 알 수 없고, 암세포가 될 우려도 있다는 것이 주장의 핵심. 박 대표는 “성체줄기세포는 럭비공 현상이 없고 안정적”이라며 배아복제를 통한 줄기세포를 연구하는 것은 기술적으로도 한계가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줄기세포를 통한 치료가 대부분 노인성 질환에 적용될 것인데, 이 경우 장기를 대체했을 때 몸 속 다른 장기들과 언밸런스가 되어서 더 위험할 수도 있다는 주장도 펴는데, 이것은 너무 앞으로 나간 게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황 교수의 연구와 함께 이런 부작용 및 부차적 치료환경에 대한 연구도 함께 진행될 것인데, 그 부분에 대한 전제가 빠져있기 때문.

‘환경과생명’ 특집논문들은 이 말고도 황 교수 연구에 대한 해외언론의 냉정한 비판보도도 소개하고 있어 균형추 역할을 해준다. 우선 김명진 성공회대 강사는 ‘황우석과 나쁜 언론’에서 서구 과학계가 황우석에게 열광한 진짜 이유에 대해 언급한다. 즉, 윤리적 법제가 엄격한 선진국 과학자들이 황우석 연구결과를 정부를 압박하기 위한 정치적 지렛대로 이용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서구 과학자들의 관심은 ‘질병치료’가 아니라 ‘유전병 메커니즘의 해명’에 있다는 지적이다. 특정 유전병이 전개되어 나가는 과정을 마음껏 연구할 수 있다는 것에 환호한 것이지, 결코 치료제 개발을 통한 돈벌이의 가능성을 본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김 박사는 ‘네이처’에서는 이미 “실제 치료까지는 수년이 걸릴 수도, 아예 그런 가능성이 도래하지 않을 수도 있다”라고 썼다는 점, 황 교수의 논문이 실린 ‘사이언스’조차 “과장광고를 하지 말고 환자들에게 솔직하라”라고 충고했다는 것을 인용하기도 했다.

국내 언론의 널뛰기식 보도, 장밋빛 미래에 치중한 보도, 민족정서 자극보도 등에 대해서는 김동광 박사를 비롯해 모든 필진들이 비판하고 있어, 국내 언론의 황우석 관련보도들이 심각한 수준임을 다시한번 환기시켰는데, 과학 쪽은 아무래도 대안언론이 필요한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지막 쟁점은 다소 철학적인 것이다. 강신익 인제대 교수(의학철학)가 ‘진보평론’에서 이 문제를 심도깊게 다루어서 여타의 논문들과 다른 신선한 맥락을 형성했다. 먼저 강 교수는 황 교수가 생명을 ‘과정’으로 보지않고 ‘결정’으로 보는 오류를 범한다고 지적한다. 유전자가 모든 형질을 결정한다는 것은 단순논리이며, 유전정보가 담겨있는 이식된 핵을 제외한 난자의 물컹물컹한 미트콘드리아에도 그것을 길러낸 모체가 겪어온 생물학적 삶의 역사가 담겨있다는 것. 따라서 강 교수에 따르면 ‘복제’라는 것도 모순어법인 셈이다. 왜냐하면 복제라는 것은 똑같은 것이 한 번 더 반복된다는 의미인데, 핵을 제외한 다른 부분은 똑같지 않기 때문. 좀더 철학적으로 나아가면 인위적으로 생성된 배아나 줄기세포는 “세포의 공여자를 위한 수단일 뿐,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생성된 배아와 세포핵의 공여자는 생물학적으로 동일한 운명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른다고 강 교수는 말한다.

그런데 이상의 담론들은 황우석 연구에 잿빛을 드리우는 주장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오히려 한국의 생명담론과 복제연구 관련 윤리 및 과학논쟁은 황우석 교수의 연구가 진전되는 것과 보조를 맞춰서 발전하는 모습으로 보인다. 과연 이런 연구와 논의들이 계속적인 담론을 만들어내고, 복제연구가 현실화된 현실을 위한 제도적 장치와 사회적 합의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건설적인 후속논의가 기대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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