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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한국인 학자가 쏘아올린 작은 공
재일한국인 학자가 쏘아올린 작은 공
  • 이세영 기자
  • 승인 2000.11.14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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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현해탄을 넘어 송부돼온, 이 장문의 보고서가 한국의 지식인들에겐 몹시도 당혹스러운 것이었으리라. 사회구성체 논쟁에서 시민사회 논쟁, 모더니티 논쟁을 거쳐 동아시아 담론에 이르는 방대하고도 복잡미묘한 논쟁의 지형도를, 한 사람의 힘만으로 그려낼 수 있으리라 누가 감히 예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윤건차 가나가와대 교수는 80∼90년대 한국지식인들의 이론과 사상을 3백50여 페이지 분량의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 안에 고스란히 응축시켜 놓았다. 이 책이 단순한 ‘사상의 연대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어지럽게 흩어진 크고 작은 사상의 조각들을 정교하면서도 날렵하게 기워놓은 저자의 눈썰미와 마름질 솜씨 덕분이다.

‘지식인지도’ 관통하는 ‘레테르의 정치학’

부록으로 첨부된 ‘지식인 지도’에서 윤교수는 65명에 달하는 한국의 대표적 논객들을 15개의 사상집단으로 분류해 놓았다. 해당분야의 비전공자들에겐 미로를 헤쳐나갈 친절한 안내서가 될 터이지만, 정작 호명된 당사자들關?적이 불쾌감을 느꼈을지 모를 대목이다. 지도작성에 활용된 윤교수의 전략은, 굳이 명명하자면 ‘레테르의 정치학’ 쯤이 적절할 법하다. 김세균·김성구 같은 학자들에겐 ‘구좌파 맑스주의자’라는 명칭이 부여됐고, 조갑제·이도형처럼 익숙한 수구인사들은 ‘극우반동’이란 이름으로 호명됐다. 뭐 그리 새로운 전략이랄 것까지는 없다. ‘레테르의 정치학’이란 기실 언어가 갖고 있는 주술적 힘에 의존하는 ‘고전적인’ 책략 가운데 하나니까. ‘이름’은 사물·대상이 갖는 위력과 그에 대한 인간의 공포를 적정한 수준으로 순치시킨다. 마치 ‘죽음’이라는 단어가 죽음을 향해 서서히 다가서는 우리를 때로 안심시키는 것처럼. 이렇게 본다면, 윤교수의 명명법은 50여년을 본국과 단절된 상태에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던 재외학자가, 낯선 담론의 세계에 접근하기 위해 구사한 일종의 ‘친숙화’ 전략인지도 모른다.

책에 대한 논란은 대부분 지식인 지도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거의 모든 일간지 서평에서 “수긍하기 어려운 분류가 여럿 눈에 띤다”거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인물구분”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리 민감하게 반응할 문제만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름 붙이기’란 그 자체로 명명자와 피명명자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일종의 담론투쟁이 아니던가. 그런데 비판들 가운데는 비판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유치한 투정 수준의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한번도 주류였던 경험이 없는 좌파를 적극적으로 ‘우대’했다”는 비판이 그렇다. 지도에 등장시킨 지식인들의 좌우 구성비가 불균등하다는 지적으로, 일견 설득력은 있어 보인다. 그러나 사상적 헤게모니의 지형을 단순한 수적 우열관계로 파악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헤게모니를 지탱하는 것이 지적·도덕적인 우월성이고 보면, 학살에 침묵하고 독재자에 기생해온 한국의 우파들에게 도덕적인 지도력, 변변한 지적 자산이라도 있었는지 진지하게 자문해볼 일이다. 결국 평자는 담론의 각축장에서 헤게모니가 형성되고 관철되는 방식에 대한 자신의 무지만을 폭로한 꼴이었다.

이 문제작은 4개의 장으로 이루어져있다. 사회구성체 논쟁을 중심으로 80년대 사상흐름을 개괄한 1장과 사회주의권 붕괴를 전후한 사상의 지형변화(특히 시민사회론의 등장)를 다룬 2장에 이어, 3장과 4장에서는 각각 근대성 문제와 정권교체 이후 형성된 새로운 논쟁지형을 중심으로 90년대 사상사를 조명했다. 하지만 이 책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미 선행연구의 성과물들이 상당부분 축적되어 있는 1·2·3장의 논의들 보다는 DJ정권 등장이후의 사상흐름을 기술한 4장이다. ‘지식인 지도’ 역시 4장의 논의에 기초해 있다.

