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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 4차 한류를 통해 보는 미래의 한일관계 기상도
[글로컬 오디세이] 4차 한류를 통해 보는 미래의 한일관계 기상도
  • 노유니아
  • 승인 2021.12.08 09: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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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컬 오디세이_노유니아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일본 도쿄의 한 대형 마트에서 한국 냉동만두 제품이 판매 중이다. 위에 한국 소주가 진열된 것도 보인다. 사진=노유니아

“최근 사랑의 불시착을 봤는데, 한국의 냉장고는 참 크군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 한일 평화를 위해서 한국 드라마를 보라고 얘기하고 있어요.” 내 기억으로는 그간 한 번도 한국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본의 은사로부터 이런 메일을 받았다. 

일본학 연구자들 중에는 한류를 언론의 설레발 정도로 치부하고 그 영향력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는 분들이 많다. 문화로 정치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이다. 필자도 소위 ‘국뽕’이라면 질색이지만, 일본에서 현재 불고 있는 4차 한류의 실체는 언론의 과장이 아니라 본다. 작년 유행어・신조어 대상 후보에 ‘사랑의 불시착’이 오른 데 이어 올해에는 ‘오징어 게임’이 올라 있어서가 아니다. 

일본의 동네 슈퍼 어디에서나 쉽게 찾을 수 있게 된 ‘비비고 만두’를 보며 한류의 새로운 파워를 실감하고 있다. CJ제일제당은 최근 일본에서 판매 중인 만두류의 제품명을 ‘교자’에서 ‘만두’로 변경하고 가타카나로 ‘マンドゥ’, 로마자로 ‘MANDU’라고 표기한 새 패키지를 선보였다. 지상파TV 광고(유튜브 바로가기)도 내보내고 있다. 드라마 ‘이태원 클라쓰’의 주인공, 박서준이 모델이다. 

작년, 편의점 세븐일레븐에서는 레토르트 ‘삼겹살(サムギョプサル)’과 ‘치즈 닭갈비(チーズタッカルビ)’를 내놓아 판매 호조를 달리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에서는 ‘핫도그’와 ‘홋또도그’가 다른 음식이다. 둘 다 로마자 표기는 ‘hot dog’이지만 ‘홋또도그(ホットドッグ)’는 고전이고, 한국식 발음인 ‘핫도그(ハッドグ)’는 속에 모차렐라 치즈를 넣거나 표면에 감자 등을 붙여 튀긴 최신 유행이다. 한국 길거리 음식이 건너가 일본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이 되었다. 

여러 전문가가 작금의 한일관계가 최악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지난 10년을 돌이켜보면 과연 쉬웠던 적이 있었나 싶다. 유학길에 올랐던 2010년, 중국이 일본의 GDP를 추월하며 세계 제2경제대국의 자리가 바뀌었고 바로 다음 해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났다. 자민당의 복권과 우경화, 역사 교과서 문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혐한세력의 급부상, 군함도의 세계유산 등록… 이방인으로 사는 내내 혐중 아니면 혐한의 저의가 느껴지는 언론 보도가 번갈아 가며 스트레스를 안겨주었다. 2016년 시행된 ‘헤이트 스피치 억제법’은 당시 그만큼 혐한 시위가 많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그러는 한편으로 일상생활에서 만날 수 있는 한국 문화는 더 다양해졌고 지속적으로 두터워져 왔다. TV 드라마뿐만이 아니다. 웹툰 플랫폼 업계 1, 2위를 다투는 ‘LINE 만화(NHN)’와 ‘픽코마(카카오)’를 매개 삼아 한국 웹툰이 거의 실시간으로 번역, 소비된다. 현대문학에서도 『82년생 김지영』을 위시하여 많은 작품이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영화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상 수상, 전 세계인이 즐기는 BTS, 블랙핑크의 음악은 한류를 대중문화의 메인스트림으로 굳혔다.

1차 한류는 2012년에 독도를 둘러싸고 빚어진 외교 갈등으로 인해 순식간에 식었다. 그러나 반복된 학습효과일까. 4차 한류는 정치적인 측면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올해 동아시아연구원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류를 소비하는 층의 81.2%가 한국에 호감을 느끼고 있다고 대답했는데, “한일관계 악화가 한국 대중문화 소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라는 의견은 64.6%에 달했다. 실제로 최근에 있던 무역 분쟁과 일련의 외교 마찰에도 불구하고 한류의 바람은 거세기만 하다.

설혹 일본 정부가 방향을 왼쪽으로 다소 바꾼다고 하더라도, 역사 교육이 우리가 바라는 그대로 바뀌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이때 한류가 힘을 발휘한다. 무지를 탓하고 사죄를 요구하여 필연적으로 부(負)의 감정을 낳기보다, 문화를 통해 이해의 발단을 제공하고 호감을 쌓아가는 것이 현실적이고 건강하다.

한일관계의 내일은 적어도 오늘보다는 ‘맑음’이다. 일본 초등학교의 앙케트를 보니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에 절반 이상이 BTS, 트와이스, 블랙핑크를 적어내고, 급식 중 가장 맛있는 메뉴로는 ‘김치 챠완(볶음밥)’을 꼽는다. 식단에는 ‘비빔밥(ビビンバ)’은 물론이고 ‘나물(ナムル)’, ‘국밥(クッパ)‘, ‘육개장(ユッケジャン)’이 가타카나로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한다. 아사히신문에서 번역 출판한 한현동·곰돌이 작가의 학습만화 『-에서 살아남기』 시리즈는 누적 1천100만 권 이상 팔리는 대기록을 세웠고 올해 다섯 번째 극장판 만화가 제작됐다. 

아이들은 우리가 ‘한류’로 규정하는 것들을 이웃 나라 한국과 연관 지어 소비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맛있고 재미있고 주변 사람들이 좋아하기 때문에 즐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이 세대가 소비의 주역이 되는 시대가 될 때의 한일관계가 기대된다. 문화가 정치를 바로 바꿀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화는 경제 지형을 바꾼다. 그리고 정치는 경제를 무시할 수 없다.

 

노유니아 서울대 일본연구소 HK연구교수

서울대에서 스페인어문학과 미술이론을 전공했고, 도쿄대 문화자원학연구실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근현대 한국과 일본의 시각문화에 관련된 글을 쓰고 옮기며 관련된 전시에도 관여하고 있다. 저서로 『일본으로 떠나는 서양 미술 기행』(2015), 『가려진 한국, 알려진 일본』(2016). 『East Asian Art History in a Transnational Context』(2019·공저), 『일본 근대 디자인사』(2020·역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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