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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과제가 없는 이유
연구과제가 없는 이유
  • 임재영
  • 승인 2005.09.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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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실

▲왼쪽부터 김종호, 최경훈, 김군식, 임재영 교수, 강정현, 박호진, 원종철 ©

임재영 (인제대·나노공학부)

내가 처음으로 연구실에 학생을 받기 시작한 때는 1992년 대덕연구단지의 한 연구소에서였다. 대덕에 있는 연구소에서는 학생을 직접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대학과 연계하여 공동지도교수로 학생을 받을 수 있는데 이들 학생은 학교에서는 수업만 받고 모든 연구와 생활은 연구소에서 한다. 그 당시 나는 학생들에게 내가 수행 중인 과제를 시키는 대로 충실히 하고, 스케줄에 따라 연구를 수행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으로 4년간을 한 후 나는 나의 연구실 운영방침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학생들이 절제된 상황에서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알맹이 있는 결과가 나오지 못하고 그냥 포장지 같은 결과들만이 양산되고 있었다. 그리고 선배들이 맡아서 수행했던 연구 장비 및 연구내용 들이 후배들에게 깊이 있게 전수되지 못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들 간에는 본인이 수행하는 연구 분야에 따라 울타리가 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이후 나는 연구실의 운영방침을 180도 바꾸게 되었다. 연구실의 최우선을 연구보다는 학생들 간, 그리고 나와의 화합으로 정하였다. 화합을 위해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적어도 2주일에 한번 정도는 학생들과 저녁식사를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내가 관여하거나 책임자로 있는 연구과제에 대하여 학생들에게는 일체 이야기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학생들은 과제수행에서 해방되게 하였다.

대신 학생들에게는 과제와 관련된 한 두 가지씩의 테마를 주어 학생 스스로 연구계획을 세우게 한 후 그 계획에 대하여 전체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서로 이야기하고 토론 하게 하였다. 이와 같이 하여 세워진 연구계획을 가져오면 무조건 허락하였다. 이때 학생들에게 학생들이 세운 계획을 절대로 문서로 받지 않았다. 어떤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연구실은 왜 연구과제 안 하지요?”

학생들에게는 엄청난 변화였다. 그러나 매우 좋은 변화였다. 연구실의 분위기가 매우 좋아졌을 뿐만 아니라 연구결과도 매우 알맹이가 있었으며, 그에 따라 SCI 논문의 수도 2배 이상 증가 하였다.

지금은 연구소를 떠나 대학에서 학생들을 교육하고 있다. 물론 연구소에서 터득한 방식대로 연구실을 운영하고 있다. 우리 연구실의 첫 번째 구호는 ‘우리는 가족’이다. 학생들이 우리 연구실에 들어오고 싶다고 찾아오면 한 가지 당부하는 것이 있다. “연구실에서 선배를 잘 모시고 후배를 사랑해야 한다.”

우리 연구실에 들어오는 신입생은 첫 날에 우리들만의 신고식을 치러야 한다. 요즘에는 나이가 들어서 인지 나에게 체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서 요사이는 신입생 연구실 신고식 때 연구실 대장이 많은 고생을 하고 있다. 신고식을 치른 다음날부터는 그는 신입학생이 아니라 가족이 되고 만다. 화합과 사랑을 중요시 한다고 연구성과가 절대로 적은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 연구실을 졸업하는 석사과정 학생들을 보면 평균적으로 SCI에 2편, 국제학술대회에 3편, 국내학술대회 3편정도 발표하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연구실(연구소 포함)을 거쳐 간 학생이 20명 정도 된다. 내가 가장 보람을 느끼는 것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들이 모여서 그들만의 홈페이지를 운영하면서 서로 연락을 주고받으면서 가족처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난 8월말에 대학에서 선생을 하고 있는 졸업생과 대덕연구단지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는 졸업생이 고생하고 있는 동생들을 위해 실험용 시료를 가지고 먼 길을 찾아 와서 연구실 동생들과 술 한 잔을 기울이고 갔다. 고맙다. 우리 연구실의 가족적인 분위기가 계속 유지되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작은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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