두 개의 화두, ‘탈식민지’와 ‘분단극복’

 

우선 시야에 잡히는 것은 한국의 자유주의 사상에 대한 윤교수의 진단이다. 알려진 대로 자유주의자 그룹은 DJ정부 출범이래 활발한 정치무대 진출로 주목받은 학자집단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저자의 시선이 썩 곱지만은 않다. 그가 볼 때 이들은 “현실적으로는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적지 않은 친화성을 가지면서도 그 대부분이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는 인물들”인 탓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윤교수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의 최장집을 들고 있다. 아마도 시카고대 유학시절 쉐보르스키로부터 사사했던 최장집의 이력이 시장기능을 정당화하는 듯한 일련의 발언들과 적지 않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라 판단했을 법하다. 하지만 최장집에 대한 윤교수의 평가는 그나마 우호적인 편이다. ‘개량적 자유주의자’로 분류된 한상진의 ‘제3의 길’을 두고 “개념과 결론만 앞서는…중산층 중시의 이데올로기”라 일축한다거나, 황태연에 대해 “정치적 재능이 남다른” 인물이라 평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분단’과 ‘식민지성’ 문제는 저자의 주요 관심사 가운데 하나다. 적지 않은 지면을 백낙청의 ‘분단체제론’에 할애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분단체제론’을 두고 윤교수는 “선통일·후민주변혁론과 선민주변혁·후통일론 사이의 논쟁과 대립을 극복하고, 민주변혁과 통일을 일체화시키려 한 실천적 의지의 표현”이라 평가한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공평무사하다. 분단체제론 역시 “남북한과 미국의 관계를 특수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남북한 민중의 연대가능성과 분단체제 극복운동에 대해서도 명확한 서술을 결여하고 있다”는 비판이 뒤따르는 탓이다.

‘탈식민지’란 화두는 ‘분단극복’이란 주제와 더불어 저자의 모든 의식세계를 관장하는 규제이념이다. 주의할 점은 윤교수가 구사하는 ‘탈식민지주의’란 통상 ‘탈식민주의’로 번역되곤 하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postcolonialism)과도 다른 개념이라는 것.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과제가 “독립 후에도 지속되는 식민지적 잔재를 청산”하는 것에 놓여있다면, 탈식민지주의는 “과거의 식민지 지배 및 오늘날의 지배 상황으로부터 동시적인 탈식洸??지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은 식민지 이후(post-colonial)가 아니라 신식민지(neo-colonial)”라는 것, 그리고 “한국의 탈식민지주의는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을 동시에 끌어안으며 추구돼야 할 과제”라는 것이 윤교수의 확고한 지론이다.

시각이 이렇다면 문학이나 페미니즘에서 개진되는 탈식민주의에 대해 저자가 불만을 갖는 것도 당연하다. 이를테면 문학은 “탈식민화를 정치·경제적 차원을 누락한 채 문화의 문제로만 사고”한다는 점에서, 페미니즘은 “인간억압과 여성억압이 발생한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1세계 담론을 무분별하게 차용”한다는 점에서 치명적인 오류를 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인식은 자칫 ‘문화주의의 역편향’이란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문화의 식민성은 간과한 채 정치·경제적 식민성(혹은 모더니티)만을 특권화한다는 인상은 아무래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 까닭이다. 저자의 뿌리깊은 反-문화주의, 그리고 분단과 식민지성 문제에 대한 끈질긴 집착은 과연 어디서 연유하는가. 아무래도 여기엔 재일조선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개인사적 경험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배타적인 일본사회 속에서 아시아계 소수민족들이 체험하는 억압과 ‘식민지성’은 비단 문화적인 것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물리적·제도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아울러 정체성에 대한 이들의 고민 역시, 남북 정치지형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유동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보면, 저자가 왜 ‘분단’이란 화두에 그토록 집착하는지에 대한 궁금증도 풀린다.

탈근대 문제의식 끌어안은 사민주의자?

 

물론 저자는 완고한 민족주의자가 아니다. 행간을 읽다보면 그가 ‘탈근대적 문제의식을 끌어안은 사회민주주의자’일지 모른다는 심증을 굳혀가게 된다. 저자의 유연함은 ‘탈서구주의’를 표방하는 지금의 동아시아담론을 비판하는 대목에서 돋보인다. 그가 검토하는 대상은 ‘창비’와 ‘전통과 현대’의 동아시아론이다. 그는 창비의 동아시아론이 “사상적으로는 진보적 민족주의의 성격을 띠지만, 동아시아의 경험을 특권화하고, 서구의 블록화를 모방한 아시아의 블록화, 서구중심주의를 대신하는 새로운 중심주의로 빠져들 수도 있음”을 경고한다. ‘전통과 현대’의 유교담론에 대해서는 더욱 냉소적이다. “유교나 자본주의에 대한 개념적 이해가 부족, 하나의 논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조잡”할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는 기득권층 옹호를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윤교수의 작업에 미덕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한계는 대체로 국내의 움직임이나 사상조류에 대한 해석과정에서 노출된다. IMF 위기가 지식인 사회에 가져온 변화의 의미를 과도하게 강조하거나, 특정한 지성사적 사건을 평가함에 있어 국내평자들의 논의와는 상반된 해석을 내놓는 경우가 가끔 눈에 띤다. 국외거주자의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볼 수도 있는 대목이다. 어쨌든 윤교수는 격심한 조울증에 시달리는 한국 지식인 사회의 하늘 위로 ‘작지만 단단한 쇠공’을 쏘아 올렸다. 그의 주장은 보다 면밀한 검토와 토론의 대상으로 남겠지만, 한 가지 만은 확실하다. 그의 작업이 한국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분발을 촉구하는 신선한 자극이 되리라는 것이다.

< 이세영 기자 syle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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