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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그 안에 담긴 인문학적 매력
‘4차 산업혁명’…그 안에 담긴 인문학적 매력
  • 이승건
  • 승인 2021.12.02 09: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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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말하다_『제4차 산업혁명』 | 클라우스 슈밥 지음 | 송경진 옮김 | 새로운 현재 | 287쪽

학문적 융합과 독특한 이력을 지닌 클라우스 슈밥
차가운 디지털에 녹여낸 이 시대의 인문학적 메시지

얼마 전, 우리대학 예술정보센터(도서관)에 한 무더기의 자료들이 들어 왔다. 이 자료들은 대부분 예술창작 및 예술인문학 분야와 관련된 근자에 출간된 서적과 새로운 과학기술의 지식을 소개하는 내용의 디지털 자료들이다. 그 어느 때 보다도 과학기술이 예술과 밀월(蜜月)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요즘, 디지털 자료의 소장과 확충은 예술과 과학의 융합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대학으로서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그러나 서평자에겐 아직까지도 종이냄새 물씬 풍기는 페이퍼 북에 먼저 손이 간다. 전공이 인문학 분야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비록 날카로운 콧날을 내세운 녀석에게 손이 베일망정 제각기 자신의 모습을 뽐내며 읽히길 기다리는 종이책들은 언제나 그 나름의 스타일(디자인)과 스토리로 내 상상력을 자극하며 정겹게 나를 맞이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평자에게도 선 듯 가까이 가지 못한 책이 있었다. 대학 시절, 세상을 다 아는 것처럼 보이는 선배가 권해 준 한 권의 책,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 1928~2016)의 『제3의 물결』(1980)이었다. 다이어리 크기에 600쪽 분량 정도의 두툼한 몸집은 일단 비주얼에서 강했다. 여기에 기원전 8천 년부터 1950년대 이후 현대까지 인류사를 꿰뚫어 보는 저자의 시야는 이제 갓 20살을 넘긴 문학청년에게는 너무도 벅찬 독서였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해 보니, 이 책의 독서로 인해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일단 끈질긴 독서 습관이 길러졌다. 그리고 역사라는 분야가 인문학 분야의 전문서적으로만 채워지는 게 아니라 과학기술 분야나 경제 분야를 통해서도 그럴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아마도 서평자가 소위 학문의 사통팔달이라고 불리는 미학을 전공하게 된 사연의 저 만치에는 이 책의 독서도 한 몫을 했으리라 생각한다. 

현대는 디지털 시대라고 한다. 또한 다원주의(pluralism) 시대라고도 한다. 이 두 단어만큼 현대적이면서도 미래지향적인 말은 없을 것이다. 또한 융합(融合, convergence)이니 통섭(統攝, consilience)이니 라는 말 역시 우리시대를 잘 대변하는 인문학적 개념으로 받아들인 듯하다. 그래서 인지 요즘에는, 시대성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 보다는 이 분야와 저 분야에 걸쳐 전문적이면서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분야를 개척해 내는 소위 학제간(inter-disciplinary) 창의적인 융합형 인물들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1938~ )이라는 인물도 그 중 하나라고 여겨지는데, 그는 경제학, 공학, 행정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연구를 행한 학자이자 기업가, 정치인으로도 활동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이런 그가 자신의 융합적 지식을 쏟아낸 책을 내 놓았는데, 『제4차 산업혁명』(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2016)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다. 시간이 흐른 지금에서야 그저 담담하게 이 책을 바라보고 있지만, 출간 당시만 해도 매우 요란한 주목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경제학 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교육학, 정치학 등 문화 전반에서 목격되는 '제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은, 알려져 있다시피, 스위스 다보스(Davos) 경제 포럼(제47회, 2016년 1월)에서 처음 등장했다. 즉 저명한 기업인, 경제학자, 저널리스트, 정치인 등이 스위스 다보스에 모여 범세계적 경제문제에 대해 토론하고 국제적 실천과제를 모색하는 비영리단체 국제민간회의 성격을 지닌 이 포럼에서 ’인공지능(AI), 로봇기술, 생명과학이 주도하는 차세대 산업혁명‘을 제4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한데서 유래한다. 그러나 이 용어는 아직까지도 보편적으로 확립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위키백과사전』에서는 ’지식산업‘을 가리키는 말로 정의하면서 그 세부영역에는 정보의 배포 및 공유, 정보기술, 상담, 교육, 연구 및 개발, 금융 계획, 기타 지식 기반 서비스가 포함된다고 제시하고 있고, 『매일경제 지식사전』에서는 4차 산업과 5차 산업을 나눠 설명하고 있는 바, 전자를 정보, 의료, 교육, 서비스 산업 등 지식 집약적 산업의 총칭으로, 그리고 후자를 패션, 오락 및 레저산업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4차 산업에 대한 영역을 좀 더 넓혀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다보스 포럼에서 정의한 AI, 로봇, 생명과학 이외에 정보 미디어 영역이나 금융, 의료와 교육, 서비스 등을 넣어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빅 데이터와 사물인터넷(Internet of Things(IoT)), 금융혁명을 주도하는 핀테크(FinTech)까지 확장해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니 좀 성글게 접근하자면 ’스마트폰에 의해 지식을 습득하는 인류‘(homo phono sapiens)가 직면한 현금의 스마트폰 문명 전체를 제4차 산업의 핵심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산업혁명은 18세기 이후 영국을 중심으로 일어난 산업의 변혁을 말한다. 주지하다시피 1차 산업혁명은 1784년 영국에서 시작된 증기기관 발명으로 생겨난 문명의 혁신을 말한다. 그리고 2차 산업혁명은 1870년 전기를 이용한 대량 생산과 자동화가 가능해지면서부터 진행되었다. 여기에 3차 산업혁명은 1969년 인터넷이 활성화되면서 컴퓨터 정보기술(IT)과 산업이 결합하면서 생겨난 문화적 빅뱅을 의미한다. 1차 혁명에서 2차 혁명으로 옮아가기까지는 86년이 걸렸다. 그리고 3차 혁명이 일어나기까지는 99년이 걸렸다. 그러나 4차 혁명에 이르는 데는 47년 밖에 걸리지 않았다. 더 나아가 지금도 4차 산업혁명과 함께 5차 산업혁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은 혁명의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음을, 그래서 우리의 삶도 그 만큼 변화의 속도가 빠르다는 사실을 드러내 준다. 
사실 2차 산업혁명을 주도한 전기는 인터넷으로 문명의 대전환을 몰고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4차 혁명은 실제로 3차 혁명을 심화하는 수준이라서 혁명까지는 아니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 변화의 규모나 양상은 가히 어마어마한 것이어서 인류의 삶 전체를 바꿨다는 측면에서 혁명의 지위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황을 고려해 볼 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기술의 인간화’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는 20세기 초부터 부상한 ‘기술의 비인간화에 대한 우려’의 화답으로서 인간의 지능과 기억 그리고 판단의 영역에까지 기술이 깊숙이 파고들어 물질과 정보에 대한 기술 그 자체가 인간의 능력과 삶을 획기적으로 변모ㆍ확장시킬 수 있다는 기술에 대한 낙관론이 짙게 깔려 있기에, 인간과 기술의 경계를 섬세하게 재조정하는 과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제 21세기는 사회 전체가 기술이 이룩한 시스템으로 움직일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다시, 서평의 대상인 『제4차 산업혁명』으로 돌아가 보자! 지난 10월26일 교수신문은 카이스트 한국4차산업혁명정책센터와 공동으로 「4차 산업혁명의 빛과 그림자」 좌담회(오후 3시~5시)를 열고 유튜브 채널로 생중계를 하며 우리시대의 4차 산업혁명 현주소를 짚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관련 기사(《교수신문》 제1088호, 2021년11월1일 발행)를 접하면서 불현 듯 클라우스 슈밥의 『제4차 산업혁명』을 다시 읽어 보게 되었다.

 

기술낙관론이 지닌 오류와 4가지 지능

이 책에서 클라우스 슈밥이 내세우는 이야기는 명확하다. ‘제4차 산업혁명은 무엇인가?’, ‘무엇을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공익을 위해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저자는 이 네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제1부(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와 제2부(제4차 산업혁명의 방법론)로 나누어 제시한다. 그러나 예술인문학 연구자로서 서평자는 이 책의 결론 격에 해당하는 제2부의 맨 마지막 부분인 「제4차 산업혁명의 성공을 위하여」에서 저자의 이력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그의 인문학적 인품에 매료당했다. 즉 그는 “제4차 산업혁명은 파괴적 혁신을 이끌어내겠지만 그에 따라 발생되는 문제들은 오롯이 우리가 자초한 일”일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변화와 정책을 만들어 내는 일 역시 우리의 몫’이라면서(251쪽), 기술낙관론이 범할 수 있을 오류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한다. 구체적으로 이와 같은 일을 달성하려면 4가지 지능 ― 상황 맥락지능으로서 ‘정신’, 정서 지능으로서 ‘마음’, 영감 지능으로서 ‘영혼’, 신체 지능으로 ‘몸’ ― 을 키울 것을 제안한다. 자칫 건조할 것만 같은 사회과학 서적에서 좀처럼 만나기 쉽지 않은 인문학적 미풍(微風) 지대라고 말할 수 있겠다. 

다시 읽어 봐도, 이 책은 급속한 기술혁신에 따른 4차 산업혁명 자체에만 집중하고 있지 않은 느낌이다. 시인 릴케(Rainer Maria Rilke, 1875~1926)와 계몽주의 철학자 볼테르(Voltaire, 1694~1778)를 자유롭게 인용하며 ‘새로운 르네상스를 향하여’(257~261쪽))의 소절로 마무리 짓고 있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책의 인문 서적으로서의 향기는 더없이 강하게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한 복판에서 어쩔 수 없이 접하게 되는 디지털의 차가움에 대해 클라우스 슈밥이 전하는 이 시대의 인문성은 시각ㆍ후각ㆍ촉각 등 감각으로 보충시켜 줄 종이책의 감성적 매력에 덧붙여 그 의미가 매우 값지다고 하겠다.    

 

 

 

이승건
서울예술대 교수ㆍ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